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게도 이 글은 인스타그램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_) 계정에 업로드되었는데요. 그곳에서 읽으셔도 돼요. 글이 길어서 총 3부로 올라갔어요. 1부 링크 올려드려요. https://www.instagram.com/p/C_mmrdtvx1H/?igsh=a2dyYm5zaW5yMXYy )

8월 21일에 30여 년 만에 위대한 영상 시인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걸작 <희생>(1986)이 4K 리마스터링본으로 재개봉했고 1만 명 관객을 돌파했다. 나는 감사하게도 <희생> VIP 시사회에 초대받아서 이 영화를 오랜만에 큰 스크린으로 보고 또다시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영화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를 한 명이라도 더 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희생>의 주인공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을 올리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희생>은 나에게도 쉬운 영화가 아니고 진입 장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같아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권유하고 싶을 정도로 애정하는 작품이다. 이미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지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못 본 사람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꼭 좋은 화질로 스크린으로 이 영화를 감상하기를 적극 추천드린다. <희생>에서 가장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을 작은 화면으로 보면서 온전히 경험하기는 역시 어렵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도 <희생>을 강력하게 추천드린다. <희생>은 개인적으로 칼 드레이어의 걸작 <오데트>(1955)와 함께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몇 년 전 새 출발을 선언하면서 올렸던 글에 삽입했던 사진 속에도 <희생> DVD가 있었는데 그 정도로 내 인생에서 이 영화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내가 SNS에서 여러 번 언급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이 글은 그냥 한 감독과 그의 영화에 관한 열렬한 애정 고백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나는 대략 30년 가까이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해왔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에 관해 완성된 글을 쓴 적이 없다. 내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너무 사랑하는 것에 비해 나의 지적 수준이 떨어져서 그의 영화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는 글을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희생>이 재개봉한 마당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내가 가만히 있는다는 걸 스스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부족한 글이라도 써서 <희생>의 흥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따라서 어쩌면 이 글은 내가 타르코프스키에 관해 쓰는 처음이자 마지막 글이 될 수도 있다. 그럼 이제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내가 타르코프스키를 사랑하는 이유

내가 처음 봤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희생>이었는데 불행하게도 나는 이 영화를 개봉 당시 보지 못했다. <희생>을 비디오로 처음 본 건 김명복 교수의 영문과 수업 시간에서였다. 영화의 오프닝만 보고 계속 졸다가 다행스럽게도 알렉산더(얼랜드 요셉슨)가 그의 집을 불태우는 장면에서 깨어났고 그 장면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압권이었다. <희생>을 처음 보고 건진 건 집을 불태우는 강력한 이미지가 전부였지만 그날 이후로 그 이미지는 내 삶의 일부처럼 내 마음 속에서 살아 숨쉬게 되었다. <희생>을 본 무렵에 나는 어떤 계기들로 인해 영화에 미친 듯이 빠져들게 되었는데 이때 <희생>에서의 불의 이미지도 한 몫 했음이 분명하다. 

<희생>을 본 이후 타르코프스키가 쓴 '봉인된 시간('시간의 각인'으로 재출간됨)'도 읽고 다른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찾아보면서 타르코프스키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감독이 되었다. 내가 생각할 때 그는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적) 감독이기 때문이다. 마틴 스콜세지가 한 말이 있다. "My whole life has been movies and religion. That's it. Nothing else." 나는 이 문장을 읽고 깜짝 놀랐다. 당연히 거장의 삶에 비할 바 되지 않는 평범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내 삶이 스콜세지의 저 고백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도 영화와 기독교가 전부이다. 다른 것이 없다. 아마 주변에 나 같은 사람은 드물 거라고 본다. 실제로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영화에 미쳐있는 동시에 기독교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말이다. 신앙적으로 방황을 하면서 영화에만 빠져있으려고 했을 때조차 내 머리 속에서 기독교는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영화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되었고 세계영화사 속에서 신학적이거나 기독교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모든 감독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고민은 계속 되고 있기에 나는 기독교와 관련지을 수 있다고 보는 수많은 감독들의 명단을 작성할 수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존 포드, 알프레드 히치콕, 로베르 브레송, 칼 드레이어, 로베르토 로셀리니, 페데리코 펠리니, 에르마노 올미, 잉마르 베리만,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마틴 스콜세지, 알리체 로르바케르, 에릭 로메르, 배창호... 이러한 감독들 중에 개인적으로 타르코프스키가 영화 속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세계를 구현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물론 그렇다고 그의 영화가 기독교에 완전히 부합한다는 건 아니다. 가장 기독교에 근접해있다는 판단이 섰다는 것이다.) 내 나름으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는 평생 연구를 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나의 열렬한 애정은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과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내가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면 타르코프스키는 나에게 지금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기독교의 관련성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왜 기독교적인 것인가? 솔직히 나의 지적 수준으로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하기는 힘들다. 나는 아직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신학적으로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신앙인으로서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들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감각들과 감정들을 바탕으로 나름 설명해볼 수 있을 뿐이다. <희생> 재개봉 예고편에 나오는 거장들의 말을 빌려보자면 나에게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은 '기적으로서의 영화 체험'(장 뤽 고다르)을 가능케 하며 '영적인 영화들'(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장편 데뷔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1962)부터 유작인 <희생>에 이르기까지 일곱 편의 장편 영화에서 항상 인간의 양심과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타르코프스키의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렀는가와는 별도로 타르코프스키에게는 구원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양심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죄로 인해 죄인의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이 스스로 죄성을 자각하고 하나님에게 자비를 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인간이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양심은 구원을 향한 교두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에 대한 믿음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이때 인간의 선한 양심은 인간을 하나님에게로 이끌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양심이 살아있는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은 늘 열려있다고 볼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영화들에서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양심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들을 늘 다루고 있으며 양심은 인간의 영혼의 문제와 연결되고 절망 속에서도 그들을 용서와 화해, 사랑, 희망, 기적, 구원으로 이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구도자적인 태도로 삶에 대해 고뇌하고 사색한다. 그들은 늘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그에 대한 어떤 응답과도 같이 타르코프스키의 모든 영화의 엔딩에서는 일종의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 도래한다. 예를 들어 <솔라리스>(1972)에서 크리스는 마침내 그의 아버지와 화해한다. <노스탤지아>(1983)에서 이탈리아의 성당과 고르차코프가 살던 러시아의 농가는 한 공간 속에 통합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인간이 현실 너머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영적인 존재임을 일깨우며 타르코프스키는 이러한 초월적인 세계가 엄연히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징표로서 기적을 제시한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보고 늘 감동을 받는 것은 그의 영화가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로마서 5장 20절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떠올리게 된다. 양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인간에게 늘 희망은 있다. 

영상 시인으로서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위대한 영상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의 모든 영화는 영상시라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처음으로 감동받았던 <희생>에서 불타는 알렉산더의 집도 시적인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영화에서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그의 영화 철학과 관련이 있다. 그는 '봉인된 시간'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논리적인 드라마투르기보다 정서적 연결을 통한 시적 감흥을 중시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은 타르코프스키가 제시한 시적인 이미지들을 나름으로 해석하고 영화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칠 때에만 관객은 감독과 거의 동일한 위치에서 영화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르코프스키가 시로서의 영화를 추구하는 것은 관객이 그의 영화를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이끌기 위한 미학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잉마르 베리만은 영화는 꿈이며 그런 측면에서 꿈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한 타르코프스키가 가장 위대한 영화 감독이라고 한 적이 있다.(정확한 말이 기억나지 않는데 대충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실제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꿈과 관련이 깊고 현실과 꿈의 어딘가에 위치해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속에는 분명히 현실인데 자세히 보면 단순히 현실로만은 볼 수 없는 순간들이 많다. 그의 영화가 몽환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시적 논리를 추구한 영화 철학과도 연결시켜볼 수 있다. 꿈이야말로 비논리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은 인간의 무의식이 반영된 세계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꿈은 다양한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꿈을 통해 그들의 과거로 회귀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로 회귀함으로써 꿈은 자연스럽게 기억과 만난다. 요컨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현실은 꿈이자 기억인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러한 놀라운 영화적 세계를 주로 롱테이크로 구현해낸다. 그는 영화 예술의 가능성이 시간에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관객이 그의 영화를 통해 시간을 온전히 체험하게 만드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롱테이크는 영화 세계를 잘 구현하기 위한 표현 방식이 된다. 그가 프레임에 포착된 현실을 가능한한 컷으로 쪼개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과 사물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세계의 복합성을 통합적으로 경험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롱테이크가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아>의 시적 언어

위대한 영상 시인으로서의 타르코프스키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노스탤지아>의 한 장면을 통해 위의 진술에 부합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시적 언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노스탤지아>는 18세기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러시아의 음악가인 소스노프스키의 생애를 연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한 러시아의 시인인 고르차코프가 향수병에 시달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고르차코프가 향수병에 시달리는 것을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통해 보여준다. 예를 들어서 고르차코프가 어떤 장소를 방문하게 되면 그의 의식 세계에 또다른 시공간이 침입하면서 시각화된다. 그래서 이러한 시각적인 기법을 통해 그는 현재 이탈리아에 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형상화된다. 요컨대 <노스탤지아>는 이탈리아에서 향수병에 시달리는 고르차코프의 내면의 여정을 통해 인류의 근원적인 향수와 연결된 구원의 문제에 대해 사색하는 작품이다. 

시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타르코프스키 특유의 연출 기법이 탁월하게 사용된 장면이 고르차코프가 묵는 호텔 시퀀스에서 나온다. 이 시퀀스는 롱 쇼트로 시작한다. 고르차코프의 호텔 방에는 화면의 중앙에 침대가 있고 침대를 중심으로 대칭 구도로 되어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창문이 있는데 창 밖으로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화면의 우측에는 화장실이 있다. 고르차코프는 방에 들어와서 화장실과 작은 테이블에 있는 램프의 불을 끈다. 그리고 우측 창문을 연다. 그리고 그는 침대에 앉는다. 실내는 어둡지만 창쪽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고르차코프의 윤곽은 정확하게 보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고르차코프는 그의 형상을 잘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어둠 속에 잠긴다. 화면상으로 볼 때 이것은 초현실적인 상황으로 보인다. 갑자기 고르차코프에게 비치던 빛이 사라질 근거를 화면 속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르차코프가 어둠 속에 잠기자 그는 졸린 듯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서 눕는다. 이때부터 카메라는 점점 침대쪽으로 가까이 이동하고 이전 장면에서 고르차코프의 환상으로 러시아 농가가 보일 때 들렸던 사운드가 갑자기 들리기 시작한다. 그 사운드가 들리는 가운데 갑자기 러시아 농가에서 보였던 개가 화장실에서 나타난다. 그 개는 고르차코프의 옆에 눕고 그는 그 개를 쓰다듬는다. 카메라가 더욱 더 고르차코프쪽으로 가까이 이동하는 가운데 카메라의 정면으로 보이는 벽이 갑자기 밝아진다. 그리고 잠시 뒤 빗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동시에 고르차코프의 얼굴로 빛이 점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가 그친 듯 빗방울만 드문 드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화면이 컷되면 세피아 톤의 화면에서 고르차코프의 아내의 옆 얼굴이 보이고 그녀를 따라 카메라가 우측으로 슬로우 모션으로 이동하면 이태리어 통역사인 유제니아의 얼굴이 나타난다. 두 여성은 서로 포옹한다. 이러한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유제니아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고르차코프가 깨어날 때까지 이어진다. 분명히 화면이 편집되지 않은 채 카메라가 이탈리아의 호텔 방을 정면으로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화장실에서 개가 등장하는 것을 통해 관객은 현실의 이미지로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더 이상 현실이 아니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 이미지로 변화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가 어느 순간 마법 같이 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시적인 이미지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전체 필모에서 수도 없이 등장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속 시적인 이미지는 현실 세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갑자기 그 세계를 침범하는 식으로 형상화될 때가 많다. 편집상으로 볼 때 현실의 이미지에 이어서 꿈이나 환상의 이미지가 갑자기 끼여드는 것이다. 이러한 침입으로 인한 이미지의 충돌은 관객의 의식에 충격을 가하고 의식을 각성시키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갑자기 관객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선형적인 시간을 거스르는 비선형적인 시간의 강력한 힘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힘을 통해 관객은 타르코프스키가 강조한 시적 감흥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

내가 <희생>을 사랑하는 이유

이제 <희생>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일곱 편의 장편 영화는 모두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도 <희생>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 역대 최고의 영화 10편에도 뽑는다. 큰 감동을 받았기에 이 영화를 5번 이상 보기도 했고 앞으로도 거듭 볼 생각이다. 나는 도대체 왜 <희생>에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논리적 인과성에 기반하여 답을 하기는 힘들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매혹되어버리는 영화들이 있을 텐데, 일단 <희생>은 나에게 그런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내가 <희생>을 사랑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관객들이나 평자들에게 다른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에 비해 <희생>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 역대 최고의 영화 설문 조사에서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 중 <희생>은 저조한 투표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희생>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희생>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납득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바로 남들이 저평가하는 그 이유 때문에 이 영화를 더 높게 평가한다. <희생>이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지만, 여타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자면 타르코프스키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세련됐고 예술적으로 뛰어나다. 그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두면서 지극히 예술적인 방식으로 영화 속에 기독교의 진리를 담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그의 영화들이 다소 이미지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고 <희생>도 그런 경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타르코프스키가 <희생>에 이르러 단순화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단순화된 이미지들은 나무와 불로 압축될 것이다. 장편 데뷔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는 이반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영화가 시작되고 유작인 <희생>에서는 고센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세계는 완벽한 수미상관의 형식으로 열리고 닫히면서 완성되는데, 그가 의도치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희생>이 결국 유작이 되었다는 맥락에서 본다면 이 영화의 엔딩을 통해 그의 예술이 완성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그저 경이롭고 감격적이다.(흥미롭게도 유작인 <희생>도 카메라가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시작하고 카메라가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끝나는 수미상관의 구조로 되어있다.) 이 영화가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이기 때문에 관객에게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희생> 전체가 인류를 위한 하나의 간절한 기도로 느껴지는데 이 영화가 유작이라는 사실로 인해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면은 있다고 본다. 그동안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다른 영화들을 포함해서 수천편의 영화를 봤는데, 그 중에서 감독의 절절한 마음을 가장 많이 느꼈던 작품이 <희생>이다. 

스벤 닉비스트와 '마태 수난곡'

<희생>을 얘기할 때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촬영감독 중의 한 명인 스벤 닉비스트의 뛰어난 영상미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중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도 빼놓을 수 없다. <외침과 속삭임>(1972), <화니와 알렉산더>(1982) 등 잉마르 베리만의 걸작들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닉비스트는 <희생>에서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카메라로 잘 포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혼의 떨림마저 잡아내는 데 성공한다. 시종일관 회화를 방불케하는 화면 구도와 빛과 색채의 사용도 탁월하다. 

'마태 수난곡'은 내 영혼의 심연을 건드렸다. 클래식 음악 중에 루키노 비스콘티의 걸작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서의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제외하고 <희생>에서의 '마태 수난곡'만큼 들을 때마다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버리는 곡은 없다. 나는 <희생>을 볼 때 '마태 수난곡'을 처음 들었는데, 그 이후로 이 곡을 들을 때마다 <희생>의 이미지들이 오버랩되면서 울컥하는 심정이 되며 그 순간 내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숭고미의 절정을 경험하게 된다.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영화들에서 바흐의 음악들을 많이 사용해왔고 그 음악들의 사용은 늘 훌륭했지만 특히 <희생>의 경우 '마태 수난곡'이 없었다면 과연 <희생>이 지금과 같은 감동을 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탁월한 선곡이었다고 생각한다. <희생>은 '마태 수난곡'의 선율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염원으로 가득 찬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태 수난곡’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마태복음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종교 음악이라는 점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희생>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희생>의 오프닝 크레딧

<희생>은 ‘마태 수난곡’이 흐르는 가운데 카메라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의 일부분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오프닝 크레딧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된다. 그림 속에서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몰약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동방박사가 예수를 찾아온 것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왔음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구원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성취되는데 이것은 알렉산더가 그의 집을 불태우는 희생과 관련된다. 3차 대전이 발발한 후 절망감에 사로잡힌 알렉산더는 하나님에게 3차 대전 이전 상황으로 돌려준다면 가족과 집을 모두 버리고 침묵하겠다는 서원기도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알렉산더의 기도에 응답해서 세상은 3차 대전 이전의 평온한 상황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되자 알렉산더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그의 집을 불태우는 희생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알렉산더의 행위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적 실천에 해당한다. 따라서 타르코프스키는 이미 영화의 오프닝에서 ‘동방박사의 경배’를 통해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프닝 크레딧의 막바지에 이르면 '마태 수난곡'의 사운드가 점점 사라지는 가운데 갑자기 갈매기와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카메라는 천천히 수직으로 상승하며 잎이 무성한 나무가 보일 때까지 움직인다. '동방박사의 경배'가 예수의 희생을 통해 인류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맥락에서 볼 때, 이 생명력이 넘치는 나무는 인류가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보여주던 화면이 컷되면 비로소 알렉산더가 바닷가에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있는 모습이 나오고, 그제서야 관객은 파도 소리가 알렉산더가 서 있는 곳 부근에서 들려온 사운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알렉산더는 나무를 심으며 그의 아들인 고센에게 한 수도승이 죽은 나무에 3년 동안 물을 줬더니 그 나무에 꽃이 만발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게 '동방박사의 경배'의 그림 속 나무와 현실에서의 죽은 나무를 병치시키는 방식은 이미 이 영화의 후반부의 기적을 예고한다. 그 기적에 대한 복선으로 타르코프스키는 사운드를 이용하고 있다. 그림에 실제 소리가 입혀지면서 마치 그림이 살아난 것 같은 효과를 통해 일종의 기적 같은 순간이 도래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영화 속에서 죽은 나무가 그림 속 잎이 무성한 나무로 변화될 것이라는 미래를 예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타르코프스키가 <희생>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인데, 영화의 오프닝에서 그는 이미 사운드와 이미지의 정교한 배치를 통해 관객이 그런 순간을 마주하도록 이끈다. 

나도 첫 관람때 <희생>을 보면서 졸았고 철학적 대사가 난무하며 느린 전개로 일관하는 이 영화를 온전하게 관람하는 게 쉽지 않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난해하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타르코프스키가 생각만큼 난해하지 않고 충분히 접근이 가능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도 꼭 하고 싶다. 실제로 타르코프스키는 한 여성 관객이 그의 영화 중 가장 난해하기로 소문난 <거울>(1975)을 본 이후의 감동을 적어 그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스스로 그의 영화를 변호한 적도 있는데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쪽이다. 상대적으로 타르코프스키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서 단순하고 명료한 이미지들이 많은 <희생>이 대중 친화도가 높아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볼 관객이 딱 세 개의 장면만 제대로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장면들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이 장면들만 제대로 봐도 이 영화를 본 것에 대해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첫번째 장면, 오프닝

첫번째 장면은 알렉산더와 고센이 함께 죽은 나무를 심는 롱테이크 시퀀스다.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일곱 편의 영화 중에서 <희생>만큼 관객이 등장인물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차분하게 화면을 따라갈 수 있도록 설계한 오프닝을 보여준 적은 없다. 다른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의 오프닝은 지속 시간이 긴 쇼트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도 <희생>의 오프닝보다 더 많은 쇼트로 구성되어 있고 복잡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타르코프스키가 이 영화에서 그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관객을 좀 더 배려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익스트림 롱 쇼트로 화면의 후경에 있는 알렉산더가 죽은 나무를 심는 모습에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나무 심기를 마치자 자전거를 탄 우체부인 오토가 등장하고 알렉산더와 고센이 함께 화면의 좌측 방향으로 걸어간다. 오토가 그들을 따라오면서 알렉산더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세 인물들은 점점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화면은 롱 쇼트로 변화된다. 이런 과정에서 관객은 일상생활에서 멀리에서 보던 사람을 점차로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점점 더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고틀란드 섬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더불어 점점 세 인물들에게 빠져들게 되고 극에 몰입하게 된다. 단순하지만 강력하고 아름다운 힘을 지닌 롱테이크가 아닐 수 없다. 

이 장면에서 알렉산더와 고센은 계속 직선으로 이동하고 오토는 자전거를 타고 그들 주변을 맴돌며 계속 곡선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직선과 곡선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교차도 주목할 만한데, 이러한 운동성은 은근한 방식으로 화면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으며 이 장면을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서 추상적인 수준으로까지 격상시키기 때문이다. 이 장면의 추상성은 이 영화가 알렉산더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선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으며 이것은 서사적 맥락과도 연결된다. 이 영화에서 오토는 알렉산더가 인류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인데 오토와 알렉산더의 관계가 직선과 곡선의 교차라는 시각적인 운동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토는 알렉산더의 삶에 신비로운 방식으로 간섭하는 인물인 것이다. 고센이 오토의 자전거에 줄을 매달아 장난을 치는 모습을 통해 고센의 천진난만함이 잘 표현되고 있는데 이러한 성격화도 시각적인 유머를 통해 전달된다. 이 장면에서 알렉산더가 고센에게 들려주는 수도승에 관한 이야기와 알렉산더가 오토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타르코프스키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복선도 잘 배치해둔다. 이렇게 타르코프스키는 이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세 인물을 관객에게 차분하고 편안한 방식으로 잘 소개하고 있으며 과시적이지 않지만 시각적인 쾌감을 안겨주는 운동성을 동반하는 지극히 영화적인 화법을 통해 탁월하게 도입부를 완성시킨다. 

두번째 장면, 불타는 집

두번째 장면은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이라고 생각하는 알렉산더의 집이 불타는 롱테이크 시퀀스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희생>을 처음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바로 이 시퀀스였고 이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늘 깊은 감동을 받는데, 현실에서 스스로도 이런 행동을 하기는 힘들고 세계영화사에서 이런 이미지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소유물을 포기하고 모든 인간적인 관계도 끊는 행위로써 본인에게 소중한 집을 불태우고 침묵한 채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가는 알렉산더의 숭고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묵직한 울림이 있다. 관객은 롱테이크를 통해 알렉산더의 집이 불타서 결국 무너져내리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된다. 그런데 희생의 실천으로써 본인의 집을 불태워버리는 것은 영화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보기 힘들다. 아직까지 나는 현실에서 그런 희생의 광경을 본 적이 없다. 

타르코프스키는 알렉산더의 집이 불타는 장면을 반드시 롱테이크로 찍는 것을 고집했다. 그래서 그는 이 장면이 촬영상의 실수로 인해 재촬영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있을 때에도, 편집을 통해 장면을 구성해보자는 제작자의 말도 무시하고 결국 똑같은 집을 다시 짓고 재촬영을 통해 이 장면을 완성했다. 그 정도로 타르코프스키에게 이 장면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은 이유에 대해 관객으로 하여금 알렉산더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영화 속 상황을 고려해볼 때, 이 장면은 영화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장면은 단순히 알렉산더의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를 통해 염원을 담아 희생을 실천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희생을 실천하고자 하는 타르코프스키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차라리 또 다른 현실이라고까지 칭하고 싶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희생>이 상영된다면 우리는 현실에서도 보기 힘든 희생의 순간과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의 실천으로써 집이 불타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필름에 기록했고 그럼으로써 이 장면은 영원히 이 세계에 남았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희생의 의미를 깨닫고 이 영화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실에서 실제로 희생을 실천할지도 모를 일이다. 타르코프스키는 현실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숭고한 이미지를 남긴 것이다. 

알렉산더의 집이 불타는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알렉산더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의 복잡한 동선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집이 불타는 가운데 단 한번의 기회로 배우들이 서로 합을 맞춰야 하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아무리 리허설을 많이 하고 찍은 장면이라고 할지라도 지금과 같이 완벽하게 장면이 연출됐다는 건 믿기 힘들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타르코프스키에게 직접 묻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다. 이 장면에서 무엇보다도 알렉산더의 움직임이 압권이다. 이전 장면들에 비하면 알렉산더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보이면서 불타고 있는 그의 집쪽으로 한쪽 다리를 절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이러한 연출 방식은 탁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산더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통해 이 장면이 오히려 숭고해지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가 숭고한 순간을 알렉산더의 점잖고 진지한 모습을 통해 보여줬다면 관객은 지금과 같은 숭고한 체험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성스러운 바보를 연상시키는 알렉산더의 모습은 일정 부분 거리 두기의 효과를 발생시키며 이 장면을 볼 때 관객이 온전히 집이 불타고 있는 현상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데, 이 현상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이 관객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전화벨 소리와 차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나는 폭발음에 반응하거나 그들을 쫓아오는 가족들이나 구급차 요원들을 피하면서 뛰어다니며 복잡한 동선을 만든다. 이 영화의 오프닝에서 알렉산더, 고센, 오토가 만들어내는 동선들과 어느 정도 대구를 이루듯이 하나의 소동극이 펼쳐지면서 알렉산더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동선들은 강렬한 불의 이미지와 함께 인물들의 관계와 상징과 은유 등 함축적으로 많은 것을 전달한다. 그야말로 타르코프스키가 압도적으로 시네마를 구현해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장면을 보면서 관객은 각자가 나름의 해석을 하는 것이 가능한데 이것은 그가 지향하는 시적인 연출 방식 때문이다.

세번째 장면, 엔딩

세번째 장면은 알렉산더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인 마리아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고센을 바라보고, 고센이 그 나무 밑에 누워서 나무의 위쪽을 바라보는 장면인데 이 영화의 엔딩에 해당한다. 이 장면에서는 단순하고 명징하고 시적인 이미지가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3차 대전이 언제 일어났었냐는 듯 너무나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타르코프스키는 3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 화면이 어두워지고 혼란 속에 빠져있는 인물들을 보여주다가 다시 3차 대전 이전 상황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어떤 요란한 특수 효과도 없이 햇빛이 가득하고 평온한 대지의 풍경과 함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보여준다. 이러한 단순한 방식의 시각화는 관객에게 거창하게 상황을 묘사하는 것보다 오히려 마치 영화가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마법을 선사하며 일상의 이미지들을 심오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죽은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힘겹게 물이 든 양동이를 천천히 옮기는 고센의 발걸음과 함께 엔딩 시퀀스가 시작된다. 곧 이어 알렉산더가 심은 죽은 나무가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화면의 우측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는 마리아가 보이는데 자전거의 경쾌한 운동은 화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마리아의 후경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방목하는 소들의 무리가 보이고 알렉산더를 태운 구급차가 등장해서 고센이 서 있는 죽은 나무가 있는 쪽으로 움직인다. 타르코프스키가 마리아가 탄 자전거의 움직임을 통해 장면을 매개하는 방식은 탁월하다. 알렉산더의 집이 불타는 현장에 있던 마리아가 자전거를 통해 고센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온 것인데, 그렇게 됨으로써 알렉산더가 하는 행위 - 불의 이미지와 고센이 하는 행위 - 물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통합적으로 두 장면 간의 관계를 사유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사적인 맥락에서도 마리아가 알렉산더와 고센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마리아의 이동을 통해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한 순간 마리아와 구급차와 고센은 거의 교차되듯이 작은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때 자전거와 구급차가 만들어내는 선들의 움직임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관객은 이 모습을 통해 아들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 알렉산더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고센 그리고 3차 대전 이전 상황으로 세상을 되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부자 지간의 애틋한 관계를 말없이 바라보는 마리아까지 이 세 인물들 간의 감정들에 서서히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구급차를 바라보고 서 있던 고센은 구급차가 사라지자 죽은 나무에 양동이에 든 물을 천천히 붓는데 이때부터 '마태 수난곡'이 들리기 시작한다. 고센이 나무에 물을 주는 쇼트는 부감으로 찍혀있는데 나무 뒤로 바다가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윤슬이 보인다. 이 윤슬은 이 영화의 마지막 쇼트와 연결되는 이미지로 기적의 순간을 예고한다. 마리아는 고센에게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나간다. 이 관조적인 쇼트가 없이 고센을 가깝게 보여주는 쇼트가 바로 나왔다면 지금과 같은 감동은 덜했을 것이다. 마리아가 고센을 바라보는 쇼트는 존 포드 영화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시선 쇼트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이 시선 쇼트는 즉각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에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대상을 관찰하게 만드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이 카메라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시적인 여백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희생>에서의 이 쇼트를 통해 마리아의 시선을 경유해 관객은 고센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센이 죽은 나무 밑에 평온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근거리에서 보여주는 쇼트가 이 영화의 엔딩을 장식한다. 죽은 나무 한 그루와 소년이라는 심플한 이미지이고 이것은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데뷔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의 오프닝에 등장했던 나무 한 그루와 소년의 이미지와 대구를 이룬다. 실어증을 앓고 있는 고센은 하늘을 바라보며 갑자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아빠?"라면서 말을 한다. 이 영화에서 고센이 최초로 말을 하는 순간인데 이것은 기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고센의 수술을 담당했던 빅터가 고센이 곧 말을 하게 될 거라곤 했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고센이 말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처음 하는 말에 요한복음 1장 1절에 해당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으로 볼 때, 타르코프스키는 명백히 이 장면에서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 집을 불태우는 알렉산더의 희생과 침묵은 이러한 기적을 가능케했다. 알렉산더가 침묵하는 대신에 고센은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전체 내용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인데 이 구절에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따라서 고센이 요한복음 1장 1절을 인용하면서 말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고센이 알렉산더에게 한 질문에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이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카메라가 나무줄기를 따라 수직으로 상승하는 움직임을 통해 이러한 사실은 더 명확해진다. 

카메라가 점점 상승함에 따라 죽은 나무 뒤로 나타난 윤슬이 나뭇가지들과 겹쳐져 보이기 시작하는데 나뭇가지들을 반짝 반짝 빛나게 만드는 수많은 윤슬들로 인해 관객은 죽은 나무가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다는 기적과 마주하게 된다. 엄연히 따지면 착시 현상에 의해 윤슬로 인해 죽은 나무가 살아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맞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의 오프닝에서 나온 수도승의 이야기에서처럼 이 순간 죽은 나무에 꽃이 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이런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의 믿음과 확신을 바탕으로 현재에 당도한 미래의 이미지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이 타르코프스키와 같이 이 이미지를 믿는 순간 이것은 더 이상 착시 현상이 아니다. 믿음에 의해 죽은 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사실이 되고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마지막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시험대에 올린다.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믿음을 받아들였고 그럼으로써 마지막 이미지를 보면서 영혼이 흔들리는 감동을 받았다. 그렇다. 알렉산더의 희생을 통해 죽은 나무에 꽃이 피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마지막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이 사실을 믿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막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빛을 머금은 듯 점차로 밝아진 화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다. '나의 아들 앤드류사를 위해 희망과 확신을 갖고 이 영화를 만듭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이 자막은 단순히 자막이 아니라 마지막 이미지의 일부와도 같다. 이 자막이 없었다면 마지막 이미지에 대한 확신이 지금보다 덜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태 수난곡'을 배경으로 관객이 화면을 보며 죽은 나무에 꽃이 핀 것 같다는 감동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이 자막이 등장하는 순간 가능성과 추측은 확신으로 굳어지는데 나는 <희생>만큼 이렇게 감동을 주는 자막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자막을 통해 우리는 <희생>에서의 알렉산더와 고센과의 관계가 현실에서의 타르코프스키와 그의 아들인 앤드류사와의 관계와 닮아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게 된다. 타르코프스키는 앤드류사의 미래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 속에 등장하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에 썼던 가시 면류관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엔딩에 대한 감동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가시 면류관 또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희생>과 충분히 결부시킬 수 있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희생>의 마지막 이미지는 정말 맑고 소박하다. 연약하고 애처로워 보일 정도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의 믿음과 확신에 의해 이 이미지는 그 어떤 이미지보다 숭고하고 거대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영혼의 순례 여정에 아름답고 고귀한 마침표를 찍는다. 

<희생>에는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의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많이 참여했고 이와 관련하여 <희생>과 잉마르 베리만의 실내극과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해볼 수 있고 그밖에 <희생>과 관련해서 더 많은 내용을 적고 싶지만 이미 생각보다 글이 많이 길어졌기 때문에 이쯤에서 글을 마쳐야할 것 같다. 글이 너무 길어졌고 이 글을 끝까지 읽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애초에 <희생>의 흥행에 도움을 주고자 쓰기로 했던 글의 취지에는 어긋나는 결과가 된 것 같다. 이 글의 첫 문단만 읽고도 마음이 동해서 이 영화를 보러 갈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볼 뿐이다. 이 글을 통해 부족하지만 가능한한 내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보고 느꼈던 감동을 상세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결국 속이 탈까지 난 것을 보니 적어도 내 진심이 담긴 글은 맞는 것 같다.) 

끝으로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현재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지지만 나는 죽기 전에 기독교적인 내용을 담은 독립 장편이라도 한 편 만들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는데 당연히 <희생>의 발 끝에도 못 미치겠지만 <희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많은 기독교 영화들이 선전 영화 수준에 그치는 것을 보며 많은 안타까움을 느꼈고 나는 절대로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부디 내가 <희생>을 본받아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기독교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희생>을 재개봉해준 엣나인필름 관계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희생>을 원 없이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현재가 정말 행복하다. 긴 글을 게재해준 시네마토그래프의 운영자인 이윤영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부디 이 글을 읽고 단 한 명이라도 극장에서 큰 스크린을 통해 인류를 위한 타르코프스키의 간절한 기도를 체험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희생>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갖고 이 글을 마친다.      

P.S: 국내에 출간된 타르코프스키와 관련된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시간의 각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http://aladin.kr/p/XP4NV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나리만 스카코브)
http://aladin.kr/p/Go92

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http://aladin.kr/p/LQ97T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http://aladin.kr/p/hFT47

파수꾼 타르콥스키, 구원을 말하다 (김용규)
http://aladin.kr/p/gQzpm

그리고 현재 왓챠에서 <이반의 어린 시절>, <솔라리스>, <거울>, <노스탤지아>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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