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2013)


유영선의 [마녀]는 올해 나온 한국 영화 중 제작비 효율이 가장 높은 영화입니다. 총제작비 3천만원, 실제작비 천만원. 간신히 단편 하나 찍을 돈으로 버젓한 장편 영화를 만들었는데, 결점이 없다고 말할 수 없어도 장르적 재미도 상당하고 그림도 예쁘게 잘 나왔으며 연기도 좋습니다.

오피스 괴담이라고 홍보하는 영화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여성 비중이 높은 사무실이 배경이죠. 새로 온 신입사원 세영의 보고서가 맘에 안 든 팀장 이선은 여덟시까지 일을 끝내지 못하면 손가락이라도 하나 걸라고 말하는데, 세영은 정말 그 제안을 받아들이며 이선 역시 손가락을 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영은 8시가 되자 정말 새 보고서와 가위를 들고 나타납니다...

이 정도면 단편 소재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이야기를 씨앗으로 삼아 세영을 주인공으로 한 조금 큰 이야기를 그립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들'이죠. [마녀]는 세영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의 모음입니다. 처음에는 직장 동료들의 뒷담화로 끝날 것 같았지만, 겁에 질린 이선이 어설프게 세영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점점 큰 이야기들이 쌓이기 시작해요.

[마녀]의 재미 중 하나는 이 이야기들을 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화자는 세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뿐이고, 어떤 화자는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있고, 어떤 화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들의 가장 중요한 정보원과 화자는 여전히 세영 자신입니다. 영화는 추리물의 형식을 반대로 뒤집어 놀려대는 것처럼 보입니다. 추리물은 탐정이 앞으로 전진하면서 미스터리가 조금씩 풀리지만 이 영화는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꽤 재미있는 초상을 그립니다. 같은 인물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유기적인 흐름을 타고 조금씩 변화하는 초상이죠. 이 초상을 이루는 부분들이 모두 사실은 아니겠지만 심지어 그 거짓말들도 세영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차피 이선과 관객 모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끝까지 알 수 없으니 진실여부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애정 갈구, 사랑받는 사람들에 대한 질시처럼 그럴싸한 것들을 던져준다고 해서 그런 걸 다 받아먹을 필요도 없는 거고.

장르물로서 영화의 위치는 다소 애매합니다. 들어보니 감독/작가인 유영선은 유명한 호러 팬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 영화는 호러보다는 스릴러에 더 기울어 있습니다. 호러 캐릭터와 호러 재료를 잔뜩 쓴 스릴러죠. 고어는 절제되어 있다가 막판에 터지는 구성인데 클라이맥스 장면은 [오디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단지 그 강도까지 올라가지는 않아요. 제작비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의 성격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충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손가락 내기를 다룬 전반부에 비해 탐문수사가 이어지는 중반부의 긴장감이 좀 약해보이긴 하는데, 그렇다고 그 부분에서 이야기의 재미가 많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요.

이 영화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사람은 역시 세영을 연기하는 박주희입니다. [족구왕]의 안재홍이 그랬던 것처럼, 이전에도 여러 번 봤지만 한 사람으로 묶지 못하다가 이번에 확 각인된 배우죠. 일단 기본이 좋습니다. 대사 예쁘게 치고 멋들어지게 싸가지가 없으며 적절하게 싸늘하고 섬뜩합니다. 여기까지는 평판이 좋아서 기대를 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박주희의 세영이 의외로 러블리했다는 것이죠. 거짓이건 아니건, 통쾌하거나 감정이입이 가능한 부분도 많고. 물론 제가 세영과 같은 직장에서 일했다면 사정이 달랐을 수도 있지만. (14/09/20)

★★★

기타등등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영화에서 가장 믿을만한 부분은 누군가의 회상을 통하지 않은, 세영의 과거 묘사입니다. 그 때문에 그 부분이 영화 안에서 조금 튀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장면이 다른 이야기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는 건 아니란 말이죠.


감독: 유영선, 배우: 박주희, 나수윤, 이미소, 강기화, 신예진, 안선영, 이익준, 이규형, 다른 제목: The Wicked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The_Wicked.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3378

    • 아주 드물게 간혹 나오는 정말 공감할 수 없는 듀나님 리뷰 중 하나네요.. 전 정말 재미 없었고 이 영화의 계산이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점점 큰 이야기들이 쌓이는 게 아니고 아주 시시껄렁하고 의미도 재미도 창의성도 없는, 흔하디 흔한 하나마나한 소문들을 계속 찍어대는 게 영화의 대부분이었으니. 이야기의 재미가 전혀 없었어요 전. ㅠㅠ
      • 이야기가 '쌓이지 않는 게' 이 영화의 포인트가 아니었던가요.
        • 네 그래서 텅 비어있어요. 이야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그걸 대신할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서로와 조금씩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확장된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심지어 그 이야기의 대부분이 거짓말이어도. 이건 흥미로운 서술방식이라고 생각해요.
            • 언쟁을 하고 싶은 건 전혀 아닌데, 좀 더 구체적인 예로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 왜냐면 제가 느끼기엔, '서로와 조금씩 모순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그 애는 이렇다 하더라 저렇다 하더라 귀신 씌였다 하더라 손금이 죽은 사람 손금이라 하더라 뭐 동물들을 죽였다더라 등등 창의력이라곤 없는 시시껄렁한 괴담들 뿐이었거든요. 그 이야기들이 지루하게 나열되는 데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걔가 무서워요' 하는데 듣는 사람 입장에선 당췌 재미도 의미도 창의성도 없는.. 들으나 마나한 이야기들이라 그것들이 확장된 캐릭터를 만든다고도, 흥미로운 서술방식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어요.
              • 내용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가 어떤 입장의 어떤 화자를 통해 어떤 의미를 갖고 전달되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 과정엔 흐름이 있죠, 원래 문제가 있는 주인공이 있고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쌓이고 어느 순간부터 주인공은 그 선입견을 파도 타듯 이용하는데 그 과정 자체가 구체적으로 무얼 했다느니, 하는 내용보다 중요하죠, 그리고 의외로 탐문수사의 괴담 자체는 비중이 크지 않아요. 이 영화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건 오히려 주인공이죠. 그렇다면 그 정보를 어떤 의미로 주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겠죠. 개가 죽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만 해도 단 한 차례만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영화 안에서 최소한 세 번인가 의미가 바뀌거든요. 거짓인지 참인지를 밀어놓고 보더라도요.
    • 솔직히 씨네21에서 이용철 평론가의 평이 너무 혹독해서 피하고 있었는데, 막상 듀나평론가의 글을 읽다보니 이 작품을 꼭 보고싶어 오늘 여의도 cgv 한자리 예약했습니다.
    • DJUNA/ 저 밑에는 더이상 답글이 안 달리네요 ^^;; 자세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유심히 한번 봐야 겠네요. 유사한 화법의 영화를 본 적이 없어 혹은 제가 이 영화의 화법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제가 익숙치 않아 따라가지 못한 것일지도.
    • 으엑 러블리 했다고요? 역시 듀나님 취향 고약하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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