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Laura (1944) * * * *

감독
오토 프레민저 Otto Preminger

주연
진 티어니....로라 헌트
Gene Tierney....Laura Hunt
데이나 앤드류즈....마크 맥퍼슨
Dana Andrews....Mark McPherson
클리프턴 웹....왈도 라이데커
Clifton Webb....Waldo Lydecker
빈센트 프라이스....셸비 카펜터
Vincent Price....Shelby Carpenter
주디스 앤더슨....앤 트리드웰
Judith Anderson....Anne Treadwell
도로시 아담즈....베시 클레어리
Dorothy Adams....Bessie Clary
제임스 플래빈....매카비티
James Flavin....McAvity
클라이드 필모어....불리트
Clyde Fillmore....Bullitt
랠프 듄....프레드 캘러핸
Ralph Dunn....Fred Callahan
그랜트 미첼....코리
Grant Mitchell....Corey
캐슬린 하워드....루이즈
Kathleen Howard....Louise

0. 들어가기 전에

[로라]가 아무리 40년대 헐리우드 영화의 고전이고 '모두가 내용을 아는' 작품이라지만, 이 나라에서는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고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 영화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고가 별 가치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만 관례대로 경고문을 덧붙이는 편이 낫겠군요. 앞으로 이 작품의 결말을 포함한 모든 반전, 트릭들을 까발리며 이야기할테니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 상관없는 분들은 쭉 내려가시고요. 그럼 시작할까요?

1. 초상화

누가 로라 헌트를 죽였을까요? 바람둥이 약혼자 셸비 카펜터? 셸비를 남몰래 사랑하던 로라의 이모 앤 트리드웰? 로라의 플라토닉한 남자 친구였던 왈도 라이데커?

누가 그랬건 로라는 산탄총을 얼굴에 맞은 시체가 되어 누워있고 마크 맥퍼슨 형사는 아파트에 걸린 로라의 초상화 앞에 섭니다. 왈도 라이데커가 감상을 묻자 이 말없는 형사는 슬쩍 초상화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군요. "뭐, 나쁘지 않군요."

그러나 이 무미건조한 형사가--야구 퍼즐을 가지고 다니고 여자들을 모두 dame이라고 부르는 이 뻣뻣한 남자가--초상화로밖에 본 적 없는 죽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는 특유의 뻣뻣하고 '터프한' 태도로 자신이 어떤 로맨스와도 관계가 없다는 듯 돌아다니지만, 죽은 여자의 초상화 아래에서 죽은 여자의 일기와 편지를 읽으며 죽은 여자의 술을 마시면서 죽은 여자의 의자에 앉아 괜히 감상적이 되어 있는 그의 꼴을 보면 정말 '단단하게 걸려들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박봉을 쪼개 그를 매료시킨 로라의 초상화까지 사들이려 합니다!

한심한 짓이죠. 그가 사랑하는 것은 로라 헌트라는 인간이 아니라, 허공 중에 뜬 이미지의 결합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이건 잘난 형사 나으리에게만 국한되는 일은 아닙니다. 왈도 라이데커에게도 로라는 일종의 예술품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만들어낸 예술품이지요. 사회에 막 뛰어든 풋내기 디자이너를 가꾸고 다듬고 교육시켜 상류사회의 세련된 숙녀로 만들어준 사람은 바로 라이데커였습니다.

그 대가로 그가 바랬던 것은 주말에 같이 식사를 하고 음악을 같이 듣는 수준의 '정신적인 교감'이었지만, 글쎄요... 그게 진정한 사랑이었을까요? 라이데커는 로라를 자신이 만든 틀 안에 넣고 그 틀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셸비를 쫓아내려는 그의 시도 역시 단순한 질투 이상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그는 로라가 자신이 만든 틀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맥퍼슨 형사의 로라에 대한 집착 역시 라이데커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중반 반전까지 맥퍼슨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주었던 사람은 바로 왈도 라이데커니까요.

2. 팜므 파탈

데이빗 라스킨의 나긋나긋한 음악이 흐르는 속에서 맥퍼슨이 한참 감상에 젖어있는 동안 일차 반전이 일어납니다. 로라 헌트가 살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로라의 아파트에서 발견된 시체는 로라가 아니라 셸비의 여자친구인 모델 다이앤 래드퍼드였습니다 (추리 소설의 트릭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벌써 의심하고 있었겠지요.)

이때부터 로라의 위상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로라는 더이상 로맨틱한 회상의 주인공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다이앤 래드퍼드를 죽일 만한 가장 유력한 동기를 가진 사람은 바로 로라잖아요. 게다가 로라의 별장에서 발견된 산탄총과 고장나지 않은 라디오는 로라가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로라는 우상에서 팜므 파탈로 바뀌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전환은 이번에도 로라 헌트라는 인물이 또 다른 전형적인 틀에 빠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번에도 틀렸습니다. 로라는 팜므 파탈도 아니었으니까요.

3. 로라

슬슬 진상이 밝혀질 때가 되었습니다. 용의자들이 여럿 지목되었지만 우리는 이들 중 단 두 명만이 미학적으로 타당한 범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앤과 셸비는 주변으로 밀려났습니다. 남은 건 로라와 왈도 라이데커죠. 로라는 범인이 아니니 범인은 당연히 왈도겠지요? 영화는 맥퍼슨과 로라의 관계가 진척되고 그에 질투를 느낀 왈도가 다시 한 번 로라를 죽이려고 (짐작하셨겠지만 다이앤은 어둠 속에서 로라로 오인되어 살해된 것입니다) 뛰어드는 장면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그렇다면 로라는 누구였죠? 재능있고 영리한 디자이너이며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죠. 그러나 로라는 초상화 속의 신비스러운 그림자도 아니었고 만나는 남자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팜므 파탈도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변 남자들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였고 사람들은 그 필터를 통해 로라를 보았을 뿐입니다.

왈도는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그는 로라를 자신이 만든 틀 안에 끼워넣으려 했습니다. 그가 저지른 일련의 행동은 단순한 질투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라로부터 모든 육체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 했답니다. 셸비나 맥퍼슨이 그의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은 그들이 로라의 구혼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로라를 살아 숨쉬는 성적인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술에서 인간을 끌어내는 자, 저주 받으리라.

4. 왈도

왜 왈도와 같이 지적이고 영리한 남자가 이런 망집 속에 빠져버렸을까요? 아마도 그가 지적이고 영리한 남자였기 때문이겠지요. 그는 예술 애호가였고 예술 애호가의 방식으로 한 여성을, 아니 한 여성의 이미지를 사랑한 것입니다 (D.H. 로렌스가 이 영화를 봤다면 신이 나서 죽어라 얄미운 소리를 해댔겠죠.)

옳은 일은 아니지만 우린 종종 이런 함정 속에 빠집니다. 왈도처럼 한 여성 또는 남성에 대한 광적인 사랑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사상이나 종교, 정치 체계에 대한 망집일 수도 있습니다. 결과는 늘 참담하지만 이런 바보스러운 버릇을 고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건 우리가 너무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난 두뇌는 늘 그 '잘남'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존재를 찾아 헤맵니다.

우리가 왈도에 동정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아닌 척 하고 있지만 우리는 마음 속 깊이 그 바보스러운 좌절을 남몰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도약이 그렇듯이, 왈도의 열정은 건전하진 않지만 아름답습니다. 그에게 갑옷과 말을 주고 카멜롯으로 쫓아버렸다면 왈도도 행복했을텐데.

5. 영화

[로라]는 상당히 험난한 과정을 거친 영화였습니다. 곧장 말해 그 어떤 계획도 그대로 실현된 적이 없는 영화지요. 원래 감독은 루벤 마물리언이었지만 제작자인 오토 프레민저는 그를 해고하고 직접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원래 물망에 로라 역의 후보로 오른 제니퍼 존스는 (소문에 따르면 헤디 라마도) 이 역을 거절했습니다. 루벤 마물리안의 아내 아자디아가 그린 로라의 초상화는 나중에 프랭키 폴로니가 찍은 사진(그림처럼 보이게 하려고 확대시킨 뒤 물감칠을 했답니다)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지금은 영화 음악의 고전이 된 로라의 테마는 듀크 엘링턴의 "Sophisticated Lady"를 주제곡으로 쓰려는 프레민저를 말리기 위해 허겁지겁 쓰여진 것입니다. 이 귀찮은 고난의 연속에 비하면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숨겨 달라는 클리프턴 웹의 계약서는 오히려 사소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다양한 방향 전환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베라 카스파리의 추리 소설을 각색한 각본은 독기서린 훌륭한 대사로 가득 차 있고 (그 대부분은 거위 깃털에 독물을 적셔 글을 쓰는 남자, 왈도 라이데커에게 주어집니다) 프레민저의 통제력은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캐스팅도 거의 이상적입니다. 클리프턴 웹만큼 예민한 독설가 왈도 역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 티어니는 시적인 아름다움의 베일 속에서 사실적인 여성의 모습을 끄집어내면서도 관객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을 수 있는 몇 안되는 배우입니다. 데이나 앤드류즈의 무덤덤함은 오히려 그의 나약함과 감정에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셸비 역의 빈센트 프라이스와 앤 역의 주디스 앤더슨의 캐스팅에 불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주디스 앤더슨은 실력에 비해 낭비된 느낌이며 프라이스의 남부 사투리는 당혹스러우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좋은 배우이고 이 영화에서도 좋습니다.

6. 그리고...

[로라]는 40년대 필름 느와르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이 장르의 전형성에 아주 맞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트렌트 최후의 사건]이 본격 추리 소설에 '대한' 소설이었던 것처럼, [로라]도 필름 느와르와 팜므 파탈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영화라고 여기는 게 더 쉬울 겁니다. 그러나 프레민저와 카스파리가 그걸 의식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아니겠지요. (99/07/18)

D&P


기타등등

1. 이 영화에 나오는 로라의 초상화가 [헨리의 사랑찾기]에서 다시 사용된다는 이야기는 전에 했지요? [로라]가 흑백 영화니까 이 유명한 초상화의 색조를 확인하려면 칼라인 [헨리의 사랑찾기]를 봐야합니다. 블루톤이더군요.

2. 마이클 앳킨슨은 무비라인 94년 12월호에 [The Unique Beauty of Gene Tierney]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썼습니다. 온라인 버전으로 올라와 있으니 링크를 눌러 가보세요. [로라]보다는 티어니에 대한 글이지만 [로라]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