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일하고 있는 영화사 블로그에서 연재 중인 '빛결의 영화 이야기'에서 가져왔어요. 원본 링크는 여기에요. https://m.blog.naver.com/kimuchangmovie/222755375811)

1978년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인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1977)는 무대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 최고의 영화 중의 한 편이다. 이 영화는 이후로 나온 영화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그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서 스타 배우를 만나러 갔던 팬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에피소드를 <오프닝 나이트>에서 그대로 가져와 사용함으로써 이 영화에 존경을 바친 바 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2014)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2019)도 <오프닝 나이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클라우즈..>를 연출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실제로 카사베츠를 좋아하고 극 중 마리아(줄리엣 비노쉬)가 연극 속 배역과 자아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설정은 <오프닝 나이트>에서 그대로 가져왔다도 해도 무방하다. <오프닝 나이트>에서 그녀의 연기 경력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는 지나 롤랜즈의 신들린 듯한 퍼포먼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머틀 고든(지나 롤랜즈)은 유명한 스타 배우이다. 그녀는 'The Second Woman'이라는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생 일대 최고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녀의 열광적인 팬이 우발적인 사고로 죽고, 그녀가 사랑하는 동료 배우인 모리스(존 카사베츠 분)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그녀는 'The Second Woman'에서 그녀가 맡은 버지니아라는 캐릭터와 현실의 그녀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며 혼란에 빠져든다. 
<오프닝 나이트>는 존 카사베츠가 스스로 자신의 영화 세계에 대해 논평을 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공연되는 'The Second Woman'을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연출되는 한 편의 영화라고 가정한다면 그 의미는 명확해진다. 카사베츠의 말에 따르면, 그는 헐리우드 영화가 지니고 있는 인위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영화를 통해 가공되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현실'은 스스로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탐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많은 고전 헐리우드 영화들처럼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답을 가지고 있는 영화들이 아니다.
극 중 머틀은 연극 ‘The Second Woman’의 작가인 사라 구드와 마찰을 빚는다. 그녀는 버지니아를 그녀가 해석한대로 연기해야 한다고 하고 사라는 원래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려고 한다.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만취한 머틀이 극중 버지니아를 즉흥적으로 연기하면서(버지니아가 곧 머틀이 되는 경지에서) 연극을 대단한 성공으로 이끌고 막을 내리게 된다. 만취한 머틀은 그런 몸 상태로는 버지니아를 각본대로 연기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새로운 '버지니아'를 창조해야 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더욱 그녀의 삶에 가까운 것이었다. 카사베츠는 이 연극으로 따지자면 자신의 영화들에서 이미 결정된 '버지니아'가 아닌 규정되지 않고 휘청거리는 만취한 머틀의 모습을 통해 극 속에서 실제 삶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오프닝 나이트>를 카사베츠의 영화 세계에 대한 논평으로 읽을 수 있는 근거는 더 있다. 카사베츠는 이 영화에서 연극이 끝나고 작가와 대화하는 관객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공연(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뉴욕 오프닝 전의 공연)에서 머틀은 점점 버지니아라는 캐릭터를 거부하면서(혹은 현실이 연극을 잠식하면서) 즉흥적으로 연기한다. 이 연극을 본 관객들은 '재미있다', '진지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형편없다'는 혹평을 하기도 한다. 즉흥성이 강조된 이 연극의 반응처럼, 즉흥성을 추구한 카사베츠의 영화들은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극 중 관객과의 반응을 통해 현실에서의 카사베츠의 영화에 대한 반응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사베츠는 영화의 마지막인 뉴욕에서 열린 '오프닝 나이트'에 자신의 영화 세계에 대한 긍정, 삶에 대한 긍정, 자신감을 표현한다. 이 작품에서 나타난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긍정, 자부심은 적어도 몇몇 관객들에게는 큰 감동을 주었고 타당해 보였다. 카사베츠는 영화에서의 뉴욕 개막 공연이 '자신의 영화'와 등가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와 절친한 동료 배우인 피터 포크, 세이무어 카셀과 영화 감독이자 평론가인 피터 보그다노비치를 실제로 등장시킨다.(피터 포크는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에서 남자 주인공역을 맡은 것을 비롯해서 그의 많은 작품에 출연했으며 세이무어 카셀은 카사베츠의 <얼굴들>(1968)과 <별난 인연>(1971)에 출연하였고 <그림자들>(1958)에서 associate producer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2시간 20분이 넘는 영화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연극을 축하하러온 관객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카사베츠가 <오프닝 나이트>에서 자신의 영화에 대해 논평하지 않으려 했다면 굳이 이들이 영화 막판에 등장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은 극 중에서 실제로 서로 아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으며 피터 보그다노비치와 대화하는 머틀역의 지나 롤랜즈는 영화 속 인물이 아닌 실제의 모습으로 보그다노비치와 대화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 속에서 연극의 연출자로 보이는 지미(벤 가자라 분)의 아내인 도로시의 변화가 가장 눈여겨볼 만하다. 그녀는 작품에서 정확하게 설명되고 있지는 않으나 지미와의 부부 생활이 소원한 상태에 있으며 머틀과 지미 사이의 관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머틀과의 관계가 좋을 리가 없다. 그녀는 영화 내내 별 대사도 없이 연극의 리허설 현장을 지켜보고 뉴욕 무대에서는 관객으로 등장한다. 카사베츠는 이 작품에서 도로시에게 지미의 아내인 동시에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 혹은 관찰자의 역할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만취한 머틀이 즉흥적으로 훌륭하게 연기를 해서 연극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도로시는 다른 관객들과 함께 기립 박수를 친다. 그리고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머틀에게 와서 그녀와 포옹하면서 이렇게 외친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연극이었어요!" 이것은 극중 머틀에 대한 도로시의 화해의 제스처인 동시에 카사베츠의 영화에 대한 관객으로서의 도로시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실패라고 생각해서 밖으로 나갔던 제작자도 믿을 수 없는 관객들의 반응에 놀라서 다시 공연장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 연극은 실패이기는 커녕 관객들을 감동시킨 위대한 공연이 된다. <오프닝 나이트>에는 카사베츠의 다른 작품들처럼 그의 실제 아내인 지나 롤랜즈를 비롯해서 그의 실제 어머니, 지나 롤랜즈의 어머니 등 그의 실제 가족들이 대거 출연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이 영화를 카사베츠의 자전적인 특성과 떼어서 생각하기 힘들게 만드는 측면을 제공한다. 이렇게 카사베츠는 <오프닝 나이트>를 통해 그와 그동안 함께 해왔던 가족과 동료들과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해 자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카사베츠는 <오프닝 나이트>에서 그의 영화가 그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해지지 않은 유동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자신의 가족들을 비롯한 그의 영화의 동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웅변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변화될 수 있는 한 명의 관객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계속 영화를 만들었노라고 외치는 듯하다. 이러한 카사베츠 본인의 예술 세계에 대한 자부심과 긍정은 이후로 나온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우리가 카사베츠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을 발견하게 될 때마다 깊은 감동을 준다. 카사베츠의 유산이 빛을 발한 최근의 사례로는 올해 <드라이브 마이 카>(2021)로 오스카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가 대표적일 것이다. 존 카사베츠는 우리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진정한 일상의 예술가였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3867
788 [영화] 레스파티 Malam Pencabut Nyawa (2024), 포제션 Possession: Kerasukan- 부천영화제 (2024) [1] Q 2024.08.30 109
787 [영화] (알랭 들롱 추모) 조셉 로지의 <고독한 추적(미스터 클라인)>(1976) - 유령론으로 풀어낸 탁월한 홀로코스트 영화 crumley 2024.08.22 126
» [영화] (지나 롤랜즈 추모)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1977) - 자신의 영화 세계에 대한 카사베츠의 논평 혹은 예술과 삶에 대한 찬가 crumley 2024.08.19 82
785 [소설] 매튜(매슈) 스커더 - 양조위 - 아버지들의 죄 - 성스러운 술집이 문 닫을 때 [4] oldies 2024.07.30 174
784 [영화] 언데드 다루는 법 Handling the Undead (2023), 뻐꾹! Cuckoo! (2024)- 부천영화제 [1] Q 2024.07.20 210
783 [영화] 러브 라이즈 블리딩 Love Lies Bleeding (2024)- 부천영화제 [4] Q 2024.07.08 316
782 [영화] 오펜하이머 Oppenheimer (2023)- 4K UHD Blu Ray [1] Q 2024.05.27 963
781 [영화]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1955)-영화와 신학이 만난 최고의 경지 crumley 2024.03.26 775
780 [영화] 2023년 최고의 블루레이-4K UHD 스무편 Q 2024.02.29 1134
779 [드라마] 연모 감동 2024.02.11 972
778 [영화] 알프레드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무의미로 향하는 첩보 스릴러 [2] crumley 2024.02.01 987
777 [영화]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1960)-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모던 호러의 걸작 crumley 2024.02.01 900
776 [영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명>(1946)-당신의 마음이 마침내 나에게 닿기까지 crumley 2024.02.01 881
775 [영화]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1954)-관음증을 통해 ‘영화’를 탐구한 걸작 crumley 2024.01.27 912
774 [영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영화’라는 유령에 홀린 한 남자의 이야기 crumley 2024.01.27 940
773 [영화] 고지라 마이너스 원 ゴジラ-1.0 (2023) [2] Q 2023.12.10 1516
772 [드라마] 악귀 감동 2023.10.29 1039
771 [드라마] 싸인 감동 2023.09.05 981
770 [영화] 독친 Toxic Parents (2023)- 이공삼오 2035 (2023) <부천영화제> [2] Q 2023.08.31 1210
769 [드라마] 달의연인-보보경심 려 [2] 감동 2023.08.28 102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