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친구녀석이 이런 말을 하네요.
"좀 있으면 컴퓨터 산다"
이넘이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알고있던 컴퓨터라는 개념은 집채만한 크기에 하얀 가운 입은 박사님들이나 만질 수 있는 그런 물건이었습니다. 그걸 가정집에 들여놓다니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데 얼마후 그녀석이 진짜로 컴퓨터를 샀습니다. 그래서 전 생전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걸 실제로 보게되었죠.
직접 본 컴퓨터는 그동안 영화나 만화에서 보았던, 뭐든 물어보면 다 가르쳐주는 만능척척박사와는 몇광년쯤 떨어진 물건이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너무 별것 아니었어요. 그때 생전 처음 컴퓨터 게임이란 것도 해보게 되었는데, 지금이라면 돈주고 하라고 해도 안할 그런 조잡한 거였습니다.
그게 大삼성전자에서 자체개발했다고 뻥을 쳤던(실제로는 일본 샤프에서 만들었던 컴퓨터를 개조한 거...) SPC-1000이었습니다. 컴퓨터란 물건의 실체를 접하고 실망하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물건이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전 그 친구 따라서 컴퓨터 교육 세미나 같은데도 가보고 그랬습니다.
교육 세미나...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거기 온 사람들 전부, 앞에서 뭐라 떠들건 말건 신경도 안쓰고 각자 앞에 있는 컴퓨터에다 가지고 온 게임을 로드해서 하고 있었어요. 그시기에 평범한 일반인이 개인용 컴퓨터를 가지고 그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게... 뭐 게임밖에 없었죠. 그때부터 저는 컴퓨터란 건 가지고 놀기 위해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호구조사를 하면서 '집에 컴퓨터 있는 사람?'하고 물어보면, 한반에 6,70명 정도 있는 학생들 중에 많아야 한명 손 들까말까한 한 때였습니다. 컴퓨터를 가진 아이들끼리는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고, 컴퓨터도 없는 저도 그 사이에 끼어서 같이 다녔죠.
그렇게 해서 대충 당시의 컴퓨터 사정을 파악하고 나서 드디어 저도 컴퓨터를 사게되었습니다.
그때 국내에서 살 수 있는 선택지는 세 개. 삼성의 독자기종인 SPC-1000과 (삼성도 포함한) 대기업에서 라이센스 생산하는 MSX, 글구 청계천의 무수한 구멍가게들에서 무단으로 조립하는 애플 II 클론이었습니다.
친구들 집에서 각각의 컴퓨터를 한번씩 돌려봤던 저는 아무 고민없이 MSX를 선택했습니다. 애플이나 SPC는 게임 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거든요ㅎㅎㅎ 당시 저한테 게임하면 당연히 오락실 게임이었고, MSX 이외 기종들에서는 오락실하고는 한 1억광년쯤 떨어진 게임들만 있었더랬습니다.
사실은 전 오락실 게임을 지지리도 못했어요. 그래서 사실은 애플 게임들이 제 성향에 더 맞는 거였지만 그때의 저는 게임하면 오락실 게임밖에 몰랐고 애플 게임들은 너무 낯설었으니까요.
부산에선 컴퓨터를 어디서 사야할 지도 몰라서, 아버지가 서울까지 가서 사가지고 오셨어요. MSX는 본체 가격만 치면 다른 컴퓨터들에 비해 특별히 비싸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지만 주변장비가 비쌌습니다. 그래서 주변기기는 당시 필수품이었던 데이터 레코더만 사고, 모니터는 흑백 TV를 중고로 사서 달아 썼습니다. 이미 MSX의 그래픽 수준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걸 비싼 돈주고 컬러 모니터까지 사서 볼 가치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어요(진짜로 비쌌으니까...)ㅎㅎ
컴퓨터 본체에 번들로 갤러그 복제 롬팩이 같이 왔습니다. MSX라 그래픽은 많이 죽었지만 흑백으로 보니 딱히 뒤떨어지는지도 모르겠고.... 게임자체는 꽤 충실하게 옮겼던 것 같아요. 전 오락실에서 갤러그를 하면 1분을 못버티고 다 죽었으니까, 집에서 한다고 그 실력이 어디갈리는 없죠. 그래서 그닥 하지도 않았고, 그러다보니 그 롬팩이 어디로 가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롬팩엔 별 관심 없어서, 제가 써본 롬팩은 그 번들 하나뿐입니다. 데이터 레코더만 줄창 썼죠. 데이터 레코더의 장점은 당시 어느매체도 따라갈 수 없는 가성비. 그시기 MSX에서 플로피 드라이브는 본체가격과 맞먹었고, 디스크 '한장'에 몇천원씩 했어요. 데이터 레코더는 걍 아무 레코드 가게나 가서 몇백원 주고 공테이프만 사면 바로 쓸 수 있었죠.
단점은 모든 매체를 통틀어서 가장 느린 속도. 최대 2.4kbps였을겁니다. 그치만 그시기 MSX 게임의 최대 용량이 32KB였으니 쓸만은 했어요. 한 5분정도면 로딩할 수 있었죠.
MSX의 장점은 다른 기종에 비해 액션게임이 충실하다는 거였지만 액션게임에 잼뱅이던 저는 MSX를 통해 퍼즐, 롤플레잉, 어드벤처 같은 장르에 맛을 들였습니다. 그러니 저한테는 애플이 더 어울리는 거였지만...ㅎㅎ
캐슬, 호비트, 블랙 오닉스 같은 게임들을 오래 붙잡고 있었죠.
그러다가 MSX2가 나오고, 대세가 그쪽으로 넘어가면서는 컴퓨터를 쓰는 빈도가 줄어들었습니다. 안쓰고 가만 냅뒀더니 고장이... 그래서 한동안 컴퓨터와 거리를 두고 살았죠. 그동안에는 컴퓨터 잡지에서 대충 소식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몇년 지나, 교육용 PC가 IBM으로 지정되면서 MSX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MSX를 지지했었기 땜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뭐 당시 컴퓨터도 없었던 저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죠ㅎㅎ
그렇게 저의 8비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저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시대와 선택이셨군요. 저는 애플][로 시작해서 MSX로 늦게 건너간 편이었습니다. 중학생 때 애플을 거쳐서 울티마와 위저드리 바즈테일 등을 했지만 결국 영어를 읽는다기 보다는 여기저기서 구한 공략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었죠. 이후 MSX의 시작도 대우 CPC-400, 통칭 X-Ⅱ였죠. 고등학교 때 학교에 컴퓨터 서클이 있어서 거기서 주로 놀았습니다. 컴퓨터 서클에서 나름 전통 아닌 전통이 학교 축제 때 톰 행크스가 나오는 영화 BIG의 발로 밟는 피아노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키보드 단자로 연결되는 센서를 만들고 나무 발판에 흰 페인트 칠해서 피아노 건반을 만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학교 컴퓨터 서클에서도 8비트 보호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저는 IBM-PC DOS전향이 늦은 편이었습니다. 386시대는 오히려 잘 모르고 윈도우로 바로 넘어간 셈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은 학교 안의 우체국에서 하이텔 단말기로 PC통신을 하다가 군대에 갔지요. 군대를 제대하고는 모 게임잡지의 외주 인력 놀이를 하다가 이름 없는 게임 개발사 몇군데를 전전했지요. 이후 어쩌다 보니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가 지금도 출판업 종사자 비슷한 존재로 살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