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The Robe (1953)

2024.09.07 00:11

DJUNA 조회 수:563


헨리 코스터의 [성의]를 보았습니다. 제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영화는 아닌데, 이번에 영상자료원에서 '와이더 시네마' 섹션의 일부로 틀어주더라고요. 그래서 봤습니다.

이와 관련된 정보를 읊어보자면 [성의]는 1953년에 나온 2.55:1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와이드스크린 영화의 전성기를 연 작품입니다. 단지 이 영화에는 두 버전이 있어요. 하나는 제가 이번에 본 시네마스코프 버전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상영할 조건이 못 되었던 영화관을 위해 만든 '플랫' 버전으로, 이 영화의 화면비는 1.37:이죠. 이 버전은 시네마스코프를 팬앤스캔해서 잘라낸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은 세트에서 따로 찍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부분이 달라요. 연기면에서는 플랫 버전이 낫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하여간 제가 옛날에 텔레비전으로 본 건 플랫 버전이었고 시네마스코프 버전으로 이 영화를 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기독교 영화입니다. 로이드 C. 더글러스라는 은퇴한 목사가 쓴 동명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에요. 더글러스의 책은 꽤 자주 영화로 옮겨졌는데, 첫 소설인 [위대한 강박관념]은 두 번 영화화되었고 둘 다 팬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가 요새는 더 인기가 있을 거 같긴 한데. 당연하지만 이 사람의 소설은 모두 기독교 사상이 반영되어 있는데, 모든 책이 [성의]처럼 대놓고 기독교 책은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본 각색물에 따르면요. 소설은 읽은 적 없습니다.

[성의]는 기독교 문화권 작가들이 자주 하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특히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사소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거죠. 전 이 수난 장면에 나오는 모든 자잘한 사람들이 자기가 주인공인 소설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죠.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속옷을 제비를 뽑아 가진 로마군입니다. 영화에서는 제법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나와요. 마르셀루스 갈리오라는 호민관요. 어쩌다 로마의 정치 게임에 말려들어 잠시 팔레스타인에 왔다가 예수의 처형에 개입된 것입니다.

영화는 팔레스타인에 온 뒤로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소설 주인공 관점에서 재구성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 역할을 하는 건 마르셀루스 갈리오와 이 사람이 얼마 전에 산 그리스인 노예 데메트리우스입니다. 마르셀루스는 처형에 직접 관여하고, 말 그대로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예수를 보자마자 비이성적인 강렬한 감정을 느낀 데메트리우스는 예수를 살리려고 뛰어다닙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팔고 죄책감으로 자살하려는 유다를 만나기도 하죠.

여기서 '성의'는 맥거핀입니다. 마르셀루스는 예수의 옷을 만진 순간 정신이 나갑니다. 데메트리우스는 그 옷을 빼앗아 달아나고요. 로마에 돌아온 마르셀루스는 자신의 광기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옷을 되찾아 불태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옷의 신성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마르셀루스가 그런 증상을 보인 게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이 영화에서 진짜로 중요한 건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이 남자가 초기 기독교인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기독교인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영화는 그렇게까지 대놓고 초자연현상을 쓰지는 않아요.

문제가 있다면 이게 좀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누가 봐도 기독교 믿음의 공유하는 집단을 위한 책이에요. 이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집단 밖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 이 영화의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지나치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칼리굴라 시절 기독교인들은 분명 탄압을 받았겠지만 (왜 안 그러겠어요. 국가 시스템에 위험이 되는 수많은 광신도 무리 중 하나였을 테니) 황제가 직접 나와 개입할 정도로 눈에 뜨이는 부류는 아니겠지요. 마르셀루스를 감화시키는 에피소드 상당수도 그냥 인위적입니다. 이 모든 것은 관객들이 기독교야 말로 유일한 진리를 품은 진짜 종교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먹힐 수 있을 텐데,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죠. 무엇보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마르셀루스가 본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걸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걸요. 이 영화는 마르셀루스의 여자친구인 디아나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정의와 자선. 인간은 절대로 그런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세상은 그렇지 않아. 그런 적도 없었고 그럴 일도 없을 거야." 이건 좀 기독교 문화권에 대한 예언처럼 들리지 않나요.

아주 노골적인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도 소설이나 영화로서 재미가 풍부하다면 관객들은 여전히 그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벤 허]는 비기독교인이 봐도 재미있는 영화지요. 뜬금없이 예수 탄생으로 시작하는 도입부 같은 건 어처구니 없고 결말도 마찬가지로 뜬금없지만, 그래도 강렬한 드라마, 화려한 스펙터클, 인상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의]는 여러 면에서 그냥 밍밍해요. 냉소적인 현실주의자인 로마인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변화과정은 흥미로울 수 있고 원작에서는 나았을 수도 있는데, 영화에서는 대충 수긍할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들을 대충 속여 넘어가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고 영화의 액션이나 로맨스가 특별히 재미가 있느냐 그것도 아니고. 이 영화에서 가장 집중하고 있는 액션장면은 납치된 데메트리우스를 구출하는 에피소드인데 스케일도 작은 데다가 역시 대충 넘긴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여기서 영화가 어떤 감흥을 준다면 그 대부분은 기본기를 하는 배우들에게서 나오는 것이겠죠.

여전히 보기 좋은 영화이긴 합니다. 일급 스타, 화려한 세트와 의상 기타등등. 당시 할리우드 사람들이 비교적 빨리 와이드스크린 화면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아나몰픽 렌즈를 이용해 찍은 이 영화의 화질이 당시 관객들에게도 만족스러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4/09/07)

★★☆

기타등등
1. [데메트리우스와 검투사들]이라는 속편이 있습니다. 원작자 더글러스는 영화 제작 전에 죽었으니 소설과 별 관계가 없죠. 하지만 [성의]가 만들어지기 전에 계획되었고 [성의] 개봉 무렵엔 촬영이 다 끝난 뒤였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성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단 액션 같은 게 더 재미있고 설교가 덜하거든요.

2. 리처드 버튼은 이 영화에 출연하는 걸 진짜로 싫어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용에 설득되지 않았겠지요.

3. 각색자 중 앨버트 말츠의 이름은 1996년까지 크레딧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당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면 그렇게 돼요.


감독: Henry Koster, 출연: Richard Burton, Jean Simmons, Victor Mature and Michael Rennie, Jay Robinson, Dean Jagger, Torin Thatcher, Richard Boone, Betta St. John, Jeff Morrow, Ernest Thesiger,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4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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