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혼물)

2017.04.03 17:17

여은성 조회 수:1055


 1.요즘은 새로운 곳에 몇 번 갔어요. 저번에 말한 새로운 곳이 아니라 새로운 새로운 곳이요. 이곳도 좀 심드렁해지고 있었지만 사장이 '우리 가게에 왔다면 진짜로 봐야 할 직원이 있다...보게 되면 당신도 좋아하게 될 것'이라며 금요일날쯤 한번만 더 오라고 했어요. 뭔가 마지막 비장의 카드라도 준비한 것처럼요. 


 솔직이 지금까지 본 인적자원들로 봐선 마지막 비장의 카드 같은 건 없을 것 같았지만...어차피 호기심은 늘 승리하니까요. 게다가 할 일도 없고요. 그래서 금요일날 갔어요.


 하지만 '할 일 없으니까 한다'라는 자세로만 살면 인생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연역적 추리를 좀 해봤어요. 일단 사장에게 '마지막 비장의 카드'라는 게 있으면 금요일날엔 반드시 출근할 거라는 건 상식적이긴 해요. 일주일에 한번 바에 오는 손님...일주일에 한번만 바에 올 수 있는 손님들이 있다고 치면, 그 사람들은 대체로 금요일날 오는 법이니까요. 금요일은 어느 술집이든 질과 양에서 최선의 인적자원들을 투입해야 하는 날이죠. 사장 입장에서요. 


 어쨌든 추측하기로...그동안 주중에는 한 번도 못 본 직원이라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출근하는 사람이란 뜻이죠. 금요일날 하루만이라도 출근시키는 직원이라면...그렇거든요. 일주일에 하루만 출근하겠다고 가게에 면접보러 오면 그 사람은 채용되지 않아요. 한데 일주일에 한번정도, 금요일날만 출근한다는 건 사장이 꽤나 한수 접어주고 있는 직원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이런저런 추론을 통해 어쨌든 에이스이긴 에이스긴 하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2.문제는 거긴 홍대쪽이었어요. 술집 앞에는 클럽인지 뭔지가 있었고요. 주중에 왔을 땐 나름 조용했는데 매우 시끄러운 걸 보니 아마도 주말에만 영업하는 클럽인 듯 했어요. 바로 다음 순간에라도 스피커가 폭발할 것 같았어요. 


 '음악 소리라는 것이 저렇게 클 필요가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 큰 음악소리만으로도 신경질이 거의 맥시멈에 도달했어요. 혹시 바에 들어가서도 저 정신나간 볼륨의 정신나간 비트의 정신나간 멜로디를 들어야 한다면 우중충하고 신경질적인 야경이 기다리고 있는 강남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우중충하고 신경질적인 곳에 가면 기분이 좋아져요. 한데 그 바는 방음이 꽤나 잘 되어 있다는 걸 그 날 가서야 깨달았어요. 하긴 홍대의 클럽 옆에 차렸는데 처음부터 방음시설을 고려하긴 했겠죠. 헤헤, 이런 쓸데없는 추리를 해보는 걸 좋아해요.



 3.보통이라면 괴상한 내용이 죽 이어지다가 사장의 '마지막 비장의 카드'는 5번 문단쯤에 등장하겠지만...귀찮으니까 그냥 여기서 나오는 걸로 하죠. 어쨌든 가게에 가자 사장이 말한 마지막 비장의 카드(이하 ss)가 나왔어요.


 개인적으로 '내겐 게이다(게이레이더)가 있어'라거나 '난 촉이 좋아. 니가 다 보여'같은 헛소리하는 놈들을 싫어하고 믿지도 않아요. 정말 그런 통찰력이 있다면 그런 통찰력을 가지고 헛소리따위나 할 필요 없이 강원랜드에 가서 돈을 벌면 되는거니까요.


 어쨌든 ss를 보는 순간 꽤 고급 룸살롱에서 일하다가 이곳에 온 사람이라고 여겨졌어요. 물론 룸살롱에서 일했다고 해서 몸에서 푸른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그냥 알 수 있는거예요. 물론 헛소리는 하지 않고 여기 오기 전엔 어디서 일했냐고 물어봤어요. 그러자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어요.


 '저는 모델이고 이런 데서 일한 거 처음이예요. 여기 온지 딱 11일 됐어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말을 하니까 마음에 들었어요. 아 이런 잘못썼네요. 예쁜 사람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말을 하니까 마음에 들었어요.  



 4.휴.



 5.어쨌든 이런저런 것들이 차려졌는데 밥을 먹고 오지 않아서 안주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ss는 술병을 따지 않고 있는 걸 보고 일행분을 기다리는 거냐고 했어요. 내가 혼자 왔다고 말하자 ss의 눈 안에서 번개가 번득이는 걸 봤거나...아니면 본 것 같았어요. ss는 '예? 혼자 오셨다고요?'라고 말했는데 ss의 표정과 말투가 어쩐지 블리치를 연상하게 했어요. '뭐...라고? 혼자...왔다고?'같은 느낌으로요. 


 ss가 고용된 지 11일 됐다고 했으니...실제로 이 일을 한 건 2~3일 정도라는 뜻이죠. 그런데 도저히 이런 곳에서 처음 일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나를 관찰한 지 약 10분만에 다음과 같은 대사를 했거든요.


 '오빠가 까칠한 캐릭터란 거 눈치깠어. 그런데 이제부터는 다른 애들한텐 더 까칠하게 굴어야 돼. 이제부턴 나한테만 잘해주면 되는 거야.'


 흠. 나는 배틀 만화에서 자신의 전투력보다 강한 대사를 하는 캐릭터들을 경멸해요. 잘 모르겠어요. ss의 전투력(외모력)이 약하다는 게 아니라 위와 같은 대사를 만난 지 10분 된 사람에게 하려면 최강급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어쨌든 ss를 내보내야 할 만큼 헛소리를 한 건 아닌 거 같아서...그냥 냅뒀어요.  



 7.이런 대사를 하는 ss를 보며 ss는 이 가게에서 왕따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통찰력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간의 경험상으로요. ss가 술에 취하자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던 '내가 여기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여기애들과 나는 급이 달라.'를 표정이나 눈빛이 아니라 말로 시전하기 시작했거든요. 그곳이 어떤곳이든...어떤곳에서 일한 지 11일 된 사람이 사람이 이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왕따가 되는 거니까요. 


 '여기애들과 나는 급이 달라.'라는 명제가 사실이어도 왕따가 되는 거고 사실이 아니어도 왕따가 되는 건데...일단 ss는 전자이긴 했어요. 어쨌든 확인을 위해 물어봤어요. '너는 여기서 왕따겠지?'라고요. ss는 한숨을 쉬며 


 '응 여기 애들이 나 왕따시키는 중이야. 왕따를 안 당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


 라고 말했어요. 오랜만에 웃겼어요. 이런 곳에 일하러 들어왔는데 인맥이고 뭐고 없는 굴러온 돌이라면? 예쁘지 않아도 문제겠지만 평균보다 예뻐도 문제가 돼요. 왜냐면 인간들은 문제라서 문제삼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들은 문제삼고 싶은 걸 문제삼으니까요. 


 그렇다면 얼굴이 예쁜 만큼 처음에는 납작 엎드려야 하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손님에게보다, 같이 일하게 된 사람들에게 더 납작 엎드려야 하는 거죠. 외모가 떨어져도 문제가 되지만 평균보다 너무 높아도 문제가 되는 것...그게 이 곳의 룰이니까요. ss가 그걸 모를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았어요.


 

 8.도중에 매니저가 와서 미리 계산을 해달라며 계산서를 내밀었어요. 뻔하죠. 카드기 마감 문제나 뭐 그런 거였겠죠. 호통을 쳐주고 싶었지만 일단 호흡을 가다듬고 참았어요. 그리고 정중하게 말해줬어요.


 '이봐. 이런 건 카드따위나 쓰는 사람들에게 내밀라고. 알게 되면 알게 되겠지만 난 언제나 현금이니까.'


 라고요. 매니저는 알았다며 가려다가...다시 돌아와서 역시 장부정리가 편하게 지금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줬죠. ss는 이때쯤 엄청 취해 있었어요. ss가 계산서를 집어들고 봤어요. 그리고 보는 게 아니라 '노려보는' 얼굴이 됐어요. ss가 입을 열었어요.


 '이년들 지금 미친 거 아니야?'



 9.ss가 고용주들을 '이년들'이라고 부른 건...전혀 놀랄 일은 아니었어요. 다만 ss와 한 2번 정도 보면 그렇게 나오지 않을까 하긴 했는데 타이밍이 좀 빨랐을 뿐이죠. ss가 계산서를 집어들고 일어났어요.


 '이년들 이거 안 되겠어. 오빠 여기서 기다려. 내가 깎아 가지고 올께.'


 라고요. 제법 고맙긴 했지만 그건 가오가 떨어지는 일이니 그냥 냅두라고 했어요. ss는 연신 '이년들 미친 거 아니야'를 중얼거리다가...화살을 내 쪽으로 향했어요. '너도 미친 거 아니야?'라고요. ss는 거기서 무슨 말을 하려다가 우물거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말해 줬죠.


 '내가 맞춰 볼께. 지금 '이 돈이면 룸살롱에 가지 왜 이딴 데 왔냐'라고 말하려다 만 거지?'


 ss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ss가 이 말을 꺼내려다 만 건 뻔하죠. 이 말을 해버리면 룸살롱에서 일했다는 걸 들키고 말 테니까요. ss는 내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말했어요. 


 '이년들한텐 이럴 가치 없어. 이런 데 와서 이런 돈 쓰지 마.'


 라고요. 역시 고맙긴 했지만 한가지가 틀렸어요. 정정해 주기 위해 말해 줬죠. 그런데 그건 이 게시판에 쓰기엔 지나친 허세대사라서 쓰지 않기로 해요. 



 10.그리고 또 한번 놀랄 일이 있었어요. 놀랍게도...ss는 금요일날 정도만 나오는데도 조기퇴근이었어요. 이런 배짱근무를 하다니...? 이걸 하는 사람이 대단한 건지 시켜주는 사람이 대단한 건지...라고 중얼거리는데 ss는 당신도 여기선 그만 놀고 나가서 클럽이라도 가자고 말했어요. 사실 난 클럽따위는 가지 않아요. 시끄럽고 재미가 없잖아요. 하지만 ss를 탱커 겸 힐러로 달고 가면 왠지 재밌는 곳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같이 가기로 했어요.


 문제는 ss가 너무 취했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 취기가 그동안-이래봐야 며칠-자신을 왕따시킨 사람들을 들이받을 용기를 준 것 같았어요. ss는 매니저에게 가서 말했어요.


 '나 여기서 그동안 일한 거 돈 줘요.'



 11.매니저라고 해도...매니저 역시 자기 가게를 굴렸던 사람이었어요. 마포구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사람이라고도 들었으니 여기의 일반 직원이라면 어려워해요. ss를 보는 매니저가 얼굴 근육을 통제하려고 애쓰는 게 느껴졌어요. 매니저는 마치 포커 승부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같은 표정으로 말했어요. '오늘은 일단 퇴근해. 술 깨고 다음에 얘기하자.'라고요. 그러자 ss가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어요.


 '나 사장님이랑 얘기할래요. 사장님 불러주세요.'


 나는 재빨리 매니저의 표정을 봤어요. 거기서 알 수 있던 건...내가 저 사람과 포커를 치면 확실하게 질 거라는 거였죠. 아니 그야 나는 포커 룰을 모르니까 지겠지만, 설령 포커를 배운 다음에 치더라도 말이죠. 


 물론 '얼음 같은 표정'에는 표정이 없어요. 하지만 매니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얼음 같은 표정'과 '무표정'이라는 표현이 따로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정말 얼음 같은 표정으로 매니저가 말했어요. 


 '사장님은 손님이랑 계셔. 그리고 니가 여기서 이런다고 해서 오냐오냐 하고 현금 줄 가게는 없어.'


 ss는 들은 척도 안 하고 팔짱을 낀 채로 사장을 계속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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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는 이럴 거예요. '뭐야? 왜 여기서 끝나지?'라고요. 하지만...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쓰는 글은 다 나의 일기예요. 누군가의 일기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일기라는거죠. 누군가는 요즘은 술집 얘기뿐이라고 하겠지만 그건 내가 이제 갈 수 있게 된 곳이 그런 곳 뿐이라 그런 거고요. 중요한 건 어디에 가냐는 게 아니라 인간이 세상에 투사하거나 세상이 인간에게 투사하는 모습을 내가 관찰했다는 거예요. 


 어차피 어디에 가든 인간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사니까 술집에 간 얘기를 쓰든 어딜 간 얘기를 쓰든 인간에 관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책임감이 전혀 없는 인간에 대한 관찰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예요. 우리 인간들은 어디에 소속되든, 그곳에 맞춰지기 위해 이런 저런 색을 자신과 섞은 혼물(混物)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ss에게 관심이 갔어요. 앞으로도 구경하고 싶어요. ss의 모습이 아니라 ss가 자신의 주위를 들이받는 모습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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