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Quentin Tarantino

주연
팜 그리어....재키 브라운
Pam Grier....Jackie Brown
사무엘 L. 잭슨....오델 로비
Samuel L. Jackson....Ordell Robbie
로버트 포스터....맥스 체리
Robert Forster....Max Cherry
브리지트 폰다....멜라니
Bridget Fonda....Melanie
마이클 키튼....레이 니콜렛
Michael Keaton....Ray Nicolette
로버트 드 니로....루이스 가라
Robert De Niro....Louis Gara
마이클 보웬....마크 다거스
Michael Bowen....Mark Dargus
크리스 터커....보몬트 리빙스턴
Chris Tucker.... Beaumont Livingston
리사 게이 해밀턴....쉬론다
Lisa Gay Hamilton....Sheronda

1.

재키 브라운

예술가들은 평생 같은 소리만 되풀이 해대는 사람들이라고들 하죠. 그래서 르느와르가 뚱뚱한 여자들을 그렇게 끝도 없이 되풀이 그려댔고, 히치콕이 역시 오인받는 남자 이야기를 그렇게 끝없이 찍어댔으며, 보르헤스가 죽을 때까지 미로와 도서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나 봅니다.

[재키 브라운]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줍니다. 그곳은 수다쟁이 범죄자들과 음모, 배신, 미국의 팝 컬쳐로 도배된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우연치 않게도 엘모어 레너드의 세계와 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미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은 엘모어 레너드 영화들 중 가장 걸작으로 알려져 있죠. [펄프 픽션]의 각본이 레너드의 소설과 상관 없는 오리지널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펄프 픽션]의 통 안에 가득한 수다쟁이 범죄자들과 갑작스러운 폭력들은 바로 엘모어 레너드의 그것이니까요. 심지어 [펄프 픽션]은 [스틱]같은 영화보다 훨씬 더 레너드의 작품처럼 보입니다.

그런 그가 레너드의 원작을 각색한 [재키 브라운]을 선보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여기까지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순서입니다. 그 소란스러운 [펄프 픽션] 이후 무언가 보여주라고 사방에서 소란을 떨어대는 그 와중에 이 영화를 들이 밀었으니 말이에요.

여기에는 분명 정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타란티노가 [펄프 픽션]이 그에게 부여한 지나친 명성과 대중과 모방자들에 의해 고착된 스타일에서 탈출하고 싶어했다는 것은 분명하잖아요? 그러나 그런 정치적인 요소는 대충 무시하고 싶습니다. [재키 브라운]이 보여주는 그 태평스러움은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매우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히치콕이 잉그리드 버그먼의 '대작 집착'에 대해 불평하면서 한 말이 있는데, [재키 브라운]에도 해당되는 말처럼 보이니 한 번 인용해 보기로 하죠. 그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대작을 하고 그것이 성공했을 때 더 큰 것을 계속하겠다는 욕심을 부리는 것은 풍선을 계속 불어 결국 눈앞에서 뻥 하고 터뜨려 버리는 어린애 같은 짓입니다. 난 그런 사고 방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난 스스로에게 '[사이코]는 소품이지만 해 볼 만한 멋있는 영화가 될 거야'라고 말하지, 결코 '1500만 달러를 벌 수 있는 영화를 찍어야겠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히치콕을 계속 인용하는 척하고 말하자면 타란티노는 [재키 브라운]을 '여비서 영화'를 찍는 기분으로 만들었나 봅니다. 결과가 어찌되었건 그 자세는 매우 건전하며 생산적입니다.

2.

엘모어 레너드의 [럼 펀치]를 읽지 않았으니 원작이 어떤지 저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그리고 원작을 모른다면 타란티노의 역할을 어떻게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겠어요? 그가 헐리웃에서 가장 레너드 풍의 작품을 쓰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런 저울질은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은 대충 넘어가기로 하죠.

타란티노의 기여도가 어떻게 되었건, [재키 브라운]은 매우 평이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는 [펄프 픽션]을 논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던 시간의 뒤틀림도, 노골적인 장르 패러디나 오마쥬도 없습니다. 물론 재키 브라운의 돈 빼돌리기 장면이 세 사람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장면 같은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도 형식 실험이라기 보다는 상황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려는 친절한 의도를 약간 장난스럽게 표현한 것 이상은 아닙니다. 타란티노는 [재키 브라운]에서, 얌전하게 장르 안에 남아 영화를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바운드]가 그랬던 것처럼, 레즈비언 로맨스와 같은 외부 요소를 장르 안에 끌어들이는 짓도 하지 않습니다. [재키 브라운]은 매우 안전한 케이퍼 영화이며 그 이상은 의도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재키 브라운]은 썩 좋은데, 그 욕심부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영화가 꽤 높은 수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는 엘모어 레너드의 능숙한 손길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은 타란티노 자신의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정말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짖궂은 자막이나 시간 뒤꼬기와 같이 쉽게 드러나는 '타란티노 스타일'이 아니라, 영화 전체를 여유있게 감싸고 조율하는 숨겨진 영화적 테크닉들입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숙하고 안정적입니다. '무서운 아이들'의 자리에서 내려와도 타란티노는 헐리웃에서 충분히 먹고 살겠어요. 그 친구는 영화를 상당히 '잘' 만든단 말입니다.

3.

[재키 브라운]은 6명의 등장인물들을 제한된 장소 안에 쑤셔 넣고 수다를 떨게 하는 작품입니다. 당연히 배우들과 캐릭터들이 중심에 설 수밖에 없죠. 하지만 [재키 브라운]의 캐릭터들은 [펄프 픽션]의 캐릭터들처럼 독특한 인물들이 아니며 그 영화에서처럼 거창한 아리아를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장르의 틀 안에 얌전하게 안주하며 자기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루이스와 멜라니를 제외하면 재키 브라운, 맥스 체리, 오델 로비, 레이 니콜렛이 남습니다. 니콜렛은 오델을 잡으려 하고, 재키는 오델의 돈을 챙기려 하며, 맥스는 재키에게 반해서 그녀를 돕고, 오델은... 언제나처럼 사람들을 죽여가며 자기 일을 합니다.

재키 브라운은, 블랙플로이테이션 영화의 팬이었다는 타란티노가 자기 회상 속에서 쉽게 끄집어낼 만한 인물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캐릭터가 팜 그리어의 옛날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방에 총을 난사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캐릭터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그냥 얕볼 수 없지만요.

유감스럽게도 타란티노는 그 가능성을 충분하게 구현해내지 못했는데, 그가 재키의 행동과 이미지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캐릭터의 내면을 끄집어 내는 데에 다소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팜 그리어는 꽤 괜찮았으며 그 등장은 분명 인상적이었지만, 그 배우에게도 타란티노가 채우지 못한 부분을 스스로 채우려고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군요.

타란티노는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오델의 캐릭터가 가장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럴 것도 같습니다. 오델은 이 영화에서 가장 타란티노 풍인 인물이니까요. 실제로 그는 이 영화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트러블 메이커니, 오델 없이는 영화 자체가 존재할 수 없죠. 잭슨은 언제나처럼 잘하고 또 매우 타란티노적으로 캐릭터를 해석합니다. 아마 그는 타란티노 팬들에게 가장 친숙하게 느껴질 인물일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배우와 캐릭터는 로버트 포스터와 그가 연기한 맥스 체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의 가장 이상한 부분이기도 하죠. 예민하고 피곤해 보이는 이 중년 남자는 타란티노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보석 보증인이라는 직업만이 그를 타란티노 세계와 간신히 연결하고 있을 뿐, 그걸 뺀다면 그와 이 폭력적인 세계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오델 로비처럼 줄줄줄 타란티노 대사를 읊지도 않으며 고약한 유머 감각을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재키에 대한 그의 사랑은 거의 플라토닉하기까지 하며 지루한 일상과 늙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침울하게 곱씹어 대는 그의 모습은 매우 진짜 같고 공감이 갑니다. 사실 로버트 포스터의 지친 주름투성이 얼굴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한 설득력을 띄는데, 아마 할리우드 주류 밖에서 살아오는 동안 생긴 풍광의 흔적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이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는 엘모어 레너드와 로버트 포스터의 영향력이 더 컸을 겁니다. 아직 파릇파릇한 젊은이인 타란티노가 맥스와 같은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4.

[재키 브라운]을 걸작으로 과대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타란티노가 이 영화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소란스러웠던 [펄프 픽션]을 잊고,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는 허풍스러운 그의 별명을 잊고 본다면, [재키 브라운]은 나름대로 꽤 흥미로운 요소들과 멋진 배우들, 그리고 적절한 대사들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내용에 비해 좀 길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2시간 반의 상영 시간이 안이하게 낭비된 것도 아닙니다. 결국 무얼 기대하고 보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98/06/02)

D&P

기타등등

마이클 키튼은 [조지 클루니의 표적]에서도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