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n | Synopsis | Staff | Cast | Gallery | Multimedia | Scripts
Reviews | Articles | FAQ | Trivia | Goofs | Links | Library | Forum

한겨레 21, 00년 4월 20일

그들의 상처는 깊어만 간다

세기말 학교가 보듬지 못하는 불안한 영혼들… 비밀일기장 어딘가에 숨겨진 죽음의 징후

개학을 하루 앞두고 한달치의 밀린 일기를 쓰던 유년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무리 변주를 해도 그때 일기는 '참 즐거운 하루였다'로 끝나게 마련이었다. 눌러쓴 연필자국 아래 교사의 짧은 볼펜 자국이 덧칠되는 이 시절을 마감할 무렵, 일기장은 작고 두꺼워지면서 자물쇠를 달기 시작한다. 매끈하던 소년의 턱이 거뭇거뭇해지고, 밋밋하던 소녀의 가슴이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일기장은 책꽂이에서 서랍 깊숙한 곳으로 주소지 변경을 한다. <참 즐거운 하루>는 대체로 절망적인 하루로 바뀐다. 끝말 잇기처럼 어제의 비밀은 오늘의 비밀로 이어지며 내일의 비밀을 잉태한다. 그러나 끝말 잇기에도 끝은 있는 법. 일기장의 자물쇠가 사라지는 날, 그 속에 담겨 있던 지독한 성장통은 치통보다 쉽게 치유되어 있음을 문득 발견한다. 비밀이란 마음속에 묻어두고 잊혀지는 것이라는 늙은 진실을 깨달은 어른이 돼버린 것이다.

비밀스런 사랑앓이를 할 수밖에 없는 곳

영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세상 어떤 물건보다 한권의 일기장이 소중할 무렵 그 비밀스런 기록, 그 내밀한 비명소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고 2학년의 민아(김민선)는 등교길에 수돗가에서 빨간 표지의 일기장을 줍는다. 그 일기장은 같은 반 친구인 시은(이영진)과 그의 단짝친구인 효신(박예진)의 교환일기다. 신체검사로 어수선한 교실에서 그는 두 소녀의 격정적인 속삭임에 빠져들어가고, 그날 학교에서는 여섯 번째 자살사건이 벌어진다.

"98년 청량리에서 여중생 4명이 동반자살한 것 기억나세요? 그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왜 1년에 180여명의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 걸까. 물론 신문에 보도되는 유서에는 성적비관이나 가정불화 같은 자살동기가 나오지요. 그러나 그런 단순명쾌한 이유만은 아닐 겁니다. 이들의 죽음 곁에 놓였을 바람 한점이나 새소리 같은 걸 찾아보자, 이런 거였지요."

김태용 감독과 공동연출한 민규동 감독이 보는 10대 여고생의 세계는 바람과 먼지와 블랙홀이 뒤엉켜 있는 소우주다. 그 깊은 심연의 움직임이 펼쳐지는 공간은 두 소녀가 주고받는 일기장이다. 점심시간 동안 바짝 붙어서 둘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는 부족해 수업시간에도 몰래 쪽지를 주고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시절, 이들은 교환일기를 통해 둘만의 은밀한 통로를 뚫어놓는다. 색색깔의 사인펜으로 깨알같이 적어나간 이 일기장에는 상대방이 '잠시라도 안 보이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사랑앓이의 흔적이 촘촘히 박혀 있다. 어른들이 조작해 놓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풋사랑'이라고만 기록될 이들의 사랑은 한뼘의 성장을 위해 몸부림치는 고통스러운 싸움이다. 그 싸움은 10대 후반의 불안정한 에너지와의 싸움이기도 하고 견고한 벽으로 차단된 외부세계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절박한 호흡이 가득한 이들의 일기장에는 그래서 색 고운 스티커들의 향연과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섬뜩한 메시지가 공존한다.

일기장이 거침없는 10대 후반의 자의식이 내달리는 공간이라면 학교는 그 자의식과 제복의 현실이 상호 충돌하는 공간이다. 학교가 규율과 복종의 미덕만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곳이라는 진실을 새삼스럽게 반복할 필요는 없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그리는 세기말 학교의 풍경은 입시의 중압감과 폭력교사로 학교와 아이들의 갈등을 정리한 기존의 성장영화들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모습이다. 이 모습은 일자로 뻗어있는 복도에 교실들이 줄서 있는 보통의 학교와 다른 이 학교의 구조에서 이미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하다.

"학생들이 시스템의 억압에 의해 피해자로만 그려지는 성장영화와는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입시의 중압감은 21세기의 아이들에게도 여전하지만 저희는 이런 평면적 진실 곁에 있는 요즘 아이들의 혼란과 성장의 상처를 그리고 싶었어요. 현대적으로 설계된 이 학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아이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딱 들어맞는 장소였습니다."

다층적인 내면세계... 금지된 우정을 위한 공간

학교건물로는 독특하게도 ㅁ자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학교는 연출부에 '뜻밖의 발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편의 '악명'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뒤라 촬영섭외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뜻밖에도 교장선생님이 단번에 허락을 내주시더라고요. 그분은 아쉽게도 한달 만에 전근 발령을 받으셨죠. 아무튼 엄청난 행운이었어요."

ㅁ자 형태로 이어진 층층의 복도와 교실은 출구없이 순환하는 방황과 좌절을 표현한다. 실제로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한 이 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귀신이 들어오면 나가지 못한다'는 으스스한 입소문이 돌기도 했다. "일곱명의 아이가 자살하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영화 속 대사도 이 학교 학생들에게서 취재한 내용이 녹아들어간 것이다.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교실 안에서 뱅뱅 돌며 계속 머리를 부딪치는 붉은 새는 유폐된 공간에서 성장하는 10대의 고통에 대한 은유이다.

미로 같은 복도에 둘러싸여 4층 천장까지 뚫려 있는 중앙홀은 아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제단 구실을 한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효신과 시은은 이 제단에서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박수 속에 만남 1주년을 축복받는 이들의 꿈은 환상에 불과하다. 가방 하나, 머리핀 하나에서도 불안한 존재의 끈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10대들의 연대의식 속에서 이들은 이른바 '이지메'를 피할 길이 없다.

학생에게 금지된 우정을 나누는 이들이 평온하게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은 '학생금지구역'뿐이다. '학생금지구역' 팻말을 거스르며 올라가면 나오는 옥상은 학교 안에서 효신과 시은이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옥상 위에 서 있는 좁다란 뾰족지붕에 올라가 이들은 절정의 행복을 나눈다. '이상한 애'라는 손가락질, '재수없는 애'라는 기분 나쁜 눈길을 피해 이들은 위태로운 지붕 위에서 깔깔거리며 수다를 떠는 천진난만한 소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사랑을 떠받치기에 이들은 아직 덜 여문 소녀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견디지 못한 시은은 효신에게서 등을 돌린다. 일기장이 사라지고 대화가 단절된 지 '31일하고 6시간 만'에 다시 입을 열지만 절실할수록 어긋나는 각도는 가파라지는 게 사랑의 속성.

"너는 나를 보고 고개를 돌렸어. 내가 창피해?"

"넌 하나도 안 특별해. 난 네가 창피해."

"난 죽을 수도 있어."

시은은 교실로 돌아가고 효신은 자신의 우주 속으로 투신한다. 효신의 죽음에 대한 아이들의 죄의식은 효신의 영혼을 불러내고 학교는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여고생의 자살은 [여고괴담]의 전편과 속편을 잇는 모티브다. 그러나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영화다. 폭력교사라는 구체적인 적이 등장하는 전편에서 귀신은 복수를 위해 재림한다. 그러나 죽은 효신의 눈빛은 특정인을 향해 있지 않다. "몸무게 몇킬로, 키 몇센티, 이런 숫자들이 내 성장을 설명해줄 수 있을까?"라고 말하던 이 조숙한 소녀의 영혼은 10대의 자살에 '성적비관', '가정불화'라는 단답식 이유를 다는 사회와 학교를 향해 '메멘토 모리'라는 충고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개봉해 서울관객 20만명을 동원한 이 작품의 흥행성적은 전편(서울관객 68만명)에 많이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괴담'이라는 장르적 재미를 기꺼이 포기하면서 '여고'라는 비밀의 단어를 통찰력 있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는 친구에게서 추락의 아찔함을 느끼게 하는 사춘기의 신열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가라앉는다. 우리의 언어는 치장하는 법을 배우며, 무감함은 미덕이 되어 어른이 된 우리의 문을 두드린다. 어린 시절 거쳐온 통과제의의 비밀은 자물쇠 속에 꼭꼭 숨겨지고 아이들의 언어는 이해할 수 없는 부호가 되어 우리의 귀에 꽂힌다.

학생과 학교는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두 감독은 걸러지지 않은 10대의 언어를 포착하기 위해 400명의 여고생에게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했다. 두 감독은 어느 여학교 연극반에 임시강사로 참가해 아이들의 감수성을 날것 그대로 접해보는 시도도 했다. 이 학교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영화의 교실 첫 장면에 그대로 재현됐다. 감독은 그곳 학생 하나에게 마음대로 찍어보라고 하면서 6mm 디지털 카메라를 쥐어주었다. 카메라를 들고 교실을 돌아다니던 학생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선생님의 수업 광경을 몰래카메라로 찍다가 걸렸다. 영화 속 지원이처럼 말이다. 학교는 뒤집어졌고 문제의 학생은 퇴학 직전까지 갔다. 두 감독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고 연극반 학생들의 캐스팅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학교의 현실은 훨씬 더 답답하더군요."

학교의 현실이 시원하게 뚫리는 순간이 찾아올까? 민 감독의 표현대로 '어른이면서 여전히 애'인 10대 여성과 학교는 어쩌면 서로 등을 맞댄 숙명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폭력교사가 사라지고 입시 중압감이 사라져도 아이들은 여전히 색색깔의 펜으로 비밀일기장에 온갖 색깔과 향기의 옷을 입힐 것이다. 단짝 친구의 외면에 '배신자'라고 외치며 온몸을 떨면서 죽음보다 고통스런 첫사랑의 상처를 맛볼 것이다. 그리고 성장의 미열에서 서서히 벗어날 것이다. 지금 어른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 시절 그랬던 것처럼.

김은형 기자

back to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