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제프리 삭스 Geoffrey Sax

주연
레이첼 스털링....낸 애슬리
Rachael Stirling....Nan Astley
킬리 호스....키티 버틀러
Keeley Hawes....Kitty Butler
안나 챈슬러....다이아나 레더비
Anna Chancellor....Diana Lethaby
조디 메이....플로렌스 배너
Jodhi May....Florence Banner
휴 본빌....랠프 배너
Hugh Bonneville....Ralph Banner
조니 베가스....걸리 서덜랜드
Johnny Vegas....Gully Sutherland
알렉세이 세일....찰스 프로비셔
Alexei Sayle....Charles Frobisher
존 보우....월터 블리스
John Bowe....Walter Bliss
샐리 호킨즈....지나 블레이크
Sally Hawkins....Zena Blake

(원작과 시리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낸과 키티

듀나 사라 워터스의 [티핑 더 벨벳]은 갑작스럽게 명성을 얻은 책은 아닙니다.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 컬트 소설로 조용히 폐쇄적인 인기를 얻다가 서서히 주류 독자들을 끌어들인 작품이지요. 아마 워터스 자신도 이 작품이 앤드루 데이비스가 각색한 3부작 BBC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BBC에서 미니 시리즈로, 그것도 앤드루 데이비스에 의해 각색되었다는 건 '주류사회'의 공식적 인정과도 같으니까요.

파프리카 하지만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티핑 더 벨벳]에는 거부할 수 없는 보편적 매력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등장인물들, 근사한 디테일, 뻔뻔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성적묘사, 알짜배기 로맨스같은 것들요. 디킨즈의 소설들이 그런 것처럼, 워터스의 소설도 '대중적인 매력을 갖춘 고전'처럼 보입니다.

듀나 또는 그런 소설들의 모사거나요.

파프리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앤드루 데이비스가 이 작품을 선택한 건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데이비스가 지금까지 다룬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오만과 편견], [허영의 시장], [아내와 딸들], [몰 플랜더스]... 모두 흥미로운 성격을 갖춘 여성 캐릭터들의 성장기지요. 그 때문에 이 양반, 은근히 놀림도 많이 받습니다만.

듀나 네, [티핑 더 벨벳] 때는 더 그랬습니다. 데이비스는 이 때부터 거의 변태취급을 받았지요. 솔직히 그가 꼭 부인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D

[티핑 더 벨벳]은 솔직하고 대담한 시리즈였지만, 예상외로 안전한 길을 걸었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방영되었을 때 BBC는 보수주의자들과 기독교 신자들의 항의를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1회가 끝난 뒤 항의한 사람들은 대부분 섹스신이 그렇게까지 야하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남자 시청자들이었지요! [티핑 더 벨벳]은 당시 BBC에서 제작된 작품들 중 가장 인기있던 시리즈였고, 워터스의 팬들과 일반 시청자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었습니다.

파프리카 이런 종류의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늘 이성애자 남성시청자들의 반응에 먼저 신경쓰는 것 같습니다. 짜증나요. 이번 [The L Word] 때도 그래요. [Queer As Folk]도 많은 여성시청자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비평가들은 이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성시청자들의 반응에 그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잖아요.

듀나 전 [QAF]의 여성시청자들이 상대적으로 그렇게 조금 언급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던데요? 어느 쪽이건 균형을 잃은 선입견 때문이겠지요. 단순한 성차로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티핑 더 벨벳]을 남성시청자들의 관음적인 대상으로만 여기는 건 문제가 있어요. 데이비스의 음탕한 의도를 의심하는 건 비평가들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작자 사라 워터스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여성 시청자들에게 호소하는 여성 취향의 로맨스라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겠죠. 야한 장면을 보려 채널을 돌린 남성 시청자들 중 상당수는 이 시리즈의 노골적인 멜로드라마에 닭살이 돋았을 겁니다. :-)

다이아나 레더비

파프리카 슬슬 시리즈 자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군요.

먼저 기둥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보겠어요. 위트스테이블이라는 해변 마을에 살며 부모가 운영하는 굴식당에서 일하는 평범한 소녀인 낸 애슬리는 마을 극장을 찾은 키티 버틀러라는 남장 연예인에게 매료됩니다. 팬과 연예인 사이로 만나던 둘은 친구가 되고 낸은 키티의 의상 담당이 되어 런던으로 떠납니다. 낸은 키티의 공연 파트너가 되고 결국 연인 사이로까지 발전하지만, 세상의 이목이 두려운 키티는 자기 에이전트인 월터 블리스와 약혼하고 맙니다.

충격을 받은 낸은 키티를 떠나 런던 거리를 방황하다 새 직업을 찾습니다. 그건 남자로 변장하고 다니면서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한 남창 노릇을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낸은 다이아나 레더비라는 귀족 부인의 눈에 들어 그녀의 섹스 노예 겸 장신구가 됩니다. 그 뒤 낸은 쾌락과 사치로 가득 찬 2년을 보내지만 하녀인 지나 블레이크의 편을 들며 다이애나에게 맞서다가 쫓겨나고 말아요,

또다시 길을 잃고 방황하던 낸은 옛 이웃이었던 노동 운동가 플로랜스 배너의 집으로 찾아들어갑니다. 플로렌스와 사랑에 빠진 낸은 배너 가족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하필 그 때 키티가 다시 나타납니다. 둘 사이에서 망설이던 낸은 결국 플로렌스를 선택해요.

듀나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들은 영상 매체에 스토리를 맞추기 위한 개작입니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 낸과 언니 도로시의 갈등은 편지로 처리되어 있지만 데이비스는 낸을 잠시 고향으로 보내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싸울 수 있게 배려해주고 있지요. 뮤직홀 장면들 역시 강화되었습니다. 원작에선 평범한 노동운동가로 새 삶을 시작하는 낸이 시리즈에서는 다시 뮤직홀로 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뮤직홀의 시청각적 느낌이 시리즈에서 훨씬 잘 살아나니까요. 데이비스는 원작에서는 제목만 언급되는 노래들을 스토리 전개와 설명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각색을 특징짓는 가장 큰 차이점은 이야기의 톤입니다. 원작에서 사라 워터스는 어처구니없이 멜로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순진하고 성실한 나레이터를 통해 차분하게 기술했습니다. 이야기는 과장되어 있었고 온갖 종류의 유머가 가득했지만, 작가는 기본적으로 낸의 감정에 충실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스와 감독 제프리 삭스는 이 작품을 작정하고 코미디로 만들었습니다. 이야기와 대사들은 많이 남았지만 톤은 전혀 다르지요. [티핑 더 벨벳] 미니 시리즈는 [티핑 더 벨벳] 소설보다 훨씬 요란하고 극단적이며 노골적으로 캠피합니다. 워터스가 낸의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시치미 뚝 떼며 즐겼다면, 데이비스와 삭스는 그걸 일부러 꺼내 핑크색 실크 깃발처럼 흔들어대는 거죠. 빈번한 아이리스 아웃 (맨 끝에 나오는 건 하트 모양을 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요란한 클리프행어로 끝나는 결말마다 흘러나오는 야유조의 노래인 [It's Only Human Nature After All], 낸의 모든 인생 선택을 마치 뮤직홀의 공연처럼 묘사하는 수법과 같은 것들을 한 번 보세요.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개작을 통해 시리즈가 원작의 멜로드라마와 진지한 감정들을 버린 건 아니었으니까요. 기본적으로 3인칭인 텔레비전 시리즈가 1인칭 소설인 원작이 보여주지 못했던 숨은 가능성을 폭로하는 것도 나쁠 건 없고요.

하지만 이 모든 의도가 얼마나 유려하게 묘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삭스와 데이비스의 의도는 자명하지만 그래도 많은 장면들이 의식적으로 캠피한 농담보다는 그냥 투박한 묘사로 보이거든요.

스토리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은데 이건 사라 워터스가 나중에 인터뷰에서 조심스럽게 예의를 차려가며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6부작으로 만들면 너무 길고 스토리 전개상 3의 배수가 아닌 다른 숫자는 선택하기 어려우니까요. 또 이 미니 시리즈의 요란한 성격에 비추어보면 빠른 속도도 그렇게 나쁘기만 한 편은 아니에요. 괜히 시청자들을 지루하게 하는 것보다야 빨리빨리 진행시키는 게 낫기도 하겠고.

랠프와 플로렌스

파프리카 가장 노골적인 개작은 3부에 있잖아요. 플로렌스의 캐릭터는 원작에 비해 훨씬 더 단순하게 묘사된 것 같습니다. 전 클럽 장면이 조금 거슬려요. 원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아이러니는 얌전하고 모범적인 플로렌스가 낸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동성애자이고 동성애 사회에도 익숙하다는 것이었지요. 원작에서 독자들에게 'tipping the velvet'의 뜻을 알려주는 것도 낸이 아니라 플로렌스입니다.

하지만 시리즈에서 플로렌스는 그냥 죽은 친구에 대한 짝사랑을 가슴에 묻은 순진무구한 여자 주인공에 불과합니다. 클럽 장면도 그 때문에 완전히 입장이 바뀌었지요. 낸이 노련한 '톰'이고 플로렌스는 아무 것도 모르는 초짜고요. 얼핏보면 손쉬운 선택 같지만 사실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지요. 낸은 단 한 번도 동성애 사회의 멤버인 적이 없었지만, 플로렌스는 온갖 계층 사람들과 어울려다녔고 사귀는 여자친구들 대부분도 동성애자들이었으니 말이에요.

듀나 아마 플로렌스를 깊이있게 묘사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도 그 개작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2부에서 낸과 플로렌스의 관계를 어느 정도 깊이까지 진척시킨 건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파프리카 뮤직홀에 다시 데뷔한 낸이 플로렌스와 키티 중 하나를 선택하는 장면도 원작보다 떨어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낸이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면 이야기의 주제가 약해지지 않나요?

듀나 하지만 원작이 굉장히 직설적으로 당시 사회주의 노동 운동을 다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아마 이런 순진무구함이 시리즈에서는 먹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요.

파프리카 그래도 전 화려한 정장차림의 낸이 마치 신부를 간택하는 왕자처럼 플로렌스를 선택하는 시리즈보다 엉겁결에 연설가로 데뷔한 낸이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야외 연단 뒤에서 플로렌스에 대한 자기 감정을 고백하는 원작이 더 맘에 든답니다.

듀나 전 원작에 가득했던 그 수많은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들과 속어들이 사라진 게 조금 아쉬워요. 시리즈에서는 'tom'이라는 단어가 두 번 정도 나오고 마는 수준이니까요. 하지만 느긋하게 단어의 뜻을 추측해가며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책의 독자들과 3시간 동안 숨가쁘게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같은 방식으로 다를 수는 없겠지요.

파프리카 배우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해요. 이 작품이 미니 시리즈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나왔을 때 우리가 캐스팅 게임을 했던 적 있잖아요. 그 때 결과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우리 둘 다 키티 역을 뽑은 배우가 한 명 있었지요. 그 사람은 바로...

해피 엔딩

듀나 킬리 호스였죠! 그리고 진짜로 그 사람이 이 시리즈에서 키티 역을 맡았고요. 한동안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BBC 단골 배우들 중 킬리 호스만큼 키티 역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그 예쁘고 얄미운 이미지는 정말 딱이었어요.

호스만큼 역에 어울렸던 사람은 랠프 역의 휴 본빌과 다이아나 레더비 역의 안나 챈슬러였어요. 둘 다 정말 제가 책을 읽으면서 머리 속으로 생각했던 이미지와 똑같았으니 말이죠.

파프리카 이 작품에 나온 휴 본빌의 모습에 익숙해졌다가 곧이어 방영된 [다니엘 데론다]를 본 사람들은 멀미에 시달리지 않았을까요? 이 두 작품들에서 본빌이 맡은 두 역들은 정말 너무나도 달랐잖아요. 좋은 배우예요.

듀나 제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이미지가 달랐던 배우들은 낸 역의 레이첼 스털링과 플로렌스 역의 조디 메이였어요. 전 낸을 조금 더 부치다운 사람으로 생각했거든요. 플로렌스는 조금 더 동그랗고 평범한 외모로 생각했었고요.

파프리카 아, 기억난다. 캐스팅 게임할 때 플로렌스 역으로 소피아 마일즈를 생각하고 있었지요?

듀나 네, 지금도 전 플로렌스가 소피아 마일즈 같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언더월드]의 에리카가 아니라 [맨스필드 파크]의 수잔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선택도 나쁘지는 않아요. 조디 메이처럼 결백하고 선량해보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잖아요. 예쁜 사람이지만 화려하게 느껴지는 편도 아니고요.

레이첼 스털링도 괜찮아요. 그 동글동글하고 순진한 외모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마음을 확 열어주는 듯한 느낌을 풍기지요. 스털링은 낸을 레즈비언 버전 캉디드처럼 연기했는데, 그 해석은 비교적 정확했던 것 같아요. 남자 목소리도 썩 그럴 듯 했고요.

파프리카 샐리 헤드와 데이비스는 워터스가 쓴 다른 소설들의 판권도 샀지요? [어피니티]는 극장용 영화로 만들 계획이고 [핑거스미스]는 미니 시리즈로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으로 봐서는 [핑거스미스]가 먼저 만들어질 것 같지만요.

듀나 이번에도 3부작 미니 시리즈일 거예요. 소설의 구조가 그러니까요. 설마 이번에도 [티핑 더 벨벳]의 캠피한 접근법을 써먹지는 않겠지요? 이번 시리즈의 경박한 느낌도 나쁘진 않았지만 [핑거스미스]와는 절대로 맞지 않으니까요. 다음엔 좀 진지한 분위기의 워터스 각색물을 보고 싶어요.

파프리카 과연 제가 [어피니티]의 영화판을 볼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책은 이야기가 정말 암담하잖아요.

듀나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워터스가 지금 쓰고 있는 다음 소설의 시대 배경이... (04/02/03)

D&P

기타등등

이 작품이 BBC America에서 방영되었을 때, 대부분의 섹스신이 잘려나갔었다고 하죠. 영국에서는 공중파에서 그대로 방영된 시리즈인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