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잉여로운 고민으로 글쓰기

2010.11.24 14:26

질문맨 조회 수:2397

 가끔 너무 지쳐서 고민이 없는 삶을 동경해 봅니다. 연인이 생기면 외로움이 사라지는 걸까, 종교를 믿으면 두려움을 잊게 될 수 있을까, 돈이 생기면 갈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일까. 지식이 미래를 알려줄 수 있을까. 전 현재 이 어떤 조건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게 주어진 유일한 깨달음이란 행복의 조건으로 충만한 삶일지라도 어느새 작은 틈이 생기고 벌어져 자칫 방심하는 사이에 자신을 그 나락으로 던져 버릴 수 있게 한다는 점입니다. 가장 안정된 삶이란 가장 치열한 고민의 휴식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가장 치열한 고민 속에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 또한 부지기수로 겪게 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가정을 갖고 있기에, 나와 다른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와 다른 직업을 갖고 있기에, 나와 다른 사랑을 하고 있기에, 나와 다른 믿음을 갖고 있기에 사람은 몇 개의 경험과 선입견을 묶어 타인을 범주화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타인의 호칭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타인의 온전한 삶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쉽게 자신의 무지로 스스로를 변명하지를 않기를, 또한 쉽게 타인의 어리석음을 조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치적 공정함이란 항구한 정의로 인용되는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서로간의 동등한 존엄을 인정하고자 하는 태도로 실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간명한 기표로 구성되어 있지만 복잡하기 그지 없는 삶을 함축하기 때문에 불명료한 기의로 전달됩니다. 언어로 자신의 모두 설명했다고 혹은 언어로 타인을 모두 이해했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도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섣불리 단절과 자신의 해석으로 평가하는 오만도 없기를. 언어로 몰이해의 대상을 공격하고 상처 주는 것은 매우 쉽고 간명한 일입니다. 하지만 언어로 서로의 이해를 소통한다는 것은 생각 외로 어렵고 그러기에 더욱 뜻 깊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기에 즉자적으로 발화하고 사라지는 말로 전해지는 대화 대신에 글로 전해지는 대화란 한 번 더 생각하고 신중히 상호간의 소통을 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위한 글이란 더욱 어렵고 오해의 여지조차 더 크게 합니다.

 

  누군가 게시판에 고민에 대한 글을 쓰는 행위는 지극히 잉여로운 행동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글로 자신의 생각을 옮기기 위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읽는 시간과 노력은 매우 짧아서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판기 같은 위로의 말이나 튀어나온 못 같은 비난의 말을 듣는 것이 대다수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고민이 가득하여 어렵게 쓰여진 글은 스스로의 혼돈된 삶을 곱씹어 보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뿐만이 아닌 타인에게도 공감되는 고민을 담아내는 글에서는 새삼스레 깨닫지 못했던 타인의 진지한 조언을 받게 되기도 하겠지요.

 

 고민이 없는 지식이란 착오로 변질됩니다. 고민이 없는 믿음이란 기만으로 남게 됩니다. 고민이 없는 질문은 어리석음에 대한 질책으로 되돌아 옵니다. 좋은 게시판은 글을 쓰기 어려운 게시판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똑똑하거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쓰는 게시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에 앞서 한 번 더 자신의 고민과 타인의 입장을 함께 고려하는 예우와 어쩔 수 없는 인지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겸허함의 태도로 쓰여진 글이 등록되는 게시판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이슈가 생기고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술회합니다. 그 소란스러움 사이에서 자신의 목소리만 우선하느라 타인의 목소리를 신경 쓰지 않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맞는 소리는 자신이 가장 먼저 알지만 자신이 틀린 소리는 자신이 가장 늦게 알게 됩니다. 가장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가장 치열한 고민이 함께 해야 하는 만큼 게시판의 글쓰기가 비록 잉여로움일 뿐이라도 최소한의 고민이 담겨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하나의 생각이란 자신만의 것일 테지만 하나의 글이란 자신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허투른 사고만이 가득한 글은 온전히 하나로 남겨지지 않고 방사능처럼 다른 글에도 오염됩니다. 글쓰기 어려운 게시판이 글쓰기 싫어지는 게시판으로 바뀌는 순간은 생각 외로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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