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스파이크 존즈 Spike Jonze

주연
존 큐삭....크레이그 슈와츠
John Cusack....Craig Schwartz
카메론 디아즈....로티 슈와츠
Cameron Diaz....Lotte Schwartz
캐서린 키너....맥신
Catherine Keener....Maxine
존 말코비치....존 호레이쇼 말코비치
John Malkovich....John Horatio Malkovich
오손 빈....레스터 박사
Orson Bean....Dr. Lester
메리 케이 플레이스....플로리스
Mary Kay Place....Floris
W. 얼 브라운....에롤
W. Earl Brown....Erroll
번 피븐....머틴 선장
Byrne Piven....Captain Mertin
찰리 쉰....찰리 쉰
Charlie Sheen....Charlie Sheen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인형 조종사 크레이그가 서류 정리 일을 하고있는 머틴-플레머 빌딩의 7과 1/2층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 있습니다. 서류 캐비넷 뒤에 숨겨진 통로로 들어가면 15분 동안 존 말코비치가 될 수 있는 것이죠! 크레이그와 그가 짝사랑하는 맥신은 이 통로로 JM Inc.라는 회사를 세워 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 맥신을 동시에 사랑하게 된 크레이그와 크레이그의 아내 로티 사이에서는 신경전이 벌어지고,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존 말코비치 자신이 이 소동에 뛰어들자...

2.

[존 말코비치 되기]의 독창성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아이디어들은 이미 이전에도 여러번 사용된 것들입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트루먼 쇼], [영리한 리플리], [토탈 리콜], [코미디의 왕], [천국의 사도 조던], 그밖의 수많은 SF와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에서 사용된 트릭들을 뒤섞은 듯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의 독창성을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존 말코비치 되기]는 여전히 창의적인 영화로 남아 있습니다. 영화를 꾸미는 재료들이 기성품일지는 몰라도 그것들을 조합한 결과는 새롭고 인상적입니다.

이런 창의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물론 기존 재료들을 조립한 방식의 대담함에서 나왔겠지요. '15분 동안 존 말코비치가 된다'라는 아이디어에는 진짜 독창성의 실험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대담함이 녹아 있습니다. 찰리 카우프먼의 각본은 남들이 근처까지만 가고 돌아섰던 경계선을 불도저로 밀어붙인 뒤 질주하고 있습니다.

영리하게도 영화는 아이디어를 만든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보통 작가들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세워놓으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목을 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카우프먼은 정반대의 길을 택합니다. 크레이그가 첫번째 체험을 한 뒤의 장면을 보세요. 그는 허겁지겁 맥신에게 달려가서 이 발견의 철학적 가치를 아느냐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그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에 대해 떠들어대죠. 보통 작가들이라면 이 주제만 가지고 영화 한 편을 끌었을 겁니다. 하지만 크레이그의 무성의한 대사는 이들을 모두 퇴물로 처리해 버립니다. 로티가 첫번째 체험 뒤에 남근과 질에 대한 싸구려 정신분석적인 연설을 늘어놓는 부분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두 연설의 목적은 같습니다. 지루한 반복은 하기 싫지만, 그래도 혹시 없으면 궁금해할 비평가들이나 관객들을 위해 잽싸게 선수를 치는 거죠.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뭐, 너희도 알다시피 이런 식의 주제도 다룰 수 있어. 하지만 이번엔 그냥 건너 뛰자고. 그런 건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 난 너희들에게 좀 더 색다르고 화끈한 걸 보여주겠어."

그리고 정말 그는 그렇게 합니다. 남들이 "나는 누굴까" 따위에 고민하느라 포기했던 영역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거죠. 그는 남의 규칙만 따라가는 작가들과는 달리 직접 자신의 게임 규칙을 만듭니다. 그러는 동안 방치되었던 아이디어의 가능성들이 튀어나옵니다. 15분 동안 존 말코비치의 머리 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렇다면 존 말코비치를 존 말코비치 안에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 하나만 밀어넣으면 시시하다고? 그럼 단체로 넣어볼까?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러나 찰리 카우프먼의 각본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이런 형이상학적인 트릭을 인간 관계의 갈등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는 트릭을 핵심으로 삼은 진짜 드라마가 있습니다. 크레이그, 맥신, 로티의 삼각 관계 이야기가 바로 그 결과입니다. 역시 자극적인 소재를 동원했지만 드라마 구축에는 실패했던 [매트릭스]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죠. 영화가 뻔한 남녀 관계의 공식을 이처럼 쉽게 뒤집고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것은 카우프먼이 말코비치의 육체를 얼마나 잘 가지고 놀았는지 증명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머틴-플레머 빌딩의 7과 1/2층에 있는 통로로 들어가면 우리는 존 말코비치의 두뇌에서 15분 동안 머물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15분일까요? 당연히 여기엔 앤디 워홀의 유령이 숨어 있습니다. 통로로 들어가면 정말로 15분 동안 존 말코비치라는 '유명인사'가 되니까요.

물론 여기서 '유명인사'는 워홀이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가끔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관객들의 욕구와 관음주의가 새로운 터치를 부여하고 있죠.

그런데 왜 존 말코비치일까요? 좋은 배우기는 하지만 결코 잘나가는 스타는 아니지 않나요? 심지어 영화 속 주인공들도 말코비치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모릅니다!

가장 기초적인 이유는 영화를 더 흥미진진하게 만든다는 것이겠죠. 톰 크루즈나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스타라면 사람들의 소망을 더 화끈하게 자극했겠지만, 그랬다면 영화가 너무 노골적이 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우린 그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런 미스테리도 없죠.

그러나 말코비치는 다릅니다. 그는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어스한 인물입니다. 거의 못생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투박한 외모와 대조를 이루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목소리, 정중함과 잔혹함이 뒤섞인 그 미묘한 태도... 게다가 관객들은 그의 영화 속 이미지만 알뿐이지 사생활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작가가 멋대로 그의 사생활을 비틀어도 문제가 없는 거죠. 그 어정쩡한 선택이 제목과 스토리에 부여하는 괴상한 매력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영화도 말코비치를 닮았습니다. 희극적이지만 어둡고, 매정한 듯 하지만 격렬한 감정으로 차 있으며, 극에서 극을 오가면서도 늘 일정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고요. 말코비치가 이 영화를 승낙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까요.

4.

크레이그는 인형 조종사입니다. 존 말코비치는 배우입니다. 두 사람의 직업은 한 군데에서 일치합니다. 잠시 동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 공통점은 존 말코비치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것이기도 합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직업과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공식적 이미지에 대한 탐구입니다. 영화의 초현실적 도구들도 대부분 이 주제를 위해 사용되지요. 하지만 영화는 이 주제를 설익은 채 그냥 집어던지지는 않습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형이상학은 스토리를 위해 봉사합니다.

영화 속의 말코비치가 사람들의 관심이 표적이 되는 이유는 그가 공식적 이미지만 가졌을 뿐 사생활 자체는 백지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잡지 표지처럼 껍데기뿐인 인물입니다. 이 영화 속의 사람들은 존 말코비치라는 사람의 머리 속으로 뛰어드는 게 아닙니다. 존 말코비치라는 배우의 이미지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죠.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는 말코비치라는 텅 빈 인물을 이용해서 연기라는 직업의 진지성을 과장하고 있습니다. 크레이그와 로티에게 말코비치로 변신하는 것은 그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물론 크레이그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위해서라는 핑계가 따로 있지요. 몇몇 사람들에게는 더욱 심각합니다. 말코비치가 되는 것은 그들의 목숨과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그들은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하면 진짜로 '죽습니다.' 이들은 연기를 통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기라는 것도 그냥 정상적인 것이 아니지요. 영화는 이 주제에서 수많은 서커스를 끌어냅니다. 말코비치의 다양한 연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빈 육체를 오간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크레이그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말코비치를 연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크레이그가 조종하는 말코비치의 육체는 연기를 그만둔 그 순간부터 그나마 남아있던 초라한 사생활까지 빼앗긴 뒤 삶 전체를 연기 속에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중에서 실제 배우 말코비치는 존 쿠색이 연기한 크레이그를 연기해야 하지요.

물론 다른 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크레이그의 '조종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크레이그는 '영화 감독'의 은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크레이그와 말코비치의 대결은 거의 피란델로적인 의미로 확장될 수 있죠. 심심하면 한 번 가지고 놀아보세요.

5.

크레이그 슈와츠는 그렇게 좋은 연인은 아닙니다. 그는 훌륭한 예술가이며 창의성과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이지만, 그만큼이나 자기 중심적이고 기만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랑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맥신을 그대로 사랑하는 대신 그가 품고 있는 로맨스의 틀에 그녀를 끼워맞춥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맥신이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사랑한다는 감정이지요.

이런 것들이 예술 작품으로 표출된 결과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정작 사랑받아야 할 상대방에게 돌아가는 것은 별로 없죠. 크레이그는 모르고 있지만 그의 장황한 러브 스토리에는 맥신이라는 살아 숨쉬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그의 파국은 예정된 것이었죠. 적어도 맥신에 대한 로티의 사랑은 보다 진실된 것이었습니다.

교훈? 재능있는 진짜 예술가와 연애하면 만사가 피곤하다는 것이죠.

6.

[존 말코비치 되기]의 일등 공신은 각본가인 찰리 카우프먼입니다. 이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카우프먼의 창의적인 각본에 종속되어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감독인 스파이크 존즈의 가치를 깎아내려서도 안되겠지요. 때로는 능글맞게 차분하고, 때로는 염치없을 정도로 스타일리쉬한 존즈의 스타일이 없었다면 [존 말코비치 되기]는 붕괴되었을 겁니다.

배우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캐스팅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 자기 이미지 깎이는 것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고 이 막나가는 캐릭터들을 근사하게 소화해내고 있죠. 존 큐삭이야 원래 좋은 배우고 이런 식의 역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는 거야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카메론 디아즈의 엄청난 변신에는 혀가 돌아갈 지경입니다. 캐서린 키너의 맥신 역시 힘과 괴상한 유머로 가득 차 있고요. 존 말코비치 자신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이렇게 재미있게 연기하는 것도 힘들 겁니다. 그는 반쯤은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반쯤은 자기 자신이 일련의 연기 속에서 보여준 페르소나를 자기 패러디 하고 있는데, 모든 게 완벽합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듯한 마리오넷이라는 예술 장르에 다시 조명을 비춘 점도 고맙다고 해야겠군요. 이 영화의 성공이 이 예스러운 장르의 부활에 보탬이 되기를 빕니다. (00/05/15)

DJUNA

기타등등

7과 1/2에 2를 곱하면 15가 된다는 걸 알아차리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