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24 07:09
한성-인천 시외전화 개설 연도가 궁금해서
검색을 했더니 알 수가 없네요.
전신전화 역사가 백년이 약간 넘은 시대라지만,
정확한 년도를 파악할 수 없어요.
인천시(2004년 발표)...1900년 10월
한국통신 100년사...1902년
백범 김구 자서전 -1896년
체신사학자 진기홍-1898년
서울시...1908년 한성 인천 첫 시외통화
모블로그...1898년 외아문(외교부)과 인천감리가 통화했다는 기록이 서울대 도서관 모책자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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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상씨 블로그-1903년 (참고...목천 상씨 후손 상운이라는 분이 청나라에서 조선에 최초로 전화기를 가져왔다함)
제가 검색한 바는 이렇게 되네요.
어느 기록을 믿어야 될지...
사실...지인이 백범 김구 선생의 사형 소식에 고종이 전화로 사형 집행을 정지했다는
유명한 사실에 의심을 표하더군요.
그래서 충격과 분노의 심정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서전은 사료의 가치가 매우 박하죠.
그것을 염두해 보면
1896년에는 한성-인천간의 시외 전화 개설이 안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1896년 고종과 인천 감리의 통화가 이뤄져 사형집행이 정지 됐다는 사실은
백범일지 외에는 어느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커뮤니티에 짧은 글을 봤는데...중앙일보에 전화가 아니라 전보라고 보도됐다는 글도 보이고....
쇼크.....쇼크....
나의 검색 결과에 지인이 더 한 소리를 하네요.
김구에 대해 더 알아봐...신화가 깨질 것이다.
두렵네요....
그래서 그가 말해준 검색어는 "김구 테러리스트" ㅅㅂ...저 자식이 어느새 뉴라이트가 됐나....
일단 검색해보니....
해방 후에도 '백의사'라는 암살단체를 이끌고 좌파와 그의 정적을 제거했다는 루머,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가 그의 재정담당자였다는 사실....
쇼크에...눈을 감다가 갑자기 떠오른 것
예전에 DJ가
보수 정치인 김구는 더 연구해봐야 한다라는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그땐 그 분의 업적이 덜 발굴 됐나....했는데....그게 그 소리가 아닌 것 같기도....
오늘은 맨붕 상태로 보내야 할 것 같네요.
만해 한용운을 재정지원하기도 했고, 도산 안창호 체포시 사면탄원과 보석을 노력하기도 했었구요.
김구에 대한 생각을 접지 않기위한 인지부조화라 해도 뭐랄수 없지만
방응모는 어느정도 생각은 있었지만 험한 시대에 굴절되었던 사람이라 봐도 될 듯 합니다.
김구는 실제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것이구요. 김대중이 김종필과 힘을 합쳤던것과 비교해도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위 내용은 위키백과를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