2017.04.05 00:18
동네 수퍼마켓에서 딸기 세일한다고 문자가 와서 세 팩을 주문해서 실컷 먹었더니 기분 좋아요. ^^
밭에서 금방 따온 것같이 알은 작지만 빨갛게 익은 딸기가 달고 맛있어서 지금이 벌써 딸기 나오는 계절인가 싶었네요.
그러다 오랜만에 시나 읽어볼까 하고 예전에 적어놨던 시를 찾아보니 허수경 시인의 시 '딸기'가 있는 거예요.
이건 듀게에 시를 올려보라는 하늘의 계시인 것 같아 이 시가 실린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있는 시들을
좀 더 찾아서 읽어보다가 몇 편 가져왔어요. (좀 있으면 수박도 세일하겠죠. 저는 수박을 더 좋아해서 두근두근 기다리고 있어요. ^^)
딸기
당신이 나에게 왔을 때 그때는 딸기의 계절
딸기들을 훔친 환한 봄빛 속에 든 잠이
익어 갈 때 당신은 왔네
미안해요, 기다린 제 기척이 너무 시끄러웠지요?
제가 너무 살아 있는 척했지요?
이 봄, 핀 꽃이 너무나 오랫동안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어요
우리 아주 오래전부터
미끄러운 나비의 날갯짓에 익어가던 딸기처럼 살았지요
아주 영영 익어버린 봄빛처럼 살았지요
당신이 나에게로 왔을 때
시고도 달콤한 딸기의 계절
바람이 지나가다 붉은 그늘에 앉아 잠시 쉬던 시절
손 좀 내밀어
저 좀 받아 주세요
푸른 잎 사이에서 땅으로 기어가며 익던 열매 같은
시간처럼 받아 주세요
당신이 왔네
가방을 내려놓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네
저 수건, 태양이 짠 목화의 숨
작은 수건에 딸기물이 들 만한 저녁 하늘처럼
웃으며 당신이 딸기의 수줍은 방으로 들어와
불그레해지네 저 날숨만 한 마음 속으로 지던
붉은 발걸음 하나
미안해, 이렇게 오라고 해서요
미안해, 제가 좀 늦었어요
한 소쿠리 가득한 딸기 속에 든
붉은 비운을 뒤적이는 빛의 손가락 같은 간지러움
당신이 오는 계절,
딸기들이 당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영영 오지 않을 꿈의 입구를 그리워하는 계절
오렌지
우리의 팔은 서로에게 닿으면서 둥글어졌다 묘지 근처 교회당에서 울리던
종소리처럼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 안았다 우리의 검고도 둥근 시간, 그리고
그 옆에서 오렌지 나무 하나가 흔들거렸다
누가 오렌지 화분을 들고 왔어! 장례식에 이토록 잔인한 황금빛 우물을? 우
리는 항의했다
너는 말했다,
"나는 오렌지를 좋아했으니까 오렌지 열리는 더운 나라로 가서 하얀 집의 창
문가에 앉아 달이 떠오르는 바다를 깨물고 싶었으니까"
오렌지 나무는 아무 말 없이 녹빛 그늘의 눈을 우리에게 주었다. 단단한 잎은
번쩍거렸다 나는 너에게 둥글게, 임신 말기의 여름에 열리던 아주 둥근 열
매처럼 단 한 번만 더 와달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잘 가, 라고 말하는 순간 깊숙한 고요는 얼마나 너를 안고 빛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가 나는 모른 체했다 그것이 오렌지가 열리는 여름에 대한 예의였
다 오렌지 안으로 천천히 감기고 있는 너의 눈꺼풀을 나는 보았다
우리의 몸은 추상화가 아니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이 삶을 집어치우며 먼
바다로 가서 검은 그늘로 살 수도 있었다 언제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몸은
커녕 삶도 추상화가 아니어서
몸속 황금빛 동굴에는 반달 같은 오렌지 조각이 깨어져 있다 여린 껍질 속,
타원형 눈물들이 촘촘히 박혀 시간의 마지막 빛 아래에서 글썽거렸다 우리
는 여름 속에 들어온 푸름이 아니라 푸름의 울음이었다
잘 가,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 어떤 춤을 추면서 너와 나는 둥글어질까,
여름의 장례식, 우리는 오래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우리는 오렌지의 영혼
을 팔에 안으며 혼자서 둥글어졌다 잘 가, 원점으로 어두워가던 너의 발이
여, 오렌지빛의 소풍이여
수박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빙하기의 역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 뜰 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
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밥빛
너에게 쓰는 편지 속 말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기어이 잦아들었네
어떤 지상의 날
봄 햇살이
두통의 두릅이 돋는 순간을
다스리는 때,
나는 머리를 숙였네
지난 계절
밥알마다 네 얼굴이 어려 있어
그 밥,
차마 먹지 못해
편지를 접었는지도
여름 밥빛은
네 얼굴을 지웠다
가을 단풍이 진하게 달인
붉은 간장의 저녁을
기름 오른 새들이 지나갔을 때
겨울 숭늉의 잔웃음 곁으로
무말랭이의 고드름이 열려도 괜찮아서
담담함은 밥상을 편다
볼이 미어지도록
밥 한 그릇 다 먹고
달고도 쓴 시래기국밥 잠 길게 잤다
아, 우리 코 골며 이 갈며 잘 살고 있었네
이 세상, 천국이어서 살찐 허벅다리 사이
봄 멸치는 구름의 골목을 떠돌다가 잠들었네
이 골목의 부자들은 낯설디낯선 모국어로
우리의 가난을 경멸했고
아, 이 천국, 너의 눈동자를
나는 내 살의 가장 깊숙한 영혼 소금으로 절인다
이 천국, 초승달 길 파랑은 영혼의 젓갈로 사무치네
2017.04.05 00:58
2017.04.05 01:19
좀 전에 허수경 시인의 시 한 편의 제목이 생각이 안 나서 그게 뭐였지, 그게 뭐였지 하고 계속
머리를 쥐어뜯다가 (저의 놀라운 검색 실력에도 나오지도 않고 ^^) 마침내 찾았네요.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시인 중에 허수경 시인만큼 제 마음을 아프게 한 시인은 없었던 것 같아요.
수수께끼
극장을 나와 우리는 밥집으로 갔네
고개를 숙이고 메이는 목으로 밥을 넘겼네
밥집을 나와 우리는 걸었네
서점은 다 문을 닫았고 맥줏집은 사람들로 가득해서 들어갈 수 없었네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아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 있어?
이별만 있었지
나는 그 후로 우리 가운데 하나를 다시 만나지 못했네
사랑했던 순간들의 영화와 밥은 기억나는데
그 얼굴은 봄 무순이 잊어버린 눈[雪]처럼
기억나지 않았네
얼음의 벽 속으로 들어와 기억이 집을 짓기 전에 얼른 지워버렸지
뒷모습이 기억나면 얼른 눈 위로 떨어지던 빛처럼 잠을 청했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이 만년 동안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내가 만년 동안 당신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붙들고 있었네
먼 여행 도중에 죽을 수도 있을 거야
나와 당신은 어린 꽃을 단 눈먼 동백처럼 중얼거렸네
노점에 나와 있던 강아지들이 낑낑거리는 세월이었네
폐지를 팔던 노인이 리어카를 끌고 지하도를 건너가고 있는 세월이었네
왜 그때 헤어졌지, 라고 우리는 만년 동안 물었던 것 같네
아직 실감나지 않는 이별이었으나
이별은 이미 만년 전이었어
그때마다 별을 생각했네
그때마다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를 생각했네
수수께끼였어,
당신이라는 수수께끼, 그 살[肉]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들은
회빛 산맥을 어린 안개처럼 안고 잠을 잤을까?
댓글 올리고 나서 예전에 이 시를 댓글로 단 적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찾아보니
제가 올린 적이 있네요. 한 번 올린 시는 다시 안 올리는데 요즘 기억력이 나빠져서...
중복되지 않은 시로 한 편 더 붙여 봅니다. ^^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 공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에 눕고
술병을 들고 앉아 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 갈 때
그 옆에 앉아 상처 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몰랐네
이 시간에는 문득 해가 차가워지고 그의 발만 뜨거워
지상에 이렇게 지독한 붉은 빛이 내리는 것을
수도원 너머 병원 너머에 서서
눈물을 훔치다가 떠나버린 기차표를 찢는
외로운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
나는 몰라서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지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 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2017.04.05 02:51
2017.04.05 09:33
저는 귤을 먹을 수 없으면 겨울 내내 입이 허전할 것 같아요.
이제 허수경 시인의 시는 밑천이 다 떨어져서 다른 시인의 시 한 편~
산수유 열매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네요.
나무를 낳는 새
유하
찌르레기 한 마리 날아와
나무에게 키스했을 때
나무는 새의 입 속에
산수유 열매를 넣어주었습니다
달콤한 과육의 시절이 끝나고
어느 날 허공을 날던 새는
최후의 추락을 맞이하였습니다
바람이, 떨어진 새의 육신을 거두어 가는 동안
그의 몸 안에 남아 있던 산수유 씨앗들은
싹을 틔워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는 그렇듯
새가 낳은 자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새떼가 날아갑니다
울창한 숲의 내세가 날아갑니다
2017.04.06 04:39
2017.04.05 09:29
꿈에서 말을 조립하기 아주 좋아요.
2017.04.05 09:57
허수경 시인이 '꿈'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던 것 같아서 찾아보니 좋아했던 시 한 편이 나오네요.
이 시는 듀게에 안 올렸던 것 같아서 한 번 가져와 봅니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2017.04.05 17:16
딸기라는 시는 매우 좋군요! 잘 보고 갑니다.
2017.04.05 22:55
위에서 댓글 다느라 바빴네요. ^^ 딸기에 대한 다른 시를 좀 찾아보다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고... 뭔가 새로운 시를 올리고 싶은데 제가 쟁여둔 시들 중에
지금 마음에 드는 건 이 시라서 한번 올려봅니다.
책상
박형준
책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어요
나는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 그저 펼쳐 볼 뿐이에요
내 거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뿐
나는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좋아하고
책 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거림을 사랑하지요
예언적인 강풍이 창을 때리는 겨울엔
그 반향으로 페이지가 몇 장 넘어가지만
나는 벽에 부딪혀 텅 빈 방 안을 울리는 메아리의 말과
창밖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식사를 하고
매일 새롭게 달라지는 거처를 순간 속에 마련할 뿐
죽음이 뻔뻔하게 자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안을 드러내는 밤중엔
여유롭게 횡단하지요, 나는 어둔 책 속에 발을 담그지 않아요
그저 책상에 흐르는 강물 끝에 손을 적실 수 있을 뿐
책상에 넘치는 강물 위로,
검은 눈의 처녀가 걸어 나오는 시각엔
바람의 냄새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대양을 꿈꾸지요
시를 읽을 때마다 시를 쓴다는 건 정말 어렵다는 걸 느껴요. 아름다운 시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