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셰릴 더니 Cheryl Dunye

주연
셰릴 더니....셰릴
Cheryl Dunye....Cheryl
기네비어 터너....다이애너
Guinevere Turner....Diana
발레리 워커....타마라
Valarie Walker....Tamara
리자 마리 브론슨....페이 리처즈
Lisa Marie Bronson....Fae Richards

셰릴 더니의 [워터멜론 우먼]은 [포가튼 실버]과 [시민 케인]을 저예산 인디 영화의 틀 속에 집어 넣고 버무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기본 내용은 대충 이래요. 주인공 셰릴(감독 자신이 연기하고 있고 이름도 같으므로 자화상이라고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겁니다)은 영화 감독을 꿈꾸는 비디오 가게 점원입니다. 어느날 [플렌테이션의 추억]이라는 30년대 영화를 보다 그 영화에서 '매미' 역을 하는 흑인 여자 배우 '워터멜론 우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셰릴은 그 배우의 인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하죠.

[워터멜론 우먼]은 [포가튼 실버]처럼 철저하게 가짜 다큐멘터리를 지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셰릴이 만드는 다큐멘터리와 셰릴의 삶을 다루는 극영화를 오가면서 전개됩니다. 자막도 [포가튼 실버]과는 달리 솔직하고요. 페이 리처즈, 일명 '워터멜론 우먼'은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가공의 인물입니다.

그래도 이 영화의 가짜 다큐멘터리 터치는 재미있습니다. 일단 사기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워터멜론 우먼]이 극저예산 인디 영화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 놀랍지요. 영화를 위해 조작된 비디오 클립들과 조 레너드가 찍은 가짜 사진들은 아주 그럴싸하고 믿을 만합니다.

셰릴의 탐색 과정 부분도 그 만큼 흥미진진한 터치가 숨어 있습니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카밀 파글리아가 시치미를 뚝 떼고 나와서 수박과 '매미'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줄줄 늘어놓는 부분이겠지요. :-) 그 동네 동성애자 관객이라면 가공의 레즈비언 협회 직원으로 나와 계속 툴툴거리는 소설가 사라 슐먼의 얼굴을 알아봤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정말로 재미있게 만드는 부분은 '워터멜론 우먼' 페이 리처즈라는 소재입니다. 이 영화에 따르면 이 가공의 배우는 어딘가 도로시 아즈너를 연상시키는 백인 여성 감독과 애인 사이였고 30년대 이후에는 '매미' 역에서 벗어나 흑인 프로덕션의 영화들에 출연했지만 결국 배우로 성공하지 못하고 가수로 직업을 바꾼 사람입니다.

페이 리처즈 자신은 그렇게까지 흥미진진한 인물은 아닙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리처즈는 그냥 하나의 아름다운 이미지로만 남습니다. 하지만 별 상관없어요. 리처즈가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개성적인 어떤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흑인 여성 배우의 존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매미' 역만 맡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 늘 관심 밖에 밀려나 있었고 존재를 부정당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

셰릴의 탐색은 어딘가 유령을 쫓는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서는 흑인 배우들에 대한 자료가 없다시피 하고 간신히 찾아낸 리처즈의 애인 동생은 자기 언니가 흑인 여성과 애인 사이였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합니다. 영화가 거의 끝날 때까지 셰릴이 얻어낸 것은 한묶음의 스틸 사진들과 구닥다리 비디오 테이프가 전부입니다.

그러는 동안 셰릴의 삶은 리처즈의 삶과 묘하게 겹쳐집니다. 리처즈가 백인 여성 감독과 애인 사이가 된 것처럼 셰릴도 백인 중산층 여성인 다이애너와 사랑에 빠집니다. 리처즈가 인종의 벽을 결국 넘어서지 못하는 것처럼, 셰릴의 영화에 대한 꿈도 피부색의 편견 속에서 애를 먹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달라진 건 별로 없는 거죠.

이 절망감을 심각하게만 표현했다면 영화는 진부해졌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경쾌한 코미디입니다. 영화는 자기 연민 대신 수다스러운 유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유머도 노골적으로 공격적인 대신 따뜻하고 사려 깊습니다. 일방적인 스테레오 타입으로 캐릭터를 몰아가지도 않고요. 예를 들어 셰릴과 다이애너, 리처즈와 영화 감독의 관계는 단순한 파워 게임이 아닙니다. 셰릴이 리처즈의 관계에 대해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리처즈가 하녀 역만 주는 백인 여성과 애인 사이였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 자체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선 가끔 이야기를 지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셰릴 더니는 나중에 자막을 통해 말합니다. 지금은 잊혀져 버린 그 수많은 유령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요. (99/04/19)

D&P

기타등등

셰릴 더니는 직업 배우는 아니지만 자기 자신 역을 했기 때문인지 편하고 꽤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다이애너 역의 기네비어 터너는 아주 귀엽고 이제는 직업 배우처럼 능숙해요. 참, [고 피시]에서 엘리였던 V.S. 브로디가 바에서 노래부르는 여자 역으로 잠시 나온답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정말 못 불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