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혁명, 갑낙원의 종말

2013.05.11 07:20

LH 조회 수:4253

지난 일주일만큼 스펙터클한 한 주가 또 있었을까요.
포스코 라면으로 시작한 바람은 남양유업의 욕설로 한껏 달아올랐고,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쥐어짠 팝픽의 횡포로 바글거리다가 대통령의 첫 외유 중에 섹스 스캔들을 벌인다는 기상천외한 청와대 대변인의 사고가 터졌습니다. 이제 북한 미사일 및 전쟁 위협 따위는 안드로메다의 작은 티끌만큼 사소하게 느껴지는 사건팡의 연쇄 속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는 농담이고 다음엔 과연 어떤 일이 터질까 걱정이 되는 군요.
이들은 모두 별개의 사건들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들에게서 보이는 하나의 공통점입니다.  갑과 을, 고용주와 고용자, 손님과 서비스 응대자가 충돌을 하고- 그리고 을의 목소리가 호응을 얻고 있지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불과 몇년 전, 아니 몇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싶습니다.

 

참으로 비참하고 슬픈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선 갑질이란 말이 참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갑님이 생각없이 내뱉은 말 때문에 을은 개고생해가며 쥐어짜이고, 그렇게 일하고 나서도 돈 뜯기는 일도 벌어지고, 여기에 항의하면 오히려 밥줄 잘라버리겠다며 협박이나 듣고, 그래서 을은 여전히 눈물을 삼키며 말없이 쥐어짜이는 일이 당연했습니다.
뿐만인가요. 아직도 그러는 지 모르겠는데,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면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며 숨이 턱 막히는 부담스러운 애교를 듣고, 물건에 존대를 하는 기괴한 한국말을 듣곤 했죠. 그 분들도 그리 하고 싶었겠어요? 안 하면 손님이 항의를 한다, 라는 클레임 때문에 그랬겠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여론이 갑들에게 비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래봐야 얼마나 가겠냐, 하는 쿨식한 목소리도 있지만 포스코는 이미지가 깎이고, 남양은 대국민사과를 했으며 청와대는 대통령에게 사과했지요. 뭔가 중간에 이상한 게 끼어있지만 넘어갑시다.
아마 갑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이 많고 높으신 갑들은 이런 상황이 이해도 안 가고 화도 날 겁니다. 내 때는 안 이랬는데, 나는 더 심한 일도 당했는데 왜 난리야, 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랬었지요.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을들에게 정말 많은 희생을 요구했었고요. 그리고 어쩌면 그랬던 시기였습니다. 전쟁 이후, 경제규모는 작고 물자는 한정되어 있으니 이윤을 얻으려면 쥐어짤 수 있는 게 인건비 뿐이었던 그 때. 인권이고 존중이고 먹고사니즘 앞에서는 나발이 되었던 그 때 그 시절이었지요. 그 시대를 거친 어른들에게는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만. 이제 수십년이 흘렀건만 그 어쩔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관행으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미 전쟁의 상처는 아물고 경제는 커졌으며 시민의식은 자라나고, 마침내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싶은 욕구 역시 커졌는데도 깡그리 무시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갑들에겐 편하거든요. 직원에게 라면 끓여오라 진상질을 해도, 하청업체에게 온갖 험한말을 퍼부어도, 인턴을 추행해도, 옛날이라면 다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갑이니까요.

라면 사건과 대변인 사건이 '미국'에서 벌어져서 이렇게 불거진 거지,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면 당장 묻혔을 거다라는 주장은 일견 맞지만. 그리고 어떤 갑들은 "여긴 한국이지 미국은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렇게 정의무쌍하고 어벤져스 영웅들이 더글대는 듯한 미국도 불과 수십년 전에는 인종차별이고 여성 참정 금지고 파업금지고 오만가지 야만적인 짓은 다 했던 동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역시 그렇게 변해갈 것이리라 봅니다.

 

제 생각에는, 이번 사건들이 터지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이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라는 인식도 있었겠지요. 다만 자신의 말이 공감을 얻을 지 확신이 없었고 그래서 그냥 숨죽이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 사람들이 하나 둘 말을 하다보니 "너도 이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실은 나도 그랬어." 라는 공론의 장이 비로소 등장하게 된 거죠. 공감을 통해 의식이 자라나게 되고, 이건 곧 사회의 상식이 됩니다.

한국도 차츰 그렇게 변해가겠지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한 번 냠 한 뒤 수치심을 깨달아 옷을 줘입은 것 마냥, 이미 한 번 깨어난 생각은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어요. 이전처럼 홀딱 벗고 갑질하긴 어렵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상이 그리 쉽게 바뀌진 않을 겁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 속에 조그만 이중잣대 하나 쯤은 있는 법이니, 포스코 상무에게 분노했던 사람이 음식점 알바에게 더 심한 진상질을 해대고, 남양유업을 불매하는 사람이 늦어지는 택배 때문에 짜증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하지만 일단 깨진 균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질 않습니다.
아마 다른 분야에서 벌어지던 갑들의 횡포도 하나 둘 불거져 나올 것이라 보는지라, 이렇게 된 이상 갑들이 맘대로 갑질할 수 있는 갑낙원은 다시 열리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이제 진상 갑은 도도새처럼 멸종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 군요.

 

비록 새로운 혁명의 시대는 서비스 담당 직원들이 옛날처럼 간을 빼줄 것 마냥 친절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 쌍욕을 퍼붓는 사람을 이전보다 덜 만나는 것으로도 만족하렵니다.

 


- 언젠가 착한 갑이 되고 싶은 글쟁이 을 씀.

 

하도 오랜만에 글을 쓰니 안 뽑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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