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른 곳에 먼저 올려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지나 롤랜즈를 추모하는 마음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세기의 미남 배우인 알랭 들롱이 타계했다. 향년 88세. 알랭 들롱도 내가 너무 사랑하는 배우라서 지나 롤랜즈에 이어서 추모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이렇게 짧은 시간에 추모글을 연달아 쓰는 건 처음이다.) 알랭 들롱의 대표작들 중에는 세계영화사에 남는 걸작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측면에서 알랭 들롱은 영화의 역사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르네 클레망의 <태양은 가득히>(1960), 루키노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 <레오파드>(1963,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한밤의 암살자)>(1967), <암흑가의 세 사람>(1970), <형사>(1972),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태양은 외로워)>(1962), 조셉 로지의 <미스터 클라인(고독한 추적)>(1976, 세자르 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수상작), 장 뤽 고다르의 <누벨바그>(1990)… 알랭 들롱을 단번에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그의 출세작인 <태양은 가득히>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다면 소위 시네필들 사이에서는 그가 비스콘티, 멜빌, 안토니오니 등과 함께 작업한 작품들이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유럽 예술영화, 당대에 히트친 범죄 오락 영화에 이르기까지 알랭 들롱은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면서 프랑스를 상징하는 대표 배우로 수많은 영화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추모글을 쓰면서 배우로서의 알랭 들롱의 매력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려고 하니 많은 것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알랭 들롱이 영화사에서 전설의 아이콘으로서 얼마나 상징적인 존재였는지를 반증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알랭 들롱'이라는 이름이 주는 존재감이 이미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한번 그의 매력을 따져본다면 역시 영화 사상 가장 잘생긴 배우라는 찬사를 받게 만든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매력의 으뜸으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의 아우라로만 판단해볼 때 영화사에서 알랭 들롱을 능가하는 배우가 과연 존재했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얼굴이 뿜어내는 영화적인 힘은 압도적이다. 알랭 들롱의 얼굴은 단순히 잘생긴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그의 얼굴이 잘생긴 것 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과 같이 세기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그의 얼굴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고독하고 우수에 찬 이미지이다가도 살짝 미소를 머금으면 이내 개구쟁이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요컨대 그의 얼굴은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많은 감독들이 신비한 들롱의 얼굴을 어떻게 각자의 영화 세계 속에 잘 녹여내어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실험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우리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들롱의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들롱의 얼굴은 관객으로 하여금 마냥 몰입하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한편으로 일정 부분 거리를 두게 만든다. 관객은 들롱의 얼굴을 보면서 동화와 이화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표류한다. 이걸 바꿔 말하면 동화와 이화 사이에서 탁월한 균형 감각을 발휘하는 얼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볼 때 이 점이 들롱의 얼굴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측면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들롱이 다양한 성향과 스타일을 가진 감독들과 함께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모호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종일관 건조하고 권태로운 무드로 일관하는 <일식>에 들롱의 잘생긴 얼굴이 어떤 이질감도 없이 제대로 흡수되는 것을 떠올려보면 좋을 듯 싶다. 

들롱의 얼굴의 아우라를 바탕으로 내가 좋아하는 알랭 들롱의 출연작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태양은 가득히>에서 등장하는 알랭 들롱의 눈빛은 언제 보아도 단번에 그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지만 내가 알랭 들롱에게 가장 매혹되었던 두 편의 영화는 <사무라이>와 <미스터 클라인>이다. <사무라이>는 장 피에르 멜빌의 대표작이자 알랭 들롱의 대표작이며 프렌치 누아르를 정점에 올려놓은 걸작이다. 이 영화는 프렌치 무드를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으며 이후로 오우삼, 두기봉, 마이클 만, 짐 자무쉬 등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는 '알랭 들롱 = <사무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알랭 들롱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제프 코스텔로 역으로 알랭 들롱 이외에 그 누구도 떠올릴 수 없다. 대체 불가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멜빌만큼 알랭 들롱의 이미지를 잘 사용한 감독은 없을 것이다. 초절정의 무드를 구현해낸 멜빌의 연출력도 탁월하지만 알랭 들롱의 캐스팅만으로 이미 이 영화는 걸작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무라이>에서의 들롱의 존재감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사무라이>는 얼굴(중절모를 우아하게 쓰는 모습)에서 시작해서 얼굴(발레리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들롱의 얼굴이 다 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제프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고 말수도 적지만 들롱의 얼굴은 영화 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모든 것들을 설득해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프가 발레리와 시선을 주고 받다가 결국 비극을 맞이한 채 모호한 상황 속에서 영화가 끝남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깊은 여운에 사로잡혀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는 것도 들롱의 얼굴 때문이다. 

들롱이 제작자로도 참여한 <미스터 클라인>은 <사무라이>에서의 들롱의 이미지를 활용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상대적으로 들롱의 다른 출연작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나 거장 조셉 로지의 훌륭한 연출력과 함께 들롱이 최고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영화에서 들롱은 2차 대전 시기에 프랑스를 탈출하려는 유대인들의 미술품을 싼 값에 사들여 이익을 취하는 미술상인 로베르 클라인 역으로 출연하는데 갑자기 그에게 유대인 신문이 배달된 이후로 유대인으로 의심받으면서 곤경에 빠진다. 로베르는 스스로 유대인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영화의 초반에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로베르의 상태를 반영한 듯한 그의 잘생긴 얼굴은 후반부로 갈수록 모호함이 가득한 유령적 형상으로 변해간다. 이 영화에서 로베르는 <사무라이>에서와 유사한 중절모를 자주 쓴다. 로베르가 중절모를 쓸 때마다 그에게서 영락없는 제프의 모습이 나타난다. <사무라이>때보다 나이가 좀 더 들었을 뿐이다. <사무라이>에서 제프는 유령적 존재이다. 그는 주로 밤에 활동하며 홀로 고립된 채 지낸다.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실제로 킬러로서 그는 알리바이를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무표정하고 기계적으로만 움직이는 그에게 인간미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물리적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프는 유령과 다를 바 없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미스터 클라인>은 로베르가 점점 제프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미스터 클라인>에 알랭 들롱이 제작자로 참여한 것은 이 영화가 얼굴에 관한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들롱 자신도 그의 연기 경력 안에서 그의 얼굴에 대한 중요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로베르의 진짜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이 영화는 들롱의 얼굴에 관해 메타적 관점에서 탐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유튜브에서 알랭 들롱이 그의 경력 초기에 했던 인터뷰를 보았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그는 처음에 이브 알레그레의 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굳이 연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브 알레그레의 정성에 감복해서 연기를 하게 됐는데 2주만에 카메라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르네 클레망, 루키노 비스콘티 등 감독들에게 큰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고 특히 르네 클레망은 그에게 연기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준 연기 스승이라고 말한다. 이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연기에 대해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알랭 들롱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이브 알레그레가 들롱을 설득하지 못했다면 세계영화사가 얼마나 빈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브 알레그레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생겼다. 알랭 들롱이 국내에 내한한 적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는데 그때 들롱을 실제로 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다. 조만간 알랭 들롱 추모전이 열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마침 이번 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들롱의 출연작인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1969)을 상영한다고 하니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를 추모하고 싶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배우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알랭 들롱을 추모하는 의미로 내가 썼던 <미스터 클라인>에 관한 글을 회원 리뷰에 올린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http://www.djuna.kr/xe/breview/1433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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