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후기

2014.06.27 23:57

에아렌딜 조회 수:3795

안녕하세요.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온 각설이입니다.

이 글은 개인사와 편견, 사견이 들어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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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게에도 썼지만 얼마 전에 입원을 했습니다.

정신과에 외래진료를 다닌 건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만 입원은 처음입니다.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찾아간 정신과 병동은...


정말로 지루했습니다.

무료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입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래 고심을 했었습니다.

입원 신청을 해 둔 시점에 갑자기 상태가 좋아졌기 때문이지요.

자살 사고도 많이 사라졌고 조금이나마 세상이 한 톤 밝게 칠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입원 대기 시간은 2주 정도 걸렸는데 상태가 좋아진 것도 딱 2주쯤 된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도 입원 신청을 기왕에 해뒀으니, 그리고 내 상태가 또 언제 나빠질지 장담할 수 없으니 입원을 하자!하고 결심을 하고 입원을 했습니다.

사실 입원하기 전에는 여러 가지 기대를 했습니다.

뭔가 입원하면 여러 가지 스케줄에 맞춰 검사도 하고, 치료도 받으면서 나름 계획적인 하루를 보낼 것이라고요.

그런데 막상 입원하니 별로 하는 게 없었습니다.

하루 하루는 무료해 죽을 지경이었고, 할 일이 없는 환자들은 모두 복도를 계속 유령처럼 왔다갔다하거나 티비 앞에서 멍하니 있거나, 종일 잠을 자면서 시계가 움직이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집단치료라는 이름 하에 그림을 그리거나(대체로 그림이라기에도 그렇고 낙서에 가까운) 하루 두 번의 차모임을 갖거나, 하루 세 번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거나, 가끔 붕 뜬 기분을 가진 환자분들이 노래를 하거나 하는 것을 듣는 것 외엔 공허한 스케줄이었죠.

아니, 다른 무엇을 떠나서도 심심했습니다. 정말로. 궁서체로 적고 싶을 만큼 간절하게 심심했습니다.

폐쇄병동인 줄 미처 생각지 못하고 휴대폰과 노트북을 챙겨갔는데 당연히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심심하게 만들어서 말려 죽이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반농담처럼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병동은 넓지도 않고 그저 작은 하나의 복도와 6인실 병실 두 개, 5인실 병실 하나, 1인실 병실 2개와 세 개의 면담실과 한 개의 집단치료실(이란 이름의 식당)이 전부인 소박하다면 소박한 곳이었습니다.

창문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모두 창살이 쳐져 있어서, 처음 들어온 날 창가에 서 있던 어느 환자의 뒷모습은 왜 그리 쓸쓸해보였는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세간에서 갖는 정신과에 대한 편견은 저도 익히 가져본지라, 잠긴 문과 창살을 보고 약간 겁먹기도 했습니다. 

아, 내 발로 들어온 곳이지만 왠지 갇혀버린 것 같다.

비록 감옥은 아니지만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사는 곳이라, 가끔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카드 게임을 하거나 보드게임을 하거나 했습니다. 

농담을 하거나 하면 크게 웃어도 보았습니다. 작은 농담이 그렇게 웃기던 적은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처음이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9일 정도 보냈군요.


하루 한 번 볼 수 있는 주치의 선생님과의 대화 이외엔 무엇도 긴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그리 길지 않았지만.

어쨌든 시간이 아까운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공짜도 아니고 비싼 병원비를 내면서 무위도식하고 있자니 뭔가 조금이라도 건설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지더군요. 

지독한 심심함 때문이었지만.

계속 자면서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걸렸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대로는 시간과 돈의 낭비다 싶어 퇴원을 결심했습니다.

기분은 계속 나쁘지 않은 상태였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완전 헛걸음이었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크게 웃고 지낸다는 것을 잊고 있었거든요. 

밖에서 지낼 때는 누구도 대화할 상대가 없었고, 간혹 대화할 일이 생기더라도 어쩐지 긴장하게 되었었죠.

사적으로 얘기할 기회는 전무했고 혹 있다고 했더라도 길게 얘기할 수 없었을 거에요. 누구에게든 내 얘기를 한다는 게 폐처럼 생각되어 꺼려졌거든요.

그러나 병원에서는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을 만큼 무료했고, 서로 같은 환자의 입장이라 더욱 말문을 열기 쉬웠던 것 같아요.

오래간만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크게 또 웃고...

그런 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정신을 치유시켜주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자신이 누군가의 즐거운 대화를 갈망하고 있었는지도요.

병동엔 다행히도 고등학생이거나 갓 고교를 졸업한 사람도 있어서, 더욱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점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원을 떠나왔지만, 좀 섭섭하기도 하고 뭔가 마음에 찡하게 남아 있는 느낌이 들어요.

길고 짧은 9일이었지만 정이 들었던 걸까요.

어쨌든 전 다시 일상을 시작하고 또 괴로운 시간을 부딪혀가야 하겠지요.

용기를 내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사람과 접촉하며 사소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찾아야겠죠. 

그것만으로도 제 마음은 조금이나마 치유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루미큐브라고 혹시 아시나요?

보드게임의 일종인데 병원에서 알게 됐어요. 잘 하지는 못하지만 재밌어서 푹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게임을 하려면 최소 3명은 있어야 재미있더군요. 

난제이지만 어디 보드게임 동아리라도 찾아봐야 할까봐요.

이 작은 도시에서는 찾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오프라인 모임이 있으면 언제 기회를 내어서 찾아다니고 해야겠습니다.

뭐, 아직은 먼 후일의 이야기겠지만요.

지금은 꿈에 지나지 않더라도... 이루도록 노력을 해야겠지요.

그동안의 전 대부분의 일들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든 피할 핑계를 만들면서 안 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10중 9를 피하던 것을 7, 8 정도로 줄여 보려고 아주 목표치가 낮게나마 설정해봅니다.

용기를 내어야겠습니다.

용기를 낼 거에요.




쓰다보니 이런 시간이네요.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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