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오슨 웰즈 Orson Welles

주연
오슨 웰즈....폴스타프
Orson Welles....Falstaff
키스 박스터....핼 왕자
Keith Baxter....Prince Hal
잔느 모로....돌 티어쉬트
Jeanne Moreau....Doll Tearsheet
마가렛 러더포드....퀴클리 부인
Margaret Rutherford....Mistress Quickly
존 길거드....헨리 4세
John Gielgud....Henry IV
마리나 블라디....케이트 퍼시
Marina Vlady....Kate Percy
마이클 올드리지....피스톨
Michael Aldridge....Pistol
알랜 웹....쉘로우
Alan Webb....Shallow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1, 2부에서 가장 사람 마음을 끄는 인물은 왕위 찬탈자의 죄의식과 망나니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불쌍한 남자 헨리 4세가 아닙니다. 명색이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인상은 비교적 희미하죠. 망나니의 겉모습 속에 웅크린 제왕의 속셈을 숨기고 있는 그의 아들 핼 왕자는 조금 더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그의 건달 친구인 훈작사 존 폴스타프 경을 능가하지는 못하죠. 지금도 폴스타프는 가장 사랑받는 셰익스피어 캐릭터 중 한 명입니다. 죽은 뒤의 언급까지 포함하면 자그만치 네 편이나 되는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니 당시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고 또 작가 자신의 사랑도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오슨 웰즈 영감 역시 이 뚱보 건달에게 매료된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긴 살아가면서 참 공감도 많이 했을 거예요. 웰즈는 폴스타프 영감처럼 삶을 즐기는 사람이었고 덕택에 말년에는 폴스타프 역을 하기 딱 좋을만큼 살이 찌기까지 했었죠. 그는 폴스타프처럼 돈 문제로 고생이 많았고 또 그 사람처럼 호텔을 전전하며 말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시민 케인] 이후 수많은 영화적 추종자를 거느렸지만 그렇다고 그가 영웅이 되어 할리우드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헨리 5세한테 버려지고 죽어가는 폴스타프의 모습에서 웰즈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죠.

[심야의 종소리]는 폴스타프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각본은 [헨리 4세]의 1부와 2부, [헨리 5세]에서 폴스타프와 관련된 부분만 뽑아서 스토리를 만들고 거기에 [홀린세드 연대기]의 해설을 첨가한 것입니다.

위의 작품들을 읽어보신 적 없는 분들을 위해 대충 스토리를 요약해드리죠. 날라리왕 리처드 2세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헨리 4세가 왕위에 오르지만 왕권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의 방탕한 아들 헨리 (핼)은 건달패 폴스타프와 어울려 돌아다니느라고 정치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네요. 이러는 동안 워체스터와 헨리 퍼시가 헨리 4세에 도전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내전이 일어납니다. 헨리 4세는 그들을 물리치지만 결국 얼마 되지 않아 죽고, 헨리 왕자는 그의 뒤를 이어 헨리 5세가 됩니다. 그가 왕에 되자 폴스타프는 출세길이 트였다고 달려오지만 왕은 냉정하게 그를 외면하죠.

이렇게 줄거리를 읊어놓고 보면 폴스타프 이야기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폴스타프는 애당초부터 가공인물이니 당시 역사에 관여할 부분이 많지 않죠. 굵직한 역사적 흐름을 걷어내면 이 영화는 폴스타프의 차지입니다. 그가 하는 짓이라고는 노상 강도짓을 하다 달아나고 나중에 허풍을 떨거나, 징병권을 남용해 뇌물을 챙기거나, 전쟁터에서는 죽은 척 하고 있다가 나중에 시체에 칼을 쿡쿡 쑤셔박는 정도지만 말이에요. 그는 끊임 없이 놀림 당하고 쫓겨다니다가 나중에는 배반당하고 죽습니다.

[헨리 4세]의 주연들을 지워내자 폴스타프는 훨씬 절묘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에게 폴스타프는 기본적으로 어릿광대에 불과했습니다. 신나게 가지고 놀다가 '이것으로 이야기는 끝이야. 참, 폴스타프는 나중에 죽었대.'하고 싹 끝내버리면 그만이었지요. 하지만 웰즈는 폴스타프를 그렇게 매정하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폴스타프는 여전히 어릿광대지만 적어도 그는 어릿광대의 거인입니다. 그의 현실주의와 솔직함은 철학적 태도로 확대되고 가볍게 넘어가던 그의 감정의 콘트라스트 역시 훨씬 강해집니다. 결정적으로 폴스타프를 연기하는 웰즈의 연기에는 강한 동변상련의 느낌이 묻어 있습니다. 보고 있노라면 거의 처절해질 지경이죠.

영화로서도 이 작품은 흥미롭습니다. 물론 딥 포커스나 로우 앵글의 활용과 같은 웰즈 특유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핼 왕자가 폴스타프를 내치겠다는 독백을 하는 동안 뒷배경으로 희망과 애정으로 가득 찬 폴스타프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을, 대관식에 쫓아온 폴스타프를 바라보며 "노인이여, 나는 그대를 모르오."라고 말하는 헨리 5세의 모습과 같은 것들을 보세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영화적으로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전쟁 장면입니다. 이 장면엔 가식이나 로맨티시즘 따위는 없습니다. 피투성이의 야만적인 살육이 폭력적인 편집을 통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나중에 케네스 브래너가 [헨리 5세]를 만들면서 이 작품을 참고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가만히 앉아 즐길 수 있을만큼 영화가 매끄럽게 흐르지는 않습니다. 웰즈의 유럽 영화들은 종종 미비한 기술적인 문제로 비난을 받았는데, [심야의 종소리]는 그 중 최악입니다. 가장 짜증나는 것은 입과 대사가 따로 논다는 것이죠. 후시 녹음이 너무 나빠서 거의 더빙한 외국어 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녹음 말고도 문제는 많습니다. 급한 편집 탓인지, 짜깁기한 각본 탓인지, 스토리는 거칠고 종종 툭툭 끊깁니다. 몇몇 연극적인 장면은 충분히 영화적으로 옮겨지지 않았고요. 웰즈가 아무리 이 작품에 애정을 담았다고 해도 전체적으로는 굉장히 급하고 건성으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셰익스피어와 폴스타프, 웰즈의 존재감은 이 단점들을 상당히 극복해냅니다. [심야의 종소리]는 결코 [시민 케인]과 같은 걸작으로 대우받지는 못하겠지만 웰즈 팬들에게는 오히려 더 매력적인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00/11/26)

DJUNA

기타등등

오슨 웰즈 회고전에서는 16밀리로 상영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