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조OO 듀게분께 구입한 영화 두 편을 봤어요. 


Samuel Fuller 감독의 <화이트 독 (White Dog, 1982)>과 Victor Erice 감독의 <벌집의 정령 (The Spirit of the Beehive, 1973)>입니다. 


<화이트 독>은 인간이 동물을 어떤 식으로 길들일 수 있는가, 그렇게 길들여진 동물을 인간이 다시 바꿀 수 있는가에 관한 영화예요.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초반부터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감독의 메시지는 단지 스토리나 대사가 아닌 


강렬한 영상으로 보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 영상의 힘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에 각인되죠. 


그래서 단순한 스토리와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길들여질 수 있는 동시에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에 대한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영화 내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여러 가지 생각에 휩싸이게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만든 영화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또렷하게 보여주는 영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사나 스토리에 기대지 않고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영상의 힘으로 설득해 내는 영화를 좋아해요.  


이 영화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했고 그 메시지를  아주 인상 깊게 기억하도록 만들었지만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게, 이 영화 자체를 원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벌집의 정령>은 감독의 메시지를 몇 줄로 요약하려면 요약할 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 자신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어요. 


아마도 이 영화의 주인공이 어린 소녀이고 이 영화는 오로지 이 소녀를 관찰하고 이 소녀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10살도 되지 않은 듯한 이 소녀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표현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소녀는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영화를 보는 사람도 이 어린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온전히 알 수는 없죠.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상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이 소녀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 이 소녀에 대한 존중과 겸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소녀는 영화 속 인물과 현실에서 마주친 인물을 혼동하고 꿈과 현실이 뒤섞인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죠.  


그 이야기는 낯선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인식도, 주위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도 담고 있지 않아서 아슬아슬 위태롭지만  


그 이야기 속 소녀의 세계는 아름답습니다.  



영상으로 또렷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는 <화이트 독>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시를 읽는 듯한 


<벌집의 정령>을 보면서 저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생각해 봅니다. 


<화이트 독>과 같이 이해가 잘 되고 명확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마 자신이 만들려는 영화에 대해 


감독이 먼저 완벽하게 이해를 한 후 그 이해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일 거예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려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먼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해야 하니까요. 


<벌집의 정령>과 같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되면서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마 


감독 자신이 어떤 인물을 자신의 방식대로 완전히 이해한 후에 그 인물을 펼쳐놓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자신이 만드는 영화를 완전히 장악하고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저는 참 좋아하지만 


저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영화는 제가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음을 느끼게 하는 영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그 자체로 어찌할 수 없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그런 영화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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