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무료하고 자극이 필요해서인지 갑자기 호러가 땡겼습니다. 특히 제가 유년기에 호기심만 가진 채로 결국 보지 못하고 시대의 강물에 떠내려보낸(...) 공포영화들을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집에서 영화를 집중력있게 못본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도 노트북으로 가만히 보질 못합니다. 이미 몸과 정신이 극장에 완벽히 적응해서인지 영화를 보는 곳은 따로 있고 그 외의 공간에서는 영화를 보는 게 이상하다는 규칙이 뇌내에 입력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떡하나요. 매우 반씨네필스러운 짓이지만 전 어차피 씨네필도 아니고, 궁금하긴 하지만 의욕은 없어서 유튜브 요약본을 보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망스럽고 영화를 하이에나처럼 조각조각 뜯어서 조회수팔이를 하는 안티시네마 꾼을 보는 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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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제가 제일 궁금했던 건 클라이브 바커 원작의 <헬레이저>였습니다. 이게 어릴 적의 저에게는 가장 무시무시하고 끔찍해보이는 이미지였습니다. 제 단골 비디오 가게는 매우 작았고 내부단속이 엄하지 않아서 굳이 샌드위치 전법이 아니더라도 18세 이상 비디오를 빌려주곤 했습니다. 그 가게 주인은 제가 비디오를 고르고 있으면 쉴새없이 떠들면서 자기 입으로 자기가 이쁘진 않지만 르네 젤 위거를 닮았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20대 후반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분이셨는데... 잠시 이야기가 샜네요. 당연히 18금 코너가 있었고 저는 그 코너에서 <헬레이저>를 몇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그런데 차마 보지는 못했습니다. 비디오 표지가 너무 압도적이었거든요. 얼굴에 핀을 덕지덕지 꽂은 그 모습은 다른 슬래셔 영화들의 살인마들이나 좀비나 귀신들을 모두 압도했습니다. 도대체 이세상 모습같지 않은 그 비쥬얼이 저에게 해소되지 않은 두려움으로 남아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마지막 남은 예의의 한 조각을 베풀어 1편과 2편에 대한 리뷰 영상은 뛰어넘고 3편부터 리뷰영상을 봤습니다. 유튜브 영상을 해설을 들으면서 보니까 그랬을 수도 있는데... 너무 안무서운 겁니다? 물론 리뷰어가 계속 헛소리랑 드립을 치는 걸 들으면서 보니 무서울 리가 없죠. 그런데 비쥬얼도 화면으로 막상 보니 특수효과 티가 너무 많이 나고 연기하는 사람도 그냥 보이는 겁니다. 이게 뭐야...ㅠ 걸작까진 아니어도 명작으로 추앙받는 1편과 2편의 명성에 기대어 돈 좀 뽑아보겠다고 만든 후속편이니 더 그랬을 수도 있죠. 그런데 그냥 시각적으로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왜... 왜 이렇게 안무서운 것인가? 아마 제가 다 커버려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죠. 어른의 사정만 더 눈에 들어오는 슬픈 연령대가 되었으니. 거기다가 요새 시국이 이런 초자연적 존재들이 무서울 시국인가요? 전 세계에 역병이 판을 치고 사람들은 미쳐서 멍멍 코인이라는 정체불명의 전자화폐에 돈을 쏟아붓고 강력범죄는 계속 터지고... 그래서 아주 환상적이고 짜릿한 뭔가를 보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깨달았죠. 아, 모든 건 때가 있구나... 내가 그렇게 두려워하면서도 설레어하는 그 때 그 시절 20세기에 이 영화를 봤어야 했는데! 무서울 것 같은 영화를 무섭게 보지 못하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사실 이런 기억은 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영상자료원에서 추억의 옛날 영화라면서 이런 저런 8090 영화들을 틀어주었는데 그 때 웨스 크레이븐의 <나이트메어1>을 틀어줬어요. 이 때는 영자원에서 <E.T.>도 틀어주고 <구니스>도 틀어줬기 때문에 마음만은 8090 만만세 꼬마로 돌아가있었죠. 그런데 <나이트메어1>이 너무 안무서운 겁니다. 그냥... 안무서웠습니다. 연기하는 배우가 고생하겠단 생각부터 먼저 하고... 어린 조니 뎁 얼굴이 들어오고.. 저 당시 젊은이들이 성관계를 더 열심히 맺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뭔가 이입이 안되더라고요. 이미 눈이 21세기의 호화찬란한 cg에 적응해서 그런 것인지. 거기다가 영화를 자꾸 정치적으로 바라보게 되더라구요.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모든 슬래셔 영화가 그렇고 특히나 <나이트메어1>은 살인행위가 강간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력하게 쫓기는 여자를 절대적인 힘을 가진 남자가 쫓아서 희롱한다는 그 권력관계가 영 찜찜하더라구요. 특히나 프레디는 자꾸 잡은 사냥감을 잡았다 놓아줬다 하면서 갖고 놉니다. 그는 마이클 마이어스나 제이슨 부히스처럼 성실하고 신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희롱이라는 면이 더 강하게 들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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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면서도 호기심은 계속 채우고 싶어서 궁금했던 다른 호러영화도 요약본으로 보았습니다. 제가 또 좋아하면서도 무서워한 영화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바탈리온>(Return of the living dead)입니다. 이 영화도 비디오 표지가 너무 저에게 충격적이었던 데다가 "뇌를 먹는" 설정이 끔찍했어요. 그냥 죽는 것도 무서운데 머리를 와그작와그작 씹어서 뇌를 먹는다니? 이걸 유튜브로 보는데 아니... 얼굴에 덕지덕지 분장한 게 너무 티가 나더라구요. 아무리 속아주고 싶어도 이건 그냥 사람 얼굴에 분칠해놓은 것 뿐인데? 거기다 눈알이 튀어나오거나 점막같은 게 들러붙어있는 덩어리들은 얼마나 귀여운지(?) 무서워할 틈이 없이 그냥 낄낄대면서 보게 되더군요. 어렸을 때는 군대의 비밀 드럼통에서 연기가 새어나온다는 그 설정이 군대를 아직 가지 않았던 저에게 언터쳐블한 설정으로 다가왔었는데... 이제 어른이 되니까 그냥 군대욕만 하게 되었습니다. 저렇게 위험한 물질을 저렇게 방만하게 옮기는 게 사람 자식인지!


그 때는 그랬어요. 공포라고 하면 뭔가 살과 뼈와 피가 있고 일단 덩어리들이 눈에 보이게끔 실존해야했죠. 그걸 참 잘 살렷던 게 <더 씽>인 것 같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어느 정도 리얼하고 그 흉물스러움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니까요. 이렇게 주물러놓고 뭉쳐놓으면 진짜 있는 괴물처럼 보일 것이라는 그 로망이 괜히 심금을 울리더라구요. 지금은 얄짤없이 다 씨지로 때려박죠. 꼭 이런 노력이 없어서가 아니라(씨지팀도 당연히 노력하겠죠 ㅋ) 영화는 있는 것을 보여줘야한다는 저만의 아주 보수적이고 꼰대 톰 크루즈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성스레 빚어놓은 크리쳐들을 보면 이상하게 감동하게 되더라구요. 꿈틀꿈틀거리고, 기어다니고, 막 액체를 흘리고... 그래서 요새 영화들을 보면 괜히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 이 놈들아!! 제임스 카메론도 다 쇳덩어리 움직였고 스필버그도 고무고무 공룡옷 입혔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짧은 호흡으로 여러편을 감상할 수는 있는데 좀 피곤해지더군요. <나이트메어>시리즈가 특히 그랬는데, 스토리적으로는 프레디를 완전히 녹여버리고 봉인해버렸단 말입니다. 그런데 자꾸 되살아나요. 이 전에 주인공이 오만고생을 하고 친구들 다 죽어가면서까지 그렇게 뭔갈 했으면 이야기적으로는 좀 완결을 해야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너무 쉽게 되살아나는 느낌이어서 이건 부조리하다는 분노가(?) 치밀어오르더군요. 각설이도 아니고 뭘 그렇게 죽지도 않고 돌아오는지... 이 피로감은 <13일의 금요일> 시리즈를 보면서 극에 달하고 말았습니다. 1편의 살인마는 제이슨이 아니라 제이슨 엄마고, 2편부터 제이슨이 나오고, 3편에서는 제이슨이 하키마스크를 착용합니다. 여기까지는 대충 좋다 이거에요. 그런데 분명히 산 사람을 죽였거든요? 그런데 무덤 파헤치고 나오고 악령으로 나오고 우주선에 가고... 할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힘을 잃고서 <프레디 대 제이슨>을 봤습니다. 둘이 서로의 특성을 이용해서 싸우는 씬에서는 프로레슬링을 보는 듯한 쾌감을!! 프레디는 스피드를 활용해서 칼침을 엄청 많이 놓고요 제이슨은 특유의 맷집과 파워로 몇번이나 찔려도 묵묵하게 카운터를 날립니다. 역시.. 체급은 어찌할 수 없는...


어떤 분과 옛날 공포이야기를 하다가 <매드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소설 작가의 작품을 찾으러 가는데 거기서 자꾸 환상적인 세계로 빠져들면서 주인공이 이도 저도 못하고 결국 운명론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이 영화도 비쥬얼이 꽤나 장난 아닙니다. 아는 공포영화를 하게 되니까 즐겁더라구요. 역시 제 취향은 코스믹 호러가 아닌가... 사실 궁극의 호러는 다 코스믹 호러가 되지 않나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결국 세계에서 고립감을 느끼게 되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죠.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공포영화는 <블레어 위치>입니다. 보면서 처음으로 꺼놨던 불을 켜고 쉬었다가 봤어요. 특히 그 텐트에서 손바닥 자국이 여러개 나타나고 이상한 소리가 들릴 때. 너무 미치겠어서 저도 막 콧물을 흘릴 것 같더군요. 제일 실망스러웠던 공포영화는 <더 비욘드>인데 이건 개연성이 없이 뭐가 너무 계속 나타나고... 주인공이 좀비(?)들을 너무 열심히 썰고 다녀서... 아무튼 언젠가 <헬레이저> 1과 2는 꼭 본편으로 다시 볼 생각입니다. 그 핀헤드의 공포를 풀러닝타임으로 즐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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