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존 길링 John Gilling

주연
앙드레 모렐....제임스 포브스 경
André Morell....Sir James Forbes
다이안 클레어....실비아 포브스
Diane Clare....Sylvia Forbes
브룩 윌리엄즈....피터 톰슨 박사
Brook Williams....Dr. Peter Tompson
재클린 피어스....앨리스 톰슨
Jacqueline Pearce....Alice Tompson
존 카슨....클라이브 해밀턴
John Carson....Clive Hamilton
알렉산드 데이비언....덴버
Alexander Davion....Denver
마이클 리퍼....스위프트 경사
Michael Ripper....Sergeant Swift
마커스 해몬드....톰 마티너스
Marcus Hammond....Tom Martinus
데니스 치너리....크리스찬 경관
Dennis Chinnery....Constable Christian
로이 로이스턴....목사
Roy Royston....Vicar
벤 아리스....존 마티너스
Ben Aris....John Martinus

1.

저명한 과학자인 제임스 포브스 경은 그의 수제자였던 콘월의 의사 피터 톰슨한테서 마을에 퍼지고 있는 이상한 전염병에 대한 편지를 받습니다. 딸 실비아와 함께 톰슨을 방문한 제임스 경은 그 병이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라 부두교에 의한 주문에 의한 것이고 사건의 중심에는 동네 유지인 클라이브 해밀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톰슨의 아내가 죽고 실비아 역시 부두교의 저주에 말려들자 제임스 경과 톰슨은 해밀턴을 저지하기 위해 나서고...

2.

도대체 언제부터 좀비 영화에서 부두교가 등장하지 않게 되었던 걸까요? 아마도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시작이 아닌가 싶군요. 로메로의 좀비들은 너무 강렬해서 그때까지 좀비 영화들이 끌어왔던 기존 구성들을 박살낼 정도였습니다. 로메로 이후 좀비 영화들에 나오는 좀비들은 [화이트 좀비]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같은 영화들에 나오는 좀비들과는 별로 닮은 게 없죠.

여기에 대해 꼭 뭐라고 트집잡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유행도 바뀌기 마련이니까요. 요새도 흡혈귀 영화들은 계속 만들어지지만 그렇다고 요새 흡혈귀들이 모두 벨라 르고시처럼 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잖아요. 좀비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부두교 의식을 슬쩍 뒤로 밀어놓으면 이런 장르 속에 숨어 있는 인종차별적인 요소나 문화적 편견을 제거할 수 있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옛 좀비 영화들을 잊어버린다는 것도 아쉽죠? 로메로 이전 좀비 영화들에는 요새 좀비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로맨틱한 멋이 있으니까요.

3.

[좀비의 역병]은 가장 유명한 해머 영화는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해머 영화 역시 아니고요. 해머 영화사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렇게 야심넘치는 작품은 아니랍니다. 쿠싱이나 리, 피트와 같은 해머 스타들도 없고요. 그냥 욕심없이 빠르고 가볍게 만든 소품이지요. 이 영화는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던 [파충류]와 함께 묶여서 패키지 상품처럼 만들어졌는데, 그 때문에 두 영화는 감독이나 배우, 세트, 로케이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같이 보면 좋은 영화들이죠. 정작 [좀비의 역병]은 [드라큘라--프린스 오브 다크니스]와 함께 동시 상영되었지만요.

아마 이 작품은 해머 영화의 견본으로 가장 훌륭하게 먹힐 겁니다. 물론 [드라큘라의 공포]와 같은 작품이 있긴 합니다만, 사실 그 작품은 견본 노릇을 하기엔 영화 자체의 명성이 워낙 높죠. [좀비의 역병]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더 쉽습니다.

이 영화에는 해머 영화가 다루어 온 거의 모든 요소들이 담겨 있습니다.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한(그러면서 좀비니 흡혈귀니 부활한 미이라 같은 이야기는 어쩜 그렇게 쉽게 믿는 건지!) 빅토리아 시대의 용맹한 주인공들이 제임스 버나드의 거창한 음악이 꽝꽝거리는 동안 해외(주로 영국 식민지입니다)에서 온 괴물들과 싸운다는 거죠. 당연히 그들이 싸우는 밤의 절반은 데이 포 나잇으로 꾸며낸 가짜 밤이고, 괴물들의 분장은 퍽퍽하며, 사방에 흩어지는 피는 너무나 선명한 색의 빨강 물감입니다. 아, 물론 해머 영화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되는 60년대식 육체파 미녀들을 빼먹어서도 안되겠죠(이 영화에서는 재클린 피어스가 그 역을 담당합니다.)

당연히 해머 영화는 그렇게까지 세련된 느낌을 주지 못합니다. 노골적이고 값싸며 저질이죠. 하지만 바로 그게 해머 영화의 매력이 아니던가요? 60년대 관객들이 해머 영화한테서 바랐던 것은 결코 고상함이나 위선이 아니었습니다. 해머 영화는 자신과 관객들의 욕망에 충실했고 그게 바로 그들의 성공 비결이었습니다.

4.

바로 위에서 [좀비의 역병]을 해머 영화의 모델로 이용했습니다만, 사실 [좀비의 역병]은 위의 설명에서 언급한 것만큼 노골적인 작품은 아닙니다. 피도 그렇게까지 많이 나오지는 않고 (네, 예의 그 빨강 물감은 이번에도 잔뜩 나옵니다. 하지만 피가 살육과 연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성적인 유혹도 비교적 절제된 편입니다. 사실 해밀턴이 실비아를 유혹하는 장면은 조금 더 강조했어도 좋았을 뻔했지요. 지금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좀비의 역병]은 보다 가라앉은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노골적인 내용이 아니라 음침한 분위기지요. 물론 해머 영화들은 그들 특유의 막강한 분위기 묘사로 유명합니다만, [좀비의 역병]은 다른 해머 영화들이 묘사하는 거창하고 강요하는 느낌의 분위기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는 소재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이 영화의 무대가 되는 콘월의 탄광촌은 말 그대로 죽어있는 곳이니까요. 이 영화의 좀비들도 공격적인 괴물은 아니고요. 그들은 오히려 사악한 영주의 피해자들입니다 (참, 고약한 사람이지요. 인건비를 아끼려고 노동자들을 좀비로 만들다니.)

하여간 이런 이야기에서는 기죽은 듯한 어두운 분위기가 필수적이고, 길링은 그런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잡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다른 해머 영화들보다 덜 구닥다리로 보이는 게 아닌가 싶어요. 천박함이라는 건 예상외로 쉽게 수명이 닳는 것이니 말입니다.

5.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발 루튼 영화들처럼 분위기로만 일관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좀비들은 당연히 모습을 비추지요. 그리고 그들의 등장은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특히 영화 중반에 좀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굉장히 강렬합니다. 분장이야 그저 그렇지만 길링이 사전에 깔아놓은 분위기와 적절한 타이밍이 멋진 효과를 내는 것이죠.

설정은 [드라큘라]와 비슷하지만 (하긴 해머 영화 스토리들은 다들 비슷비슷해요) 앨리스의 무덤 장면 역시 근사합니다. 앨리스가 좀비로 변해가는 과정 역시 잘 되어 있고요. 물론 사람들은 그 뒤로 이어지는 톰슨의 악몽 장면을 더 잘 기억할 겁니다. 안개로 반쯤 가려진 묘지에서 하나씩 좀비들이 기어나와 톰슨을 둘러싸고... 이익... :-)

멋진 분위기와 쇼커 장면들에 비해 각본은 안이한 편입니다. 실비아와 제임스 경이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왜 모든 걸 초반에 눈치챘으면서도 그렇게 머뭇거렸을까요? 게다가 막판에 제임스 경이 벌이는 모험은 그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똑똑한 과학자'의 인상을 완전히 박살낼 정도입니다. 하긴 그가 그렇게 허우적거렸으니 막판의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지만요. (00/04/07)

DJUNA

기타등등

[좀비의 역병]이 나온지 꼭 2년 째 되던 해에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나왔습니다. 겨우 2년 차를 두고 나온 이 두 영화들의 모양이 어쩜 그렇게 다른 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