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의 힐링, 그리고 각오

2012.12.20 20:04

LH 조회 수:1811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아마 올림픽 하기 직전이었을 거여요, 그 때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걸 했지요. 그 전까지는 대통령은 체육관에서 뽑히는 것이었는데 이제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게 된 거였습니다.

저는 아주 꼬맹이였지만 그래도 한글은 읽었지요. 선거 즈음해서 길바닥에 계속, 계속 종이가 날리고 있었지요. 지금도 문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거나 아직 남아있는 정치가들을 하나하나 지목하며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어댄 종이쪽지들이었지요. 그게 훗날 말하는 흑색선전이란 걸 알았습니다. 하도 기가 찬 이야기들이 많아서 참 신기했지요.

 

그리고 어른 신문을 줏어보다보면 주로 만평에서 3김이다 뭐다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몰랐지요, 어렸으니까. 민주화 항쟁이고 시위고 뭔지 몰랐습니다.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종철이를 살려내라! 라고 외치는 아저씨들을 보고도 "저 사람들은 종철이란 사람의 친척들일까?" 하고 생각했을 뿐이지요. 그러다 사과탄을 맡고 캑캑 거리며 울기도 했습니다.

어리디 어린 아이가 세상이 번잡하게 돌아가는 구나, 하고 생각하던 차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노태우라고. 저에게 새로운 대통령은 새로운 취임 기념 우표 뿐이었습니다만, 조금 머리가 자라고 역사를 배우게 되면서 깨달았지요. 그날, 그 대통령이 선출된 것이 얼마나 긴 악몽이고 얼마나 큰 절망이었는지. 처음으로 국민이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었는데 열심히 분열하고 투닥거린 덕분에 군사정권의 후계자가 슝- 하고 대통령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는 것을. 그래서 정말 민주주의라는 것은 한참 후퇴하고 그 이후로도 다들 엄청난 비자금 꿰차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 까지도요.

 

어제 당선결과를 보고 저 개인적으론 참 절망하고 좌절했지만.
그러면서도 그 때만 하겠어, 란 생각을 했어요.

 

이번 정부 때도 이거저거 비리다, 사찰이다, 기타등등 시끄러운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그 당시엔 정말 목숨을 내놓고 피를 흘리며 싸워왔잖아요. 다치고 아프고 끔직하게 고문당했어요. 그렇게 싸워서 겨우겨우 얻어낸 대통령을 뽑을 권리였는데, 이상한 놈이 꿰차버린 거여요. 얼마나 기가 막히고 허탈하고 맥빠졌을 지. 그 때 싸웠던 분들이 지금의 5, 60대이겠지요.
그 분들이 그런 절망을 겪고 각종 부침을 겪으면서 지금의 보수가 되었다면... 뭐, 속은 상하지만 이래저래 크게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저는 이 정도 일을 겪고 며칠 째 좌절하고 있는데 그 어르신들은 어떻겠어요. 이제 저기까지만 가면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줄 알고 피흘리고 싸우고 데모했는데 정치가 놈들(...)이 제 욕심 내세우며 싸워서 다른 놈이 채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눈 앞에서 펼쳐진 거죠. 멘붕도 초특급 멘붕이 따로 없지요. 이런 일을 겪고 정치불신에 빠질 법도 하다고 봅니다. 지금 내 주변의 젊은 사람들은 나이드신 분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펄펄 뛰고 있긴 하지만. 그 분들이 겪어온 수많은 부침과 고난을 생각하면 그 분들의 생각 - 혹은 절망을 마냥 비난만 할 수 없겠지요.

 

오히려 저는 제 생각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만 보고 세상 전체를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반성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다양하고, 나만이 옳지 않다는 것을요.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도요.

그래서 지금을 추스리며 다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저 말로만 떠들며 알티 버튼 누르거나 퍼오기를 하는 대신. 내 지역을 돌아보고 나에게 맞는 정당을 찾아보며 내가 원하는 방향을 대변해줄 수 있는 공약은 무엇인가. 정치란 게 사실 대단한 게 아니다 싶어요. 내 권리를 요구하고 그걸 정책에 반영할 수 있게 하는. 그렇다면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는 것보다도 더 많은 행동을 해야 마땅하다는 거죠. 이제는 뭐, 거리로 나가 돌을 던지고 진압군과 싸우거나 대자보를 붙일 필요까진 없지만. 그에 준하는 것 만큼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며 때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배웠답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책을 쓰려고 해요. 아직 생각만 하고 있지만, 큰 목소리를 내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대신. 차분하고 조곤조곤하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아주 어린 아이들도 읽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책을요. 그러면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나의 20대를 속죄하며 이 세상에 아주 작은 보탬이라도 되리라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내가 나이들었을 때 고집을 내세우기 보다는
시대에 맞춰 유연하게 생각하고 내 욕심보다 젊은이들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노인이 되고 싶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내일은 더 좋은 날이 될 거여요.

 

- 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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