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티어니 Gene Tierney (1920-1991)


1.

진 티어니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한국 관객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활동 시기 때문인 것 같아요. 티어니의 전성시대였던 1940년대는 클래식 헐리웃의 전성시대였지만, 우리 관객들은 그 시대 영화들로부터 묘하게 차단되어져 왔습니다. 아마 역사 탓이겠지요. 한국 관객들은 실시간으로 그 고전들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한국 관객들이 '그 옛날의 헐리웃 영화'라고 할 때, 그건 헐리웃 스튜디오 시스템의 전성기였던 3, 40년대가 아닌 5,60년대 영화일 때가 많습니다. 티어니의 이름이 낯선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겠지요.

아주 기초부터 소개해드리는 것이 낫겠군요. 진 티어니는 40년대 헐리웃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입니다. 프리츠 랑의 서부극 [The Return of Frank James (1940)]로 데뷰했고, [로라 Laura (1944)], [그녀를 천국으로 Leave Her to Heaven (1945)], [유령과 뮤어 부인 The Ghost and Mrs. Muir (1947)]와 같은 영화들을 대표작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아마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영화는 40년대 필름 느와 고전인 [Laura]겠지요. 티어니의 연기가 가장 격찬을 받은 영화는 [Leave Her to Heaven](티어니가 유일하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영화입니다)이겠고요. [The Ghost and Mrs. Muir]는 저희가 가장 좋아하는 티어니 영화입니다. 저흰 아직도 이 영화의 뮤어 부인이 가장 티어니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2.

진 티어니라는 배우를 상업적인 성공시킨 가장 큰 요소는 이 배우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티어니의 열렬한 예찬자 중 한 명이었던 대릴 자눅은 티어니를 보고 '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했었지요.

바로 이 점이 저희를 당혹시키는 부분입니다. 아, 물론 저희도 티어니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아름다움이 그렇게까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티어니의 얼굴의 모양을 결정짓는 도드라진 광대뼈는 그 사람 얼굴을 무척이나 흉하게 보이게 할 수도 있고 거북스럽게 보이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티어니의 아름다움은 보드카의 맛처럼 쓴 맛이 남는 것이어서 친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고 또 취향에 따라 반응이 천지차일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흰 '티어니의 아름다움' 운운하는 영화 안내서를 만날 때마다 이 저자가 정말 티어니의 팬인지, 아니면 옛 헐리웃 앨류어에 취해 그냥 습관대로 써 갈긴 것인지 의심부터 한답니다.

헐리웃 역시 티어니의 외모를 제대로 다룰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헐리웃 캐스팅 전문가들은 처음에 티어니의 얼굴을 보고 '이국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양한 '이국적' 역에 티어니를 몰아붙였습니다. 티어니는 인도인, 남미인, 이집트인, 남태평양 원주민, 심지어 중국계 캐릭터까지 연기해야했지요. '특이해 보인다고 꼭 "이국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교훈을 얻기 위해 그들은 상당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3.

헐리웃이 티어니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한 뒤부터 티어니는 맞는 역을 찾기 시작했으며 '얼굴 마담'에서 배우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티어니는 끈끈한 이국의 요부 역보다는 우아한 상류 사회의 귀부인 쪽이 더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은 정말로 '상류 사회'출신으로, 배우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무개씨 부인'이 되어 사교계에 남았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크리스티 소설 밖에도 정말 존재한다는 걸 들을 때마다 저흰 참 기분이 묘해진답니다!)

[Laura]는 티어니의 '해부도'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입니다. 데이나 앤드류즈가 연기한 형사가 살인사건의 진상에 접근해갈 때마다 티어니의 캐릭터 로라는 점점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적인 유령에서 필름 느와르의 요부를 거쳐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종점은, 매력적이고 우아하지만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현실적인 지상의 여성입니다.

티어니 자신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지요. 티어니는 아주 '우아한' 배우였지만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헐리웃의 촬영 감독들이 아무리 디퓨전 디스크로 화면을 뿌옇게 만들어도 티어니의 강단있는 또릿또릿함은 어딘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 사람의 대표작들에선 말입니다.)

[The Ghost and Mrs. Muir]의 뮤어 부인은 그런 티어니 식 캐릭터의 에피토메입니다. 영화 속에서 뮤어 부인은 로맨틱한 연인이기도 했지만 (유령 선장과 사랑에 빠지는 역입니다!) 쪼들리는 가계를 걱정하는 현실적인 가정주부이기도 했습니다.

티어니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 역시 헐리웃식 내숭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뮤어 부인의 감정 표출은 매우 직설적이었고 그녀의 말빨에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매운 맛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영화 전체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잃지 않았던 것은 역시 그 사람이 '선천적으로 우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지요. 티어니는 거친 뱃사람 욕을 툭툭 뱉어대면서도 여전히 로맨스의 여자 주인공처럼 보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역은 많지 않았습니다. 티어니는 각본운이 그렇게 있는 배우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잦은 건강상의 문제와 사생활의 불행은 그녀의 전성기를 아주 짧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저희가 티어니를 '미완의 배우'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만요.

4.

많은 클래식 헐리웃 배우들이 그렇지만, 티어니의 삶 역시 헐리웃 식 비극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스캔들로 가장 유명한 것은 존 F. 케네디나 하워드 휴즈와의 짧은 로맨스지만, 그녀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정신병과의 긴 투쟁이었습니다.

가장 극적인 비극은 그녀의 첫번째 아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자기 소설(안 읽으신 분들을 위해 제목은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에서 거의 그대로 인용해 소재로 써먹은 적 있습니다. 임신 중이었던 1943년에 티어니는 풍진에 걸렸고 그 후유증 때문에 첫 딸 다리아는 농아에 정신이상으로 태어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티어니는 우연히 한 여성팬을 만났는데, 그 팬은 자기가 풍진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만나기 위해 의사의 명령을 무시하고 검역소를 빠져 나왔었다고 자랑했다는군요, 글쎄! 알겠어요? 세상엔 정말 픽션을 능가하는 일들이 일어난답니다!

5.

몇 년 전 일러스트레이터 멜 오돔은 애슈턴-드레이크 사를 위해 진 마샬이라는 이름의 패션 인형을 디자인했습니다. 4,50년대 클래식 헐리웃 여자 배우의 이미지를 이용한 진 인형은 95년에 첫 선을 보인 뒤로 애슈턴-드레이크 사의 최고 인기 품목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인형의 모델이 누구인지 아세요? 공식적인 발표는 없지만, 진 티어니의 팬인 오돔이 티어니의 이미지에서 진의 영감을 얻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많은 티어니 팬들에게 '진' 인형은 필수 품목이지요.

옆의 사진을 보세요. 티어니와 닮은 것 같지 않나요? (99/01/09)

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