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날입니다

2024.08.18 19:25

oldies 조회 수:175

백중날이란 무엇인가?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이수현의 소설 『서울에 수호신이 있었을 때』에서 한 대목 옮겨 봅니다.


"어, 왔느냐."

서낭신들이 은지의 손에 들린 술병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곧 망혼일亡魂日이로구나."
"망혼일은 뭐였죠?

강은지가 처음 듣는 것도 당연했다. 망혼일이란 백중百中날의 다른 이름이었으나, 이제는 백중이 무엇을 하는 날인지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망혼일은 조상의 혼을 위로하는 날이라 하여 머슴도 쉬게 했다고 한다. 모두가 새로 난 과일과 곡식을 차려 혼을 위로하거니와,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는 망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불교 사원에서 따로 천도재를 지내거나 나라에서 챙겨 주기도 했다. 요컨대, 온갖 귀신이 다 모여드는 날이었다.

"와, 백중이요? 교과서에서 보긴 봤는데, 그런 날인 줄은 몰랐네요. 핼러윈 비슷하네."

핼러윈이라는 말에 서낭신들이 일제히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수입산 명절은 챙기면서 망혼일은 다 잊어버리고, 잘들 하는 짓이다."

백중 또는 망혼일은 음력 7월 15일이었고, 때문에 음력 칠월은 귀신의 달, 혼란 속에서 평범한 세상과 귀신들의 세상을 가르는 울타리가 더 낮아지는 시기이니, 평소보다 더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위험한 일을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게 서낭신들의 말이었다.

"아가, 너도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거라."
"안 그래도 한여름이라 어디 돌아다닐 생각도 안 들어요."


실은 이번에 백중을 맞이하여 제가 작년에 가장 즐겁게 읽었던 이 소설을 다시 읽고 감상문도 올리고 싶었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손은 느리고 머리는 게으른 탓에 감상문은커녕 책도 다 읽지 못했네요. 일단은 이렇게나마 기념하고 싶었어요.

(서낭신들이 백중은 잊고 핼러윈 챙긴다고 투덜거리는 걸 보고 오해하실 법도 합니다만, 신토불이만 부르짖으며 '요즘 젊은 것들은' 하는 꼰대 소설은 전혀 아닙니다.)

이미 잊히다시피 한 전통을 억지로 되살리려 한다고 해서 되살려지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럴 필요가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할로윈이 한국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을 분명 기억하는 한편 이제는 할로윈 시즌이 되면 영미권의 호러 팬들과 어울려 닥치는 대로 호러 영화를 보면서 Shocktober라는 별명까지 붙은 10월을 축제처럼 보내는 한 사람의 호러 애호가로서, 백중 무렵이면 어쩔 수 없이 미안한 감정을(누구에게?)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해 가며 제사상을 차리거나 가족들을 억지로 한 자리에 불러 모으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방구석에서 혼자 '와, 오늘 백중이네!' 하면서 어울리는 호러 소설/영화 한 편쯤 보고 즐기는 건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납량納涼 특집이라는 말도 있는 만큼 한국에서는 할로윈이 있는 가을보다는 여름이야말로 명실상부 호러의 계절이기도 하고요.

애석하지만 오늘 밤에도 미리 가족과 함께 보기로 약조한 영화가 있어서 그 소박한 결심조차 지키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만, 누구보다도 저 자신을 위해 이렇게라도 짚어 두고 싶었어요.

저녁으로는 콩국수를 먹었어요. 집에서 해 먹은 건 올해 들어 처음인데, 그동안 왜 안 했지 싶을 정도로 맛있었네요. 식사 아직 안 하신 분들은 더위를 잊을 만큼 기분 좋은 식사 하시고, 이미 식사 하신 분들은 한낮의 열기에서 벗어나 서늘한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888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780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8342
127005 김기영감독의 이어도를 훑어보고(...) 상수 2024.08.18 132
127004 그 전설의 괴작 [하우스]를 봤습니다 [13] Sonny 2024.08.18 420
127003 플라톤의 대화편에 대해 catgotmy 2024.08.18 86
127002 프레임드 #891 [4] Lunagazer 2024.08.18 54
» 백중날입니다 [4] oldies 2024.08.18 175
127000 바낭 - i can (not) control...? 상수 2024.08.18 64
126999 알랭 들롱 사망 [10] daviddain 2024.08.18 506
126998 좀 됐지만 [파묘]에 대한 이야기 Sonny 2024.08.18 296
126997 [EIDF] 2024 EBS국제다큐영화제 [4] underground 2024.08.18 242
126996 잡담 - 여름노래 이야기(신화의 으샤으샤(?!)를 오랜만에 들으면서), 지금 이 순간의 만족과 후회, 가을이 오면 상수 2024.08.17 113
126995 [넷플릭스바낭] 한국산 SF란 쉽지가 않네요. '원더랜드' 잡담입니다 [12] 로이배티 2024.08.17 522
126994 프레임드 #890 [4] Lunagazer 2024.08.17 65
126993 [넷플릭스] 더 인플루언서, 뒤로 갈수록.... [1] S.S.S. 2024.08.17 322
126992 이런저런 잡담...(스케처스) 여은성 2024.08.17 152
126991 피네간의 경야 18p catgotmy 2024.08.17 66
126990 이강인 골 daviddain 2024.08.17 108
126989 (스포) [트위스터즈] 보고 왔습니다 [2] Sonny 2024.08.17 306
126988 영화 <괴인> 후기 [9] 첫눈 2024.08.17 311
126987 SF장르 이야기들의 근본적인 문제점... (에일리언, 건담) [5] 여은성 2024.08.17 405
126986 [넷플릭스바낭] 소니 스파이더버스의 미래는... '마담 웹' 잡담입니다 [12] 로이배티 2024.08.17 31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