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X소녀 (2007)

2016.09.21 20:48

DJUNA 조회 수:5509


박동훈의 [소녀X소녀]는 [에이틴]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만들어진 네 편의 영화 중 하나입니다. 다른 세 편은 [펀치 스트라이크],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램프의 요정]이었죠. 모두 CGV 채널에서 만든 고등학교 배경의 소품이었는데, 그 중 가장 재미있었던 [소녀 x 소녀]는 CGV 체인 상영관에서 잠시 걸리기도 했습니다. 2007년에 개봉된 영화이니 한국 영화가 막 디지털 세계로 걸음을 옮기던 시절의 작품이었죠. 당시엔 이런 것들을 HD 영화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죠.

이야기는 당시에 유행했던 인터넷 소설스럽습니다. 학교 깡패인 세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꽃미남 기찬을 짝사랑합니다. 하지만 기찬이 전교 2등인 윤미를 좋아하는 티를 내자 세리는 윤미에게 공부를 가르쳐달라며 접근해서 자기와 같은 날라리로 만들려고 합니다. 모범생, 불량소녀, 학교 꽃미남. 모두 극단적으로 유형화된 인물들이며 그만큼이나 캐리커쳐화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말려든 사건들도 마찬가지죠.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인터넷 소설 원작의 영화들과 [소녀X소녀]의 차이점은 오리지널리티에 있습니다. [소녀X소녀]는 짝퉁입니다. 원작 같은 건 당연히 없고 패스티시를 넘어 패러디에 가깝죠. 멀쩡한 정신에 멀쩡한 유머 감각을 가진 성인들이 인터넷 소설의 과장된 이야기를 흉내내는데, 자기네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리지널들과는 달리 이 영화의 유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적입니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건 성역할에 있습니다. 이들 캐릭터들이 전형적이긴 하지만 고정된 이성애 연애담의 성역할엔 맞지 않지요. 학교 일진 역할은 여자아이가 하고 있고 남자를 가운데에 둔 이성애 삼각관계로 시작된 이야기는 중간에 남자아이를 치워버리고 두 여자아이의 이야기가 됩니다. 심지어 나중에 삼각관계가 재구축될 때에도 남자아이는 은근슬쩍 빠져 있죠. 동성애라는 단어를 굳이 꺼내지는 않지만 할 건 다 한다는 점에서 [소녀X소녀]는 [여고괴담] 시리즈와 많이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역할을 바꾸고 관계설정을 고치니까 이야기와 캐릭터가 상당히 재미있어집니다. 얼핏보면 세리는 전형적인 일진 남자주인공을 여자로 바꾼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작업의 결과물이 그렇게 완벽하게 거울대칭일 수는 없는 거죠. 같은 대사와 행동을 하더라도 여자아이들은 전혀 다르게 보이니까요. 중간에 이성애의 틀이 깨지자 이들의 행동은 보다 입체적이고 재미있어집니다. 이런 부류의 이야기에서 이상할 정도로 당연시되었던 심리적 폭력이나 비굴함도 없습니다. 사실 육체적 폭력도 거의 생략되어 있죠. 일진 캐릭터를 엄청나게 귀엽게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일진스러움이나 폭력의 미화는 최대한 억제하려 하고 있고요. 여기선 성역할의 전환만큼 유머가 큰 역할을 합니다. 유치해보지만 의외로 성숙한 영화예요.

세리 역의 곽지민과 윤미 역의 임성언 모두 참 귀엽고 매력적인데, 이 이후로 이들의 가능성을 제대로 쓴 작품이 거의 나오지 않았죠. 왜 그런지 아직도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소녀X소녀]는 재미있는 영화지만 이 작품이 경력의 피크라면 좀 아쉽지 않습니까. (16/09/21)

★★★

기타등등
CJ 계열의 방송사 여기저기에서 한동안 자주 틀어주던 영화인데 요샌 뜸하고, 제대로 볼 수 있는 다른 경로도 없더군요.


감독: 박동훈, 배우: 임성언, 곽지민, 김광민, 차엽, 민세연, 다른 제목: 에이틴: 소녀X소녀, Girl by Girl

IMDb http://www.imdb.com/title/tt096933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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