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론 하워드 Ron Howard

주연
톰 행크스....로버트 랭든
Tom Hanks....Robert Langdon
유안 맥그리거....패트릭 맥키나 궁무청장
Ewan McGregor....Camerlengo Patrick McKenna
아옐렛 주러....비토리아 베트라
Ayelet Zurer....Vittoria Vetra
스텔란 스카쉬고드....리히터 대장
Stellan Skarsgård.....Commander Richter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올리베티 경위
Pierfrancesco Favino....Inspector Olivetti
니콜라이 리에 카스....암살자
Nikolaj Lie Kaas....Assassin
아르민 뮐러-스탈....스트라우스 추기경
Armin Mueller-Stahl....Cardinal Strauss

랭든과 베트라

[천사와 악마]는 론 하워드의 전작 [다빈치 코드]의 히트 이후 제작된 속편이지만 사실 댄 브라운이 쓴 로버트 랭든 시리즈 안에서는 전편이죠. 그 순서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셜록 홈즈 소설이 그렇듯 그냥 아무 순서로나 봐도 되는 이야기예요. 물론 전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어요. 읽은 사람들은 더 재미있다고 합니다만, [다빈치 코드] 소설을 읽은 뒤로는 독서 욕구가 일어나지 않더군요. 영화를 본 뒤로는 더욱 그렇고요.

이 영화에서 로버트 랭든은 바티칸의 의뢰를 받고 교황 선거인 콘클라베와 관련된 사건을 수사합니다. 유력한 교황 후보인 추기경 네 명이 납치되고 비밀 조직 일루미나티의 후예라고 자칭하는 인물이 바티칸에 협박편지를 보내오죠. 그와 함께 CERN의 연구실에서 만든 반물질이 사라지고요. 만약 로버트 랭든이 바티칸과 로마 곳곳에 숨겨져 있는 단서들의 의미를 해독하지 않으면 네 명의 추기경은 순서대로 살해당하고 자정이 되면 바티칸 전체와 로마의 일부가 반물질의 폭발 때문에 날아갈 판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다빈치 코드]와 똑같습니다. 다른 소재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재단한 이야기죠. 둘 다 수백 년 된 전설의 비밀 결사와 관련된 범죄사건이며, 이 결사의 멤버로 추정되는 실존 인물인 예술가가 관련되어 있고, 로버트 랭든은 사건을 핑계 삼아 유럽의 수많은 관광 명소들을 방문합니다. 그러는 동안 랭든에겐 아름다운 유럽 여성이 파트너로 주어지고요. 이 영화에서 그 파트너는 CERN의 물리학자 비토리아 베트라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가 생각했던 건 로버트 랭든이 최근 제가 읽은 추리소설 ‘명탐정들’ 중 가장 멍청한 인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레스트레이드보다 머리가 나쁜 홈즈예요. 이 인간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얄팍하며 행동방식은 처절할 정도로 비능률적입니다. 랭든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범인에게 질질 끌려다닙니다. 범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이 귀찮고 까다로운 퍼즐을 만들어 공개했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그가 하는 것은 그냥 범인이 제시한 퀴즈를 푸는 것인데, 그건 원래부터 범인이 원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왜 일분일초가 급한 납치 사건을 풀면서 늘 경찰들과 함께 직접 움직이는 거랍니까? 그리고 차로 움직이는 동안은 왜 전혀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이 영화에서 발생한 엄청난 인명손실은 대부분 랭든이 느리고 둔하고 멍청한 인물이면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추리소설이라는 걸 읽어본 적이 없나 봐요. 막판에 그가 저지른 끔찍한 실수는 그것으로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랭든이 멍청하다면, 범인은 존재 자체가 괴상합니다. 그의 동기는 대충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그의 계획은 지나치게 운에 의지하고 있고 위험요소도 큽니다. 게다가 범인의 능력에 비해 스케일이 너무 커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의 음모가 그럭저럭 성공했던 건 순전히 작가가 로버트 랭든을 걸레 삼아 그의 길을 꼼꼼하게 닦아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범인에게 이렇게 협조적인 탐정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니까요. 전 지금까지 추리물이라는 건 탐정과 범인의 두뇌게임인 줄 알았습니다.

추리물로서 이야기는 많이 게으른 편입니다. 전편처럼 납치된 성직자들이 차례차례 특정한 방식으로 살해당한다는 기계적 설정을 깔고 거기에 퀴즈 풀이를 끼워넣은 구조인데, 이건 정말 30년대 라디오 연속극이잖아요. 게다가 이 단순한 이야기에 무게감을 부여하기 위한 지식들이라는 게 참 별 게 아닙니다. 서구 문화사에서부터 현대 물리학까지 망라하고 있으니 겉보기엔 폼이 좀 나는 것 같지만 모두 관련 서적을 한 30분만 읽어도 커버할 수 있는 얄팍한 지식에 불과하고 여기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가고 있지 못해요. 역시 전편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와 악마]는 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우선 댄 브라운에겐 아무리 매서운 비판가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재능이 하나 있는데, 그건 그가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이야기를 쓸 줄 안다는 것이죠. 영화판 [천사와 악마]에도 그의 재능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데이빗 콥과 아키바 골즈먼이라는 두 베테랑이 이를 박박 갈면서 썼음이 분명한 각본은 이 이야기를 꽤 잘 엮어내고 있어요. 역시 칭찬보다는 ‘니들이 고생했다’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각본이지만요. 론 하워드 역시 이 결함이 심각한 이야기를 적절한 액션을 섞어가며 나쁘지 않은 속도로 끌어가고 있고 배우들 역시 너무 무리하지 않으며 프로답게 연기의 균형을 잡아줍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보 같은 탐정과 괴상한 스토리 전개, 얄팍한 지식에 질린다고 해도 2시간 동안 바티칸과 로마 관광은 확실하게 하니까 관객들로서도 특별히 손해볼 건 없는 일이죠. (09/05/06)

DJUNA

기타등등

영화 속에서 로버트 랭든은 라틴어도 서툴고 이탈리아어는 전혀 못하더군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연구는 어떻게 했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