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권]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2012.06.29 04:57

being 조회 수:2665



022. 다섯째 아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중편(?) 소설. 대강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시대에 맞지 않게, 큰 집에서 많은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깁니다. 하지만 돈도 없고 체력도 약한 부부인지라 양가 부모에게 심한 민폐(돈과 노동력)를 끼치면서도, 무슨 만용인지 꾸역꾸역 애들을 낳아대다가, 그만 다섯째 아이로 괴물 벤을 낳게 됩니다. 결국 그 아이 덕에 행복하다고 착각하던 가정은 붕괴되고, 헤리엇(엄마)은 고통스러워지는, 그런 내용입니다.


소설은 쭉쭉 잘 읽힙니다. 도리스 레싱의 필력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 하나. 현대인인 제 눈에는 '다섯째 아이'가 기대만큼 괴물스럽지 않았습니다. '오멘'이나 일본 막장만화의 미친 캐릭터를 기대했고,  레싱은 '빙하시대 고대 인종이 격세유전되어 현세에 태어났다' 정도로 컨셉을 잡고 벤을 묘사하지만, 저에게는 그냥 감정(조절)장애가 극심한 지진아나 문제아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새삼, '내가 자극적인 이야기에 너무 익숙해졌구나.'싶었어요. 하여튼 그런 벤이 행복한 듯 보이던 가족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엄마인 헤리엇은 정신적으로 쇠약해져 가고, 그럼에도 모성애를 발휘하지만, 결국 좋게 끝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힘에 부쳤던 거죠.


그런데 문제는, 제가 헤리엇을 좋게 보지 못하겠다는 점이에요. 돈도 없고 미래도 불안해서 결혼도 아이도 포기한 현대 한국 젊은이(?)로서, '8명의 아이가 뛰노는 해피 하우스'를 꿈꾸며 별 준비도 없이 주변의 만류에도 고집스레 애를 낳아대는 이 사람은 너무 나이브해서 화가 나고, 너무 피곤해서인지 성격인지, 되는 대로 사는 것 같아 지켜보기 불편합니다. 피임은 왜 안 하는 거야. 그정도로 고생했으면서 왜 애를 계속 낳는거야. 그래도 벤의 일이 커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능동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게 또 좋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 후는 계속 잠잠한 내리막길. 이 부분은 안타까워요. 그녀는 '엄마'라는 입장에서 늦게나마 최선을 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헤리엇에 대한 제 입장은 안쓰럽긴 하지만, 그래도 좀 화가 난다 정도. 화목한 가정이 환상이 얼마나 허구인지 드러내려고 레싱이 이 소설을 쓴 듯 하고, 화목한 가정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했던 것이 그녀니, 헤리엇에 대한 제 이런 반응은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닐지도요. 그만큼 이 소설이 잘 쓰여졌다는 이야기도 될테고.


그리고 가족 안의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이 소설은 벤을 이해를 초월하는 괴물로 그리지만, 저는 읽으면서 정신병 환자나 알코올, 약물, 도박 중독자들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들을 ,저를, 가족의 일원으로 품고 있는 가족들이 느낄 정신적 물질적 고통에 대해서도. 폭력을 휘둘르는 알코올중독자를 가족이라며 억지로 품고 있다간 다 죽을지도 몰라요. 실제로 그런 가장에가 아내가 살해당하는 일도 많죠. 그런데 그게 자식이라면? 모성애가 걸려 좀 복잡하겠지만, 그래도 환자(?) 상태가 심하면 어쩔 수 없지요. 전 그런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에게 '당신들 가족이니 당신들이 끝까지 같이 살면서 책임지라.'는 말을 못 하겠어요. 가족애나 모성애로 해결되는 것이 있고,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저는 믿어요. 그리고 아마 레싱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아요. 가족애에 환상을 가지지 마라. 모성애가 만능은 아니다. 화목한 가족은 쉽게 부서지고, 모성애에 기적같은 힘은 없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레싱은 소설가의 공헌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다른 사람이 보는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는데,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성공적이에요. 책을 읽고 난 후 이 글을 쓰면서, 저 때문에 고통을 겪었을 가족들을 안쓰러워 하며, 저를 버리지 않은 그들에게 감사하고, 너무 힘든 나머지 가끔 내치려고 했었던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겠어요. 그리고 실제로 안 그랬잖아. 그럼 된 거지. 당시 내가, 아니, 내 안의 병마가 좀 많이 괴물이었지. 고생 많았어요. 그리고 지금 저는 출산을 뜯어 말리던 가족들의 입장, 그리고 약간은 벤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지만, 제가 혹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가족 안의 어머니로서 아주 새롭게 이 책을 읽을 것 같아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뚝 떨어트려서 탈이지. 혹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게 되면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122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025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0549
126747 [KBS1 독립영화관] 나의 피투성이 연인 new underground 2024.07.19 32
126746 프레임드 #861 [1] new Lunagazer 2024.07.19 12
126745 다낭에 다녀왔습니다. [1] new 칼리토 2024.07.19 76
126744 Cheng Pei-pei 1946 - 2024 R.I.P. [3] new 조성용 2024.07.19 87
126743 듀나데뷔30주년기념포럼 [1] 진진 2024.07.19 214
126742 Bob Newhart 1929 - 2024 R.I.P. [1] update 조성용 2024.07.19 72
126741 [영화 후기] <화이트 독> 그리고 <벌집의 정령> [3] update underground 2024.07.19 126
126740 [왓챠바낭] 고어 없는 고어 영화, '불면의 저주' 잡담입니다 [1] 로이배티 2024.07.19 132
126739 전용준 AI 노래 catgotmy 2024.07.18 75
126738 프레임드 #860 [5] update Lunagazer 2024.07.18 41
126737 [디플후기] 많이 차분해진 ‘더 베어 3’ [4] 쏘맥 2024.07.18 169
126736 코파 우승 후 엔조 페르난데스가 인스타 라방에서 부른 노래가 [2] daviddain 2024.07.18 129
126735 피네간의 경야에 대해 [2] catgotmy 2024.07.18 156
126734 [왓챠바낭] '유포리아' 감독의 여성 복수극. '어쌔신 걸스' 잡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4.07.18 211
126733 어벤져스보다 재미있었던 로키 시즌 1(스포있음) 상수 2024.07.18 155
126732 롯데 만루홈런 [6] daviddain 2024.07.17 138
126731 치아 관리 [2] catgotmy 2024.07.17 177
126730 음바페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첫 날 daviddain 2024.07.17 81
126729 컴퓨터로 생쇼를 했습니다 [1] 돌도끼 2024.07.17 177
126728 프레임드 #859 [4] Lunagazer 2024.07.17 4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