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월식

2011.12.11 17:39

LH 조회 수:1956


월식이 있었네요. 보고 싶었건만 이런 저런 바쁜 일 때문에 결국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야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가려서 월식이 생긴다는 천문학 지식들을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게 없던 사람들에게 둥근 달이 붉은 색으로 물들어 사라져 가는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고 신기하면서도 두려웠을 거여요. 일식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월식이 일식보다 자주 벌어지니까요.

 

인간이 언제부터 식을 알고 기록했을까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아무래도 갑골문에 적힌 것 같습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해는 삼족오가 먹고, 달은 두꺼비가 먹는 것- 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식이 생기면 까마귀와 두꺼비를 쫓기 위해 활을 쏘고 북을 두들겼습니다. 이걸 구식(救蝕)이라고 했지요. (이건 나중에 조선에서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와 달은 본래대로 돌아오지만 그래도 식은 또, 자꾸 생기지요. 그런 두려움 때문인지, 사람이 뭔가 잘못해서 식이 생기는 거다, 라는 믿음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좀더 자세히 하면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에 변고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똑바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경고로서 말입니다. 이건 양치기임금님 주나라 유왕이 화려하게 스타트를 끊은 이래, 이후로 천 년 넘게 지도자를 갈구는 단골 소재로 이용되었습니다.
"님하가 나라를 잘 못 다스렸으니 식이 생기잖아요!"- 라고요.

 

그래서 식이 생기면 황제 또는 임금은 자숙하고, 신하들에게 "혹시 내가 뭐 잘못했음? 야자 트고 말해주라"고 쫙 엎드리고 들어가는 게 하나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식이란 원래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천체의 현상이었기에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및 한나라 때가 되면 언제 벌어지겠거니 예측 가능한 현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오늘은 식이 있어야 하는데 날이 흐려서 안 보임"이라던가, "(안 보이지만) 지평선 아래에서 식이 벌어졌을 것임"이라고 꽤 정확하게 예측을 하고 있어요.
기록 하는 것 역시 자세해서 "언제부터 식이 시작되었는데 총 시간 몇 분 몇 초"라고 까지 적혀있죠.

세조 때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식이 있었는데 서운관이 보고를 안 한 거여요. 세조가 왜 보고 안 했듬? 이라고 물으니 "세종께서 분 단위 미만은 보고하지 말라케서..." 라는 답이 돌아왔다죠.

 

그 외에도 천문학에 관심 많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걸 주장했던 북학파 홍대용은 유명하지만, 그 이전인 현종 때 쓰여진 천문책인 추측록에도 식을 놓고 이런 추측도 나와요.

 

1. 식은 지구의 그림자 때문에 생긴다.
2. 달에 비친 지구 그림자가 둥글다. 따라서 지구도 둥글다.
3. 달이 지구 그림자에 몽땅 가려지니까 달이 지구보다 작다.

 

...등등. 어쩌면 우리가 당연한 상식으로 배우는 지식들을 많은 고민과 연구를 통해 도출해냈죠.

그렇지만 여전히, 꾸준하게 식이 어떤 정치적 상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정확히는 현실 정치가 하늘에 영향을 미쳐 어떤 현상이 나타난다고 믿는 거죠. 특히나 나쁜 쪽으로.

 

"뭐... 일식이나 월식은 때 되면 생기는 것이긴 한데... 임금이 잘 다스리면야 그냥 별 일 없지만 정치를 못하면 기가 요상꾸리하게 뭉쳐서 생기는 거라능."

 

...이라는 말이 될 거 같으면서도 안 되는 것 같은 말이 거듭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옛날 임금님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할 거여요. 저런 미신을 가지고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반성을 하고 눈치를 봐야 한다니 말여요. 식이 벌어진다고 소복을 입고, 북을 두들기며 신하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임금들 중에서 몇이나 내가 정말 잘못해서 벌어진 거다, 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보통 연례 행사로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굳이 현상만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니어요. 일식, 그리고 월식은 어떤 비유로도 쓰여졌습니다.

 

"임금님의 잘못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습니다."

 

라고요. 일식과 월식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임금이 잘못을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고, 그걸 고치면 그 역시 모두 보게 된다... 는 거죠.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 임금의 자리요 권력이고, 아무리 숨기고자 해도 빤히 보이는 게 임금의 잘못이니,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고, 만약 저지른다면 그걸 올바르게 고쳐 원래의 태양과 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아주 뻔한 잔소리였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자신의 임금들에게 했는지 몰라요.

 

세 살 먹은 애도 잘못 저지르면 고치려고 하는데 하물며 만백성 위에 있는 임금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이 세상엔 가카처럼 도덕적이고 완벽한 지도자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p.s : 간단히 써야지 하다가 자료수집하다가 양이 너무 불어나서 이거저거 잘랐습니다.
과학사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으니 더 궁금하시면 찾아보시던가...
아니면 물어봐주세요. 힘 닿는 데까지 대답해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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