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클레어 페플로 Clare Peploe

주연
미라 소비노....공주/포숑/아스파지
Mira Sorvino....The Princess/Phocion/Aspasie
벤 킹즐리....헤르모크라테스
Ben Kingsley....Hermocrates
피오나 쇼....레옹틴느
Fiona Shaw....Leontine
제이 로던....아지스
Jay Rodan....Agis
이그나치오 올리바....할리퀸
Ignazio Oliva....Harlequin
레이첼 스털링....헤르미다스/코린느
Rachael Stirling....Hermidas/Corine
루이스 몰테니....디마스
Luis Molteni....Dimas

1.

레오니드 공주

세상엔 수많은 셰익스피어 영화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몰리에르 영화나 라신느 영화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왜 프랑스의 위대한 극작가들은 영화계에서 셰익스피어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걸까요?

가장 쉬운 답변은 셰익스피어가 훨씬 재미있는 작품들을 썼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에요. 아카데믹한 전통의 프랑스 희곡들보다 가리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써갈긴 대중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 훨씬 재미있죠.

하지만 진짜 이유는 3일치를 엄격하게 지킨 프랑스의 희곡들이 너무나도 연극적이라는 데 있을 겁니다. 영화로 수월하게 옮기기엔 지나치게 무대 중심적인 작품들인 거죠.

2.

마리보는 몰리에르나 보마르셰처럼 국외에 널리 소개된 작가는 아닙니다. 작품의 성격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그렇게까지 '깊이있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요. 연인들의 음모와 계략으로 가득한 그의 희곡들은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그는 몰리에르처럼 인상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 적도 없고, 보마르셰처럼 사회적 깊이가 있는 작품을 쓴 적도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그의 최대 장점인 정교한 대사들은 번역되면 매력의 반이 사라져 버렸죠. 원래 말장난은 국경을 넘기 힘든 법입니다.

영어권에서는 거의 찬밥 신세였던 마리보는 1990년대부터 갑작스럽게 유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스티븐 워즈워스가 날씬한 미국식 영어로 번역한 마리보 시리즈가 공연되었고, 영국에서는 마틴 크림프의 보다 정통적인 번역에 바탕을 둔 공연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19세기 사람들이라면 따분하다고 외면했을 마리보의 그 경쾌한 우아함과 위트가 현대 관객들에게 새롭게 어필했던 것이겠죠. 마치 요새 영화 관객들이 제인 오스틴 영화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3.

클레어 페플로의 [사랑의 승리]는 마틴 크림프의 번역을 사용한 런던 알메이다 극장의 공연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전 이 공연을 본 적도 없으니, 이 각색 버전 중 어디까지가 페플로의 것이고, 어디까지가 알메이다 극장의 공연에 바탕을 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써서 길게 늘인 결말은 페플로가 추가한 것이 확실합니다.

마리보의 다른 희극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승리]는 변장한 연인들과 다양한 계략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단순해요. 주인공 레오니드 공주(영화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는 찬탈자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만, 쫓겨난 왕의 아들 아지스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 알자 그에게 왕위를 돌려주려 합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아지스를 보살펴 온 철학자 헤르모크라테스(에르모크라트)와 동생 레옹틴느가 그에게 공주에 대한 증오심과 사랑에 대한 경멸심을 잔뜩 불어넣어주고 있다는 것이어요. 공주는 아지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시녀 코린느와 함께 남자로 변장을 한 뒤 헤르모크라테스의 저택에 들어옵니다. 여기까지는 기본 설정이고 희곡의 대부분은 공주가 남자와 여자 역을 번갈아 오가면서 헤르모크라테스 저택의 모든 사람들을 유혹하는 과정이 차지합니다.

마리보가 살았던 18세기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랑의 승리]라는 제목에 동의하는 현대인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사실 이 작품은 [계략의 승리]나 [유혹의 승리] 쪽에 더 가깝습니다. 작품 전체가 계략과 유혹의 천재인 공주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쓰여졌으니까요. 레오니드 공주는 정말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제가 책임감 있는 부모라면, 딸이건 아들이건 절대로 이 사람 근처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막겠어요. 이 사람과 반나절만 함께 지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솔직히, 전 공주가 아지스를 사랑한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유혹의 기술이 완벽해요. 게다가 숲 속에서 몇 분 몰래 훔쳐본 게 사랑이니 뭐니를 떠들만한 근거가 되나요? (물론 당시 관객들에겐 그것으로 충분했지만요.)

그러나 공주의 계략을 구경하는 건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공주가 저택의 이곳 저곳을 쉴새 없이 오가며 헤르모크라테스, 레옹틴느, 아지스 모두를 유혹하는 광경은 마치 일급 곡예사의 저글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들통났다! 달아나자!"라고 외칠만한 위기에도 눈도 깜빡 안하면서 그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잡는 장면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어떻게 이 멋진 솜씨를 경탄하지 않고 그냥 바라볼 수 있겠어요?

4.

페플로는 비교적 충실하게 원작을 따르고 있는 편입니다. 물론 셰익스피어 영화들의 충실도와는 거리가 멀어요. 일단 영어로 번역된 작품이라, 원작에 대한 존경심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거든요. 종종 언어는 현대화되고 (워즈워스의 번역과는 달리 비교적 영국식 영어를 유지하고 있지만요) 캐릭터의 해석과 몇몇 설정도 원작보다 더 노골적이거나 직접적이 됩니다.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예로 공주가 아지스의 나체를 훔쳐보는 장면을 들 수 있겠지요. :-)

가장 큰 해석 차이는 페플로가 공주에게 인간의 흔적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작에 나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전문가와는 달리, 영화의 공주는 종종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데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 감정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표출합니다.

가장 큰 개작인 결말 부분도 원작의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함을 조금 덜어보려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원작은 공주가 정체를 드러내고 모든 걸 마치 서류철 정리하는 것처럼 해결하며 끝납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시간을 조금 더 끕니다. 질질 끄는 동안 아지스는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헤르모크라테스와 레옹틴느는 배신과 실망에서 벗어나 다른 데서 위안을 찾습니다. 전 언제나 원작의 레옹틴느가 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각해보세요. 평생 연애 한 번 못해본 노처녀에게 아름다운 젊은이가 다가와 사랑한다며 온갖 청산유수로 떠들어대서 간신히 맘을 열고 결혼까지 약속했더니 나중에 다가와서 "미안해요. 난 여자예요. 그럼 안녕!"하고 달아나 버려요?) 그 작은 선물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전체적 인상은 상당히 거칠거칠하군요. 아직도 레옹틴느가 공주/포숑에 대한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살짝 암시하는 원작의 은근한 결말이 사라진 것도 조금 아쉽고요.

연극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페플로는 이중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일단 페플로는 영화적 테크닉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끌어들입니다. 자주 사용되는 핸드 헬드 카메라는 종종 배우들을 염탐하는 스파이처럼 주변을 맴돌고, 배우들의 긴 대사들은 점프 컷으로 툭툭 끊깁니다. 점프 컷에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결국 취향 문제인 듯 합니다. 개념 자체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긴 대사 장면의 점프 컷은 특히 반응하는 상대방 배우들에게 다양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영화는 그러면서도 연극의 뿌리를 고집합니다. 페플로는 이 작품을 일종의 야외극처럼 연출하고 있습니다. 종종 카메라는 정원에 앉아있는 현대 관객들을 보여줍니다. 작품이 끝나면 현대복으로 갈아입은 배우들이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요. 이 역시 개념만 따진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무대 전통에 박혀있는 [사랑의 승리]의 뿌리는 쉽게 뽑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게 현명한 방법이죠.

페플로는 공주, 헤르모크라테스, 레옹틴느, 아지스, 코린느 역에는 영국식 악센트를 쓰는 영어권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평민 출신의 어릿광대들인 할리퀸과 디마스는 이탈리아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마리보 연극이 코메디아 델아르테의 전통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으며, 이 사람의 대표작 상당수가 이탈리아 배우들에 의해 초연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배우들은 힘주지 않고 가볍고 약간 경박하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생각해보면 그게 맞죠. 이 작품의 최대 희생자들을 연기한 벤 킹즐리와 피오나 쇼는 그런 경박함 속에서도 사랑의 감정을 묘사하고 관객들의 동정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미라 소비노의 공주의 대해서도 큰 불만은 없습니다. 처음엔 제가 기대했던 공주의 능숙함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페플로의 공주는 원작의 공주보다 조금 더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사람의 감추는 것 없는 것 같은 편한 얼굴은 오히려 그런 유혹자의 이미지에 더 잘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 18세기 남성 복장이 썩 잘 어울리던 걸요.

5.

페플로의 영화가 새로운 마리보 유행을 가져올까요? 어림없습니다. 그렇게 인기있는 영화도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이미 영어권에서 마리보 유행은 오래 전에 상한선에 도달했습니다. 아마 자국어권에서도 또다른 마리보 영화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겁니다.

[사랑의 승리]는 영화적으로 성공한 작품일까요?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보의 작품은 어쩔 수 없는 '연극'이니까요. 그러나 '녹화된 연극'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무조건 작품을 깔아뭉겔 필요가 있을까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제대로 공연되는 마리보의 연극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의 대체물로서의 가치는 어느 정도 인정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영화라는 장르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으니 장르 고유의 성격에 그렇게까지 집착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죠. (02/07/15)

DJUNA

기타등등

클레어 페플로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아내입니다. 그가 이 영화의 각색과 제작에 참여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코린느 역의 레이첼 스털링은 데임 다이애나 릭의 딸입니다. 이 사람은 곧 나올 미니 시리즈 버전 [티핑 더 벨벳]의 주연이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