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Gravity (2013)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는 고전적인 조난이야기입니다. 갑작스러운 재해로 배를 잃은 두 선원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모험을 한다는 이야기죠. 단지 그는 이 이야기의 무대를 우주로 옮겼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무작정 SF로 분류할 수는 없어요. 우주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상황이나 기술은 이미 존재하니까요. 이 영화에 가장 가까운 종류라면 역시 당시의 관점에서 우주에서 일어난 재난을 그린 존 스터지스의 [Marooned]를 들 수 있겠지요. 단지 [Marooned]와는 달리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난당한 우주비행사의 관점에서 전개됩니다.

지구 궤도의 무중력 상태를 사실적으로 그린 몇 안 되는 영화입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아폴로 13]과 같은 얼마 안 되는 예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비티]처럼 이 상황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그린 영화는 거의 없지요. 그런 영화의 제목이 [그래비티]라는 게 아이러니컬하긴 합니다만. 영화를 본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그 때문에 [제로 그래비티]나 [각운동량]이 더 어울리는 제목일 것이라고 농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 제목은 오디세우스의 모험담 제목을 [이타카]라고 붙이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모험 끝에 도착해야 하는 목적지가 제목인 것이죠. 그리고 보기와는 달리 중력이 아무런 역할을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인공이 무중력 상태에 있다고 해서 중력에서 벗어난 건 아니죠. 그들이 계속 궤도 위를 돌고 있는 것도 중력 때문이고 주인공을 위협하는 것도, 도움을 주는 것도 중력입니다. 단지 우리가 지표면에서 누리는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을 뿐이죠.

영화는 극히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꼼꼼하게 과학적인 사실과 규칙만 따진다면 이상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왜곡한 것이고 일부는 실수일 텐데,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보고 말한다면 최종 결과물은 [다이 하드]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무중력 상태에서 [다이 하드]와 같은 모험담을 찍는 영화팀을 상상해보세요. 그들은 액션 장면은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 물리법칙을 왜곡하기도 하겠지만 여러 방법을 동원해 지상에서는 당연한 1G의 중력 환경을 모방하려 할 것입니다. [그래비티]는 바로 그 반대 방향을 취한 영화입니다. 하여간 이 이상한 설정들은 재미의 일부입니다. 수많은 과학도나 SF팬들은 이 이상한 설정을 지적하거나 설명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테니까요.

이 정도면 차갑기 짝이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정반대로 [그래비티]는 관객들의 감수성을 팍팍 자극하는 영화입니다. 이를 위해 쿠아론은 새로운 이야기와 주제를 불러오는 대신, 될 수 있는 한 이 이야기를 원형적으로 만듭니다. 이 영화의 인간 드라마를 어떻게 분석하려고 해도 결국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에 도달한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영화가 사용하고 있는 스토리 도구, 상징, 테마는 거의 드러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알폰소 쿠아론과 그의 아들 호나스 쿠아론이 쓴 각본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뻔하다면 뻔하다고 할 수 있는 장치들이 결합된 결과물은 속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정확하게 관객들을 자극하고 움직이죠. 줄거리만 읽는다면 주인공 라이언 스톤의 죽은 딸 이야기는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접하면 사정은 전혀 다르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중심에는 우주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주와 인간이 만나는 바로 그 접점에 있죠. 우주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으며 그 자리에서 늘 하는 일만 합니다. 하지만 지구 표면의 얄팍한 대기권에 살던 작고 초라한 생명체인 인간이 그 거대한 세계를 만나는 순간 엄청난 드라마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가상의 과학으로 안락한 수퍼 우주선을 만들어 그 안에 주인공에 온갖 사치를 누리게 하는 [스타 트렉]과 같은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짜 위험과 진짜 모험, 그리고 진짜 악몽 말입니다. 아직까지 [그래비티]는 그 모험의 최전방에 있는 영화입니다. (13/10/23)

★★★★

기타등등
이제 무중력은 정복했으니 다음 단계가 남았습니다. 달과 화성의 저중력 상태를 그럴싸하게 그릴 용자 없습니까?


감독: Alfonso Cuarón, Sandra Bullock, George Clooney, Ed Harris, Orto Ignatiussen, Phaldut Sharma, Amy Warren, Basher Savage

IMDb http://www.imdb.com/title/tt145446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7370

    • 같은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 같은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 오옷 만점!!
      하긴 리뷰가 등록돼 있는걸 보자마자 만점을 예상했습니다.
    • 전 이상하게 제임스 카메론 영화 같았어요

      이분이 극찬했단 이유도 알겠더군요

      꼭 타이타닉 보는 기분이랄까



      여튼 sf최초로 오스카 주요부분

      받는 작품이 되었으면 합니다
    • 개인적으로는 너무 몰입해서 보느라 영화중간에 안전벨트를 찾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건 감독의 아들인 조나스 쿠아론이 그린란드에 사는 이누이트 "아닌강"이 우연히 작동한 라디오 주파수를 통해 우주 비행선의 여성과 소통하는 이야기를 담고있는 단편영화'Aningaag'를 만들었다는데 그때 목소리 출연이 산드라블록이었다고 하네요.

      부자(父子)감독의 교묘하게 계획된 연출이 무척 흐뭇하게 느껴지더군요
    • 꿈 속에서 달 위를 걸어본 적 있는데 경이롭다기보단 현실적으로 짜증나는 기분이었어요. 양 발로 착, 착, 착하고 땅을 내딪어 추진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큰 상실감을 줄 줄이야. 물론 지구에서와 똑같은 방법으로 달에서 걸은 제 잘못도 있겠습니다만.
    • 언제 올리시나 기다렸어요. 우와 별 네개!
    • 스타 트렉 얘기 하실줄 알았어요^^;; 저도 이 영화 보는 내내 <스타 트렉>을 문득 문득 떠올렸거든요. 그런데 상영관 밖으로 나오니 권교정의 <디오티마>가 생각나고.

      인류가 안락한 지구 환경을 등지고 우주로 떠날 계기가 뭐가 있을까요;; 결국 초능력자들의 베터리 소동...?^^;;
    • ㅋㅋ 리뷰 내용을 봐선 조금 편애가 있는 만점인 것처럼 느껴져요 ㅋㅋ 전 시간이 넘 빨리가서 그런가 주인공이 별로 고생 충분히 안 한 느낌?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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