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층 The Thirteenth Floor (1999) * * 1/2

감독
조셉 루스낙 Josef Rusnak

주연
크레이그 비에르코....더글러스 홀
Craig Bierko....Douglas Hall
아르민 뮐러-스탈....해넌 풀러
Armin Mueller-Stahl....Hannon Fuller
그레첸 몰....제인 풀러
Gretchen Mol....Jane Fuller
빈센트 도노프리오....위트니/애시턴
Vincent D'Onofrio....Whitney/Ashton
데니스 헤이버트....래리 맥베인 형사
Dennis Haysbert....Detective Larry McBain
스티브 슙....젭 번스틴
Steve Schub....Zev Bernstein
제레미 로버츠....톰 존스
Jeremy Roberts....Tom Jones

(잠재적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신경 쓰시기를.)

이런 내용입니다. 1937년의 로스앤젤레스를 가상세계로 만든 컴퓨터 천재 해넌 풀러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살해당합니다. 그의 부하 과학자 더글러스 홀은 풀러가 남긴 메시지를 찾기 위해 그들이 만든 37년의 과거 속을 헤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풀러의 딸인 제인에 대한 이상한 감정은 그를 엉뚱한 진상으로 이끕니다...

또하나의 가상 현실물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13층]은 자신이 장르물이라는 사실을 꽤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자기가 엄청나게 새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착각하지도 않고, 그 소재를 요란하게 과대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영화는 수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미리 닦아놓은 길을 안전하게 따라가며 뒤따라오는 자의 편안함을 만끽합니다. 이제는 더이상 가상현실이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고 '꿈이냐 생시냐'의 인식론적 고뇌를 반복할 필요도 없습니다. [13층]은 이미 그런 것들에 익숙한 관객들을 위한 안전한 서스펜스 물입니다.

물론 가상현실을 이용한 인식론적 게임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가상 현실을 이용한 반전은 남아있고요. 사실 그 반전이 지나치게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렇게 새로운 반전도 아닌데다다 데자부를 이용한 단서를 너무 일찍 풀어서 눈치없는 관객들도 본 미스테리가 제대로 진행되기도 전에 모든 걸 알아차리고 말거든요. 그래서 중반까지 끄는 미스테리는 꽤 지리해집니다. 모두가 진상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영화는 곧 주제를 알고 고개를 숙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식론적 고뇌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더글러스와 제인의 로맨스, 풀러의 회사를 둘러싼 음모입니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3, 40년대 필름 느와르의 분위기를 의식적으로 풍기고 있습니다. 실제로 영화에 나오는 가상 현실은 37년의 로스 앤젤레스죠. 그러나 20세기 말의 로스 앤젤레스 역시 상당히 강한 느와르 분위기를 풍깁니다. 의식적으로 예스러운 헤어스타일과 분위기를 고집하고 있는 제인(이 캐릭터가 37년 가상 현실 파트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입니다)이나 구식 모자를 눌러쓴 맥베인 형사와 같은 캐릭터들을 보세요. 이 영화의 내용도, 로맨틱하게 치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고전적인 느와르 식 음모극입니다.

만약 이들이 SF를 접고 느와르 쪽을 강조했다면 영화는 더 흥미진진했을 겁니다. 사실 또 그래야 했던 것이고요. 이 영화의 강점은 아이디어의 독창성이 아닙니다. 당연히 드라마가 더 중요시되어야 해요.

그러나 영화는 어정쩡합니다. SF 쪽이 어정쩡한 것처럼 드라마도 어정쩡해요. 더글러스와 제인의 로맨스는 힘이 없고 영화 전체를 장악하는 음모도 로맨티시즘에 의해 지나치게 탈색되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드라마를 충분히 끌 시간이 없어요.

이 영화의 미적지근한 드라마는 드라마를 경시한 결과가 아닙니다. 드라마에 신경을 쓰기는 했는데 능력부족으로 결과가 나빴던 거죠. 증거로 그들은 꽤 많은 드라마의 씨앗을 뿌리고 있긴 하니까요.

배우에 대해서는... 아르민 뮬러 스탈과 빈센트 도노프리오는 좋습니다. 그레첸 몰의 이미지는 영화에 딱 맞지만 역이 너무 작고 캐릭터 발전이 어정쩡하군요. 크레이그 비에르코는 더글러스 역을 하기엔 지나치게 얼굴이 강합니다. 더글러스는 쉽게 선악을 오갈 수 있는 중립적인 얼굴을 한 배우가 연기하는 편이 더 나았을 거예요.

스토리나 배우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비주얼의 특화입니다. 번질거리는 금속성 컴퓨터 그래픽으로 몰고가는 다른 사이버펑크물과는 달리, [13층]은 오히려 1937년의 예스러운 과거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제가 괜히 마음에 두고 있는 시절이기도 하지요. 그 곳에 정말로 살라고 한다면 못살겠지만 그 시대에 대한 걸 읽거나 보는 건 꽤 즐겁답니다.

37년이라는 세계와 느와르 요소의 연관성을 보다 확실하게 하고 제인의 캐릭터를 강화해 로맨스를 보완했더라면 영화는 SF 버전 [현기증]이 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들어진 결과를 보면 [매트릭스]와 [다크 시티]의 어중간한 경계에 선 소박한 영화에 불과하군요. (99/11/30)

DJUNA

기타등등

1.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원작인 [Counterfeit World]는 이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에 의해 텔레비전 영화로 만들어진 적 있지요. 원작을 선택하는데 제작자 롤랜드 에머리히의 독일 커넥션이 먹힌 게 아닐는지?

2. 에드 프리드킨이 이 영화를 봤다면 참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영감 지금은 뭐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