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일하고 있는 영화사 블로그에서 연재 중인 '빛결의 영화 이야기'에서 가져왔어요. 원본 링크는 여기에요. https://blog.naver.com/kimuchangmovie/222851900760)

197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자 1977년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수상작인 조셉 로지의 <고독한 추적>(1976)은 반드시 재평가되어 지금보다 더 많이 회자되어야 할 뛰어난 작품이다. 조셉 로지 감독과 이 영화의 제작과 주연을 겸한 알랭 들롱 모두 <고독한 추적>에서 그들의 경력 중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 영화의 걸작들인 마르셀 카르네의 <안개 낀 부두>(1938), <북 호텔>(1938), <천국의 아이들>(1945)의 미술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트로네가 <고독한 추적>의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참여하여 비시 정권 하의 음울한 파리의 분위기를 탁월하게 구현하고 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되는 주인공을 통해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참신한 방식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1942년 나치 점령기의 파리,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알랭 들롱)은 나치를 피해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유대인들의 고가의 미술품들을 헐값에 사들여 풍족한 삶을 누린다. 어느 날 한 유대인의 미술품을 구입하고 난 직후 그는 유대인들에게만 배달되는 신문이 그의 집 문 앞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의 집에 신문이 배달된 경위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로베르는 그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또 다른 로베르 클라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비시 정부는 로베르 클라인을 유대인으로 의심하고 점점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로베르는 스스로 유대인이 아님을 입증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출생증명서를 기다리는 동시에 또 다른 로베르 클라인을 집요하게 추적하게 된다.

<고독한 추적>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인데 홀로코스트와 관련이 깊다. 나치 정권에 의해 핍박받고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비극이 이 영화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거대한 경기장에 집합시킨 뒤에 기차에 탑승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기차는 아우슈비츠를 향하는 듯하다. 이렇게 <고독한 추적>은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지만 역사적 사건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면서 사실주의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역사적인 현실에 장르적인 상상력을 결합시켜 놀라운 통찰을 이끌어낸다. 로베르 클라인이 또 다른 로베르 클라인을 추적한다는 서사 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미스테리 범죄 스릴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빛과 그림자를 활용하는 시각적인 스타일이나 일종의 팜므 파탈로 볼 수 있는 여성이 등장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필름 누아르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서사의 축으로 전개된다. 한가지 서사는 비시 정부에서 치밀하게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려는 계획들을 이행하는 과정이 스케치 형식으로 영화의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또 다른 서사가 핵심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로베르 클라인이 유대인으로 의심을 받는 가운데 또 다른 로베르 클라인을 찾아내어 스스로 유대인이 아님을 입증하려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독한 추적>은 이 두 개의 서사가 영화의 엔딩에 가면 서로 만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서 이 영화의 주제는 이미 드러난다. 오프닝에서 한 남성 의사가 한 여성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그녀의 신체 구조를 바탕으로 그녀가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과학적 판단에 의거하여 유대인을 판별해내는 방식이다. 그런데 <고독한 추적>은 이후에 나오는 장면들을 통해 이러한 합리성에 의거한 판단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영화는 로베르 클라인이 한 유대인과 미술품 거래를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로베르 클라인은 그의 얼굴을 보여주는 바스트 쇼트를 통해서 처음 소개된다. 이렇게 조셉 로지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두 개의 얼굴을 나란히 제시한다. 한 유대인 여성의 얼굴과 로베르 클라인의 얼굴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로베르 클라인의 정체성이 점점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얼굴을 해체시킨다. 이를 통해 로베르 클라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영화의 오프닝과 연결될 수 있다.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로베르 클라인을 통해 과학적 근거만으로 유대인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허구성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어떤 기준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가 자행한 유대인 말살 정책은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이었는데 아리안족이 유대인보다 더 우월하다는 전제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고독한 추적>의 서사는 폭로하고 있다. 합리성을 근거로 내세워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전체주의 사회의 폭력이다. <고독한 추적>은 로베르 클라인이 유대인으로 의심을 받으면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상황을 통해 놀라운 방식으로 홀로코스트의 부당함을 지적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조셉 로지의 전기적 사실과도 관련되는 부분이 있다. 조셉 로지는 할리우드에서 매카시즘 열풍이 불 당시에 공산주의자로 판명되어 미국을 떠난 전력이 있는데 그 스스로가 <고독한 추적>에서 유대인으로 의심을 받으면서 궁지에 몰리는 로베르 클라인과 닮아있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고독한 추적>은 한 인물이 갑자기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부조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로 인해 실존을 위협받게 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그렇게 볼 때 이 영화를 카프카적인 스릴러라고 볼 수 있을텐데 이 영화와 유사한 작품으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를 떠올려 볼 수 있으며 이 두 편의 영화를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인터뷰에서 <북북서로...>를 카프카적인 영화라고 말한 바 있다. <고독한 추적>에서 로베르 클라인이 또 다른 로베르 클라인 때문에 유대인으로 오인되어 위기에 처하는 것과 유사하게 <북북서로...>에서는 로저 손힐(캐리 그랜트)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인 조지 캐플란으로 오인되어 위기에 처한다. 두 영화에는 상당히 유사한 장면이 있는데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한 인물을 찾는 장면이 그것이다. <북북서로...>의 이 장면에서 웨이터가 조지 캐플란을 부르는 순간에 로저 손힐이 웨이터를 찾는 손동작이 적국 스파이 세력으로부터 그를 조지 캐플란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고독한 추적>에서는 웨이터가 ‘M KLEIN’이라고 써 있는 팻말을 들고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면서 클라인을 찾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로베르 클라인은 친구인 피에르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서 웨이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 장면에서 로베르 클라인은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의 모습을 실제로 확인하고 정체를 밝히고 싶었으나 끝내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은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웨이터의 동선을 따라 핸드 헬드로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점은 흡사 유령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 <북북서로...>의 조지 캐플란은 적국 스파이로부터 미국 스파이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고 <고독한 추적>의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의 경우 뒷모습이 보이거나 그의 모자만 살짝 보이는 정도로 시각화되기는 하지만 영화 내내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게 볼 때 위 두 장면은 영화 속 두 주인공인 로저 손힐과 로베르 클라인을 곤경에 빠뜨리는 유령적인 존재들인 조지 캐플란과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의 부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두 영화에는 로저 손힐과 로베르 클라인이 각각 조지 캐플란과 로베르 클라인이 묵었던 호텔과 아파트를 직접 방문해서 공간의 내부를 살펴보면서 미스터리한 존재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는 장면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이 영화에서 조셉 로지가 생명을 위협받는 유대인들로부터 잇속을 챙기고 그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했던 로베르 클라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다른 2차 대전을 다룬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로지는 로베르 클라인을 유령으로 만들어버린다. 로베르 클라인에게 유대인에게만 제공되는 신문이 배달된 이후 그는 사회 분위기상 탄압을 받고 있던 유대인으로 오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오해를 풀고 그가 유대인이 아님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된다. 로베르 클라인이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이 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을 그의 삶에 연루시켰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어떤 방법으로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을 끌어들였는지는 영화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러가지 정황상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극중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은 반 나치 테러를 실행하는 지하 조직의 일원인 것으로 판명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에서 앞모습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이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과 실제로 닮았으며 닮은 것을 넘어서 거의 그의 분신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두 명은 외모가 거의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여주인의 말을 통해 드러난다. 그녀는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에 대해 알아보려고 아파트를 찾아온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의 뒷모습을 보고 그가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인 것으로 오해한다. 여주인의 말은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경찰들이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을 의심하게 만들고 이때부터 그는 경찰로부터 추적을 받게 된다. 또한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이 살고 있던 집에서 발견된 면도칼은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의 집에 있는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의 애인인 쟈닌(줄리엣 베르토)이 읽고 있던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의 집에서도 발견된다.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이 한 여성과 같이 찍은 사진 속에 있던 셰퍼드는 우연히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을 만났을 때 그를 쫓아오기까지 한다.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은 친구인 피에르(미셸 롱스달)의 도움으로 신분을 ‘로베르 드 기니’로 위조하고 마르세유로 가는 열차에 탔다가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잡고 파리로 다시 돌아온다. 로베르 클라인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이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에게 어떤 매혹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내용들을 종합해본다면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은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의 분신이라고 봐도 무방한 측면이 있다.

본인이 유대인이 아님을 입증하지 못하는 가운데 정체성을 잃어버린 로베르 클라인은 점점 유령이 되어가고 시각적으로도 유령적 존재로 형상화된다. 영화가 시작할 때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은 돈, 명예, 여자 등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그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그의 애인인 쟈닌마저 그를 떠나고 만다. 텅 빈 공간 속에 홀로 고립되어 갇혀있는 듯한 로베르 클라인의 모습은 유령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집을 찾아온 경찰에게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은 그를 ‘로베르 드 기니’라고 소개하지만 묵살당하고 결국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거대 경기장으로 끌려간다. 호명된 사람들이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할 기차에 탑승하는 가운데 ‘로베르 클라인’이라는 이름이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에게 들린다. 마침 이때 그토록 기다렸던 출생 증명서를 들고 피에르가 로베르를 찾아온다. 그런데 로베르에게 이제 더 이상 출생 증명서는 의미가 없다. 그는 끝까지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의 정체를 밝히고자 수많은 인파들에 휩쓸려 결국 기차에 올라타고야 만다. 그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는 기차는 아우슈비츠를 향해 출발한다. 로베르의 뒤에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에게 그림을 팔았던 유대인의 모습이 보인다. 미술품 거래상인 로베르 클라인은 유대인 로베르 클라인과 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이 놀라운 결말은 관객으로 하여금 수많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조건 속에서 형성된 ‘나’인 것인가. 묵직한 존재론적 질문과 함께 로베르 클라인의 기이한 모험의 여정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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