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30 12:03
이 영화를 보면서 부끄럽게도 후반부에는 좀 졸아서 영화에 대해 할 이야기가 아주 많지는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통합적으로 꿰뚫는 감상을 갖지 못한 채로 지엽적인 감흥만 나누게 되는 한계가 있으니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번주 주말에 다시 한번 볼 예정이지만 아마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볼 때의 온전한 감동은 살짝 잃어버린 상태이니 재감상을 하면서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네요.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한 충격이 곱씹을수록 좀 올라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평온하고 일상적일 수 있는가... 엔딩 크레딧의 음악이 너무 끔찍해서 몸서리를 쳤는데, 그건 아마 감독의 친절한 배려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회스 가족은 그 신음을 듣지 못하고 살았지만 극장의 관객 여러분까지 그렇게 무감각한 채로 극장을 나서진 마시라고. 이 영화가 분명한 역사적 소재를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영화의 스토리가 끝나고 울려퍼지는 이 비명소리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 사이를 침투하는 인류의 상처이자 비명일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면, 그 사건들도 완전히 끝나거나 잊혀질 수 있을까요. 그 비명은 당연히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현실의 우리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우리는 또 그것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영화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왜 관객인 우리는 수용소 내부를 보지 못하는가. 영화가 안보여주니까 못본다는 것에는 추가적으로 질문을 이어가보고 싶어집니다. 이 영화는 당연히 pov로 찍은 작품이 아니고, 영화는 종종 독단적인 시선으로 어떤 광경을 응시합니다. 이를테면 헤트비히가 자기 어머니에게 정원을 자랑하면서 보여줄 때, 카메라는 아예 꽃 한송이 한송이를 차례대로 클로즈업으로 꽉 채워서 보여주는데 이것은 헤트비히도 그의 어머니의 시선도 아닙니다. 다만 영화가 섬뜩하게 읊조린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 상황에 대해 영화가 문학적인 경멸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헤트비히는 어머니에게 그의 왕국을 자랑했다,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잘 관리된 채로 활짝 피어있었다. 이 꽃. 저 꽃. 여기에도. 저기에도.' 이처럼 영화가 분명한 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면 왜 이 영화는 수용소 내부를 바라보지는 못하냐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끔찍한 살상을 영화에 담았을 경우 그 자체로 포르노적 타락을 겪는 위험이 있을 수 있고 또는 도저히 맨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는 장면을 차마 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이 따라옵니다. 지금 우리는 봤어야 하는 것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봐야 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하는 회스 가족의 태도와 어느 정도 결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요. 물론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감각한다는 지점에서 보지 않더라도 소리를 통해 실감할 수 있으니, 응시의 도덕적 책무를 지고 있지는 않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질문은 이 전에도 [사울의 아들]에서 정반대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아우슈비츠를 다루는 영화에 대해서 보는 사람은 항상 어디까지 볼 수 있고 어디까지 보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묻게 되는 것 같습니다.
관객인 우리는 상영시간 대부분을 회스 가족의 집 안에서 수용소의 학살을 소리로나마 미약하게 느끼게 되는데, pov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집안 누군가의 시선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효과를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시선은 일단 루돌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수용소에 직접 드나들 수 있는 학살의 당사자니까요. 그럼 이 모든 현실의 간접적 자극을 무시하고 살 수 있는 다른 누군가일텐데 이 경우에 두 후보군으로 좁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행복한 생활을 만끽하는 회스 가족, 또 하나는 회스 가족을 위해 일하는 유대인 중 한명.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의 가능성을 더 밀고 가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하면 수용소 내부로 시선이 절대 가지 않는 이유는 '두려움'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영화의 시선이 집안에서, 때로는 루돌프의 군인업무 처리 현장까지도 따라가지만 수용소 내부까지는 절대 못갑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어쩌면 이 영화의 시선은 거기까지가 딱 견딜 수 있는 한계라고 선을 그어놓은 것 같습니다.
굳이 시선의 주체를 설정하고 억지스럽게 해석을 밀고 나가보는 이유는 이 영화를 누구의 시선으로 보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한국사람은 한국인 관객의 위치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됩니다. 그럴 경우 이것은 어느 외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고 우리는 그 사건을 제3자로 목격하거나 관찰하는 정도에서 그치게 됩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아주 편하게 회스 가족을 비난하고 그 비인간성에 혀를 차며 그 어떤 죄책감도 없이 쉬운 판단을 하게 됩니다. 정말로 그것만을 위해서라면 이 영화가 이렇게 회스 가족의 일상에 들어와있어야 할지 다시 의문이 생깁니다. 비록 영화가 직접적으로 그 시선을 취하지 않아도 회스 가족을 위해 일하는 어느 유대인의 자리에서 이 가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진짜 호러가 됩니다. 바로 옆에서 내 동포가 계속해서 죽어가고 어디선가 그 신음소리가 계속 들리고 '안주인' 헤트비히는 까다로우며 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삶녀서 저런 자극을 계속 느끼는 건, 도대체 어떤 심정일지 굳이 그 자리에 가보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전하게 영화의 바깥에서, 원거리의 감각을 유지한 채로 회스 가족을 꾸짖거나 보고만 있는 것이 이 영화를 제대로 느끼는 방법인지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하거든요.
영화 중반에 어머니는 헤트비히에게 묻습니다. '너는 집에 유대인들을 들여놓고 일하니?' 그러자 헤트비히는 대답합니다. 아주 정확하진 않지만 '유대인들은 저기 수용소에 있고, 이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이에요.' 저는 이 대답이 조금 미묘해서 처음에는 같은 독일인이라고 지칭하는 건가 헷갈렸습니다. 그런데 영화 초반에 옷을 나눠주면서 유대인 이야기를 막 하는데 화면 오른쪽에 크게 잡힌 가사노동자를 보거나, 후반부에 헤트비히가 집안 노동자에게 화풀이를 해대는 걸 보면 이 사람들은 유대인이 맞습니다.
회스 가족을 위해 일하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가능한 질문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역사적 관점으로만 보면 회스 가족은 이미 남이고 구시대의 사람들이죠. 그러나 이를 도덕적 관점으로 보면 좀 무서워집니다. 영화가 만약 이렇게 묻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매일 나와 같은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비명을 들으면서, 무서운 티도 못내고 살았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나요?' 관객을 그저 관객의 자리에 앉혀놓는 대신 어쩌면 관객들도 어떤 상황에서는 회스 가족의 자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는 이 영화의 정말 무서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독일 나치 당원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죽는 걸 방관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고민까지 해야하지? 라고 반문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역사적 관점을 다소 희석시킨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타인의 고통과, 그 안에서도 무감각하게 평온을 유지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어느 정도로 무감각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이 허구의 질문이라는 게 아니라 이미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끌고 왔다는 실증적 질문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정말 공포스럽죠. 그러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영화가 한 역사적 사례를 끌고 온 것이라면, 우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외의 다른 사례 또한 떠올릴 수 있고 동시에 회스 가족이 아주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순식간에 깨닫고 만다는 것입니다. 당장 이 영화의 감독인 조나단 글레이저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요. 'dehumanization' 을 이야기하며 가자지구의 참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종전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그의 영화가 단지 유대인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어떤 위치에 처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고 유대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권력이 살벌했던 그 현장에서 그런 목소리를 냈던 것이죠.
이 영화가 내내 보여주는 것은 회스 가족의 '무감각'입니다. 비명소리가 들리든 말든, 아무 상관을 안합니다. 오죽하면 헤트비히의 어머니도 어느날 창밖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바로 떠나버립니다. 그 정도로 회스 가족은 엄청나게 무감각해져있습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무감각한 사람의 위치에 우리가 가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조금만 돌아보면 이런 사례는 차고 넘쳐서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대학교나 다른 건물의 청소노동자들이 휴게실도 없이, 형편없는 시급을 받고 일할 때 같은 학교의 학생들이 그냥 그걸 지나친다면? 혹은 시위로 시끄럽게 하면서 우리의 공부할 권리를 침해했다고 고소한다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것이 아주 거대한 악이 아니라 21세기의 우리에게 이미 자리잡은 하나의 생활양식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게 그냥 아주아주 부잣집이나 판검사 의사 교수 이런 특수한 계층의 귀족적 오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대한민국은 노동자가 엄청나게 많이 죽는 나라입니다. 일을 하다가 눈이 멀거나 백혈병에 걸리거나 불타죽거나 떨어져 죽습니다. 노동자가 죽었다고 일부 언론에서 대서특필을 하고 밀착취재를 해도 그게 별 관심을 끌지는 못합니다. 대한민국은 노인들이 자살을 엄청나게 많이 하는 나라죠. 폐업한 여관에서 백골이 된 노인의 시체가 나와도 거기에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여자들이 엄청나게 살인과 강간과 각종 추행을 많이 당하는 나라죠. 텔레그램에서 딥페이크로 사진을 합성해서 능욕하고 때론 피해자를 협박하기도 하면서 다같이 낄낄대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2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이냐면 처음도 아니죠. 소라넷은 회원 수가 100만명이었고 엔번방도 26만이었습니다. 계속해서 nn만명대 회원수가 집계되는 전국적, 대규모의 여성대상 사이버테러가 감행되고 있죠. 그러면 이런 사실에 우리는 다 반응을 하는가? 공감대를 형성하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죠.
이런 질문에 늘 딸려오는 어떤 반문들이 있죠. 세상 모든 문제에 다 신경을 쓰고 해결하려고 해야하는가? 어떻게 매번 화를 내고 슬퍼만 하면서 살 수 있는가? 당연히 모든 시민이 모든 타인을 다 신경쓰고 도우며 살아갈 순 없죠. 저는 개개인이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이 되어야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이 영화를 찍은 [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찍었던 조나단 글레이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평온'에 더 집중할 때, 그것은 그 자체로 다른 세계의 타인에 대한 외면이 되고 마는 현상 자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무감각해져도 되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가 세상 모두를 구할 수 있나요? 라는 반문을 하는 것은 무감각함에 대한 질문을 대답하지 않으려 하거나 사회적 무감각과 그에 따른 외면이 당연한 것처럼 대답하는 것이라는 의구심을 품게 되죠. 실제로 나치 군인들이나 공무원들도 죄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라에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라고.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놀라는 것은 뚜렷한 악의나 악마적 태도가 아니라, 비명소리에 완전히 적응한 채로 계속 무감각하게 자신의 행복에만 집중하는 회스 가족의 모습 때문이죠.
'나'의 행복에 전념하는 게 뭐가 나쁜가요? 아마도 헤트비히 회스는 현시대의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할 지도 모릅니다. '나는 딱히 유대인을 죽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어떤 유대인들에게는 일자리를 주고 그들과 정원에서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나누곤 했어요.' 이 질문에 당신 말이 맞다고 면죄부를 줄 관객들은 거의 없겠죠. 그러니까 여기에는 우리가 민족이 아니라 인간의 개념을 더 끌고와서 반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같은 인간들이 죽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들리는데도 그게 아무렇지 않았냐고. 그러니까 인간 대 인간으로서 고통에 얼마나 직면하고 또 그걸 무감각하게 넘기고 있지 않은지, 우리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죠. 회스 가족은 '우리 가족의 평화'를 위해 애쓰고 '소비와 여가'에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21세기 자본주의 한국에, 혹은 다른 나라에 그대로 가지고 올 때 어느 순간 우리는 회스 부부의 단란한 한 때를 그대로 연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장면을 곱씹게 됩니다. 왜 루돌프 회스가 딸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때, 영화는 열적외선 카메라로 회백색의 세계에서 어떤 소녀가 사과를 숨겨놓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인지. 빛이 있는 화면과 빛이 보이지 않는 화면, 동화 속 허구와 동화적 현실, 우리 가족을 위하는 것과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하는 것... 영화는 어떤 사람이 유대인들을 위해 음식을 숨겨놓았던 역사적 현실을 마치 믿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찍어놨습니다. 열적외선 카메라는 그냥 시각적으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걸 찍고자 할 때 동원하는 도구입니다. 이 영화에서 시각적 정보는 제한되어있습니다. 만약 그 장면의 인간의 온기를 탐지해내고자 했던 장면이라면 우리는 보이는 것 외에도 다른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누군가 어떤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한다는 '온기'를 믿어야할지도 모릅니다.
@ 루돌프가 토하고 현재의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박물관 장면부터만 보게 되어서 별달리 쓸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2024.08.30 17:02
2024.08.30 17:57
2024.08.30 17:03
https://theqoo.net/movie/3279353183
개봉 직후 이 영화에 대해 정리된 정보글로는 이 타래가 매우 유용했습니다.
2024.08.30 18:06
2024.08.30 17:50
집에서 일하던 여자들은 인근 주민이라고 봤습니다. 이유는 위에 hermes 님이 적어 주셨네요. 속옷 종류를 나누어 갖는 모습들이 유대인으로 보여지진 않았어요. 어쨌든 점령군 장교집이고, 태워버릴 수도 있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여주인 밑에서 일하므로 긴장과 두려움은 컸겠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비평가들의 어려운 표현 없어도 이 영화를 통해 생각해 볼 거리를 잘 짚으신 글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시각과 청각을 다룬 입장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시각의 즉각성과 노골성에 비해 청각이라는 감각은 간접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청각은 실체가 확실하지 않아서 좀더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감각 같아요. 소장 부부의 세계는 시각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밤이 두렵고요. 소장이 자기 전에 온 집을 돌아다니며 문단속을 하는 장면이 두 번인가 되풀이 되는데 저는 이 부분을 아주 인상적으로 봤어요. 이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은 정말 쨍하거든요. 햇빛이 과하게 내리쬐는 낮이 위주가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밤이 오면 이들은 고립되어 보이고 외부를 두려워하고 자녀 중 어린 딸은 잠을 못 들어서 애먹어요. 시야를 뺏기니 그런가 했어요. 그리고 밤은 힘없는 것들의 시간이기도 하잖아요. 이런 표현은 아주 문학적이기도 한데 문학이 상상의 힘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맞아요, 그러합니다. 모든 상상의 힘이 활개치는 밤에, 맨눈에는 보이지 않는 소녀의 활약이 있습니다.
시각의 즉각적이며 붉은꽃으로 표현되는 노골적이고, 뭔가 너무나 들이대는 일상 세계와 달리 청각의 감각은 귀를 기울이고 해석해야 하는 세계인 것 같아요. 저거 무슨 소리지? 들을 귀가 있어야 들리는 거라고나 할지. 사택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소장네의 일상의 배경음일 뿐 이들의 내면에 들어오지는 않는 것인데 밤에 음식을 숨기던 소녀에게는 확실하게 들리는 소리이며 소녀는 또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죠. 소리를 잘 듣고 상상하고 해석하는 귀를 가졌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금 비유적인 표현이 되었지만 이런 영화를 보면, 지금을 살고 있는 나 역시 귀를 기울여 상상하는 힘을 잃지 말기를 바라게 됩니다.
2024.08.30 18:22
2024.08.30 21:57
2024.08.30 22:10
2024.08.31 09:04
그래서 다시 한번 보려고 합니다. 졸았던 게 너무 아쉽습니다 ㅠ
회스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유대인인지 여부에 대해 갑론을박이 많은데,
각본에 따르면 일단 회스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은 독일인 가정부(언뜻 보더라도 어린 하녀들과 태도가 다릅니다)와 인근 마을에 거주하던 폴란드인 하녀라고 합니다. (수용소에서 유대인들로부터 빼앗은 옷들을 회스 아내가 먼저 가져가고 남은 옷가지들을 하녀들에게 던져주는데 독일인 가정부들이 당연히 먼저 이를 챙기고, 남는 옷들을 어린 폴란드인 하녀들이 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