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리스터 다이어리 The Secret Diaries of Miss Anne Lister (2010)


배경만 보면 앤 리스터는 딱 제인 오스틴 소설의 여자주인공같은 사람입니다. 리전시 시절 요크셔에 살았던 명망높은 집안 출신의 숙녀죠. 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그마치 4백만 단어 분량의 일기를 썼는데, 이는 새뮤얼 핍스가 쓴 일기의 세 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일기가 1980년대에 헬레나 위트브레드의 책을 통해 간신히 소개된 이유는, 리스터가 그리스어 알파벳과 수학기호를 차용한 암호로 쓴 일기의 1/6이 리스터의 동성애 편력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후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라죠. 그 때문에 리스터의 책은 '레즈비언 역사의 로제타 스톤'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하여간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리전시 시절 숙녀가 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일만 골라서 하며 일생을 보냈어요. 톰보이로 태어나, 기숙학교에서는 여자친구와 연애질을 하다가 퇴학당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독학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고, 틈만 나면 현란한 작업 기술을 발휘하며 주변 여자들을 꼬시고 다녔죠. 산업혁명이 요크셔에도 찾아오자 마초스럽기 짝이 없는 석탄채굴 산업에 뛰어들어 성공했고, 그 와중에 뻔뻔스럽게도 근처 부잣집 아가씨 앤 워커와 교회에서 동성결혼식까지 올렸답니다. 이후 아내와 함께 세계여행을 하다가 그루지아에서 죽었는데, 그 사이에 잠시 산에 빠져 피레네 산맥의 몇몇 산을 올랐고, 공식적으로 비뉴말산 정상에 오른 최초의 등반가가 되었다죠. 한마디로 남 눈치 안 보며 하고 싶은 건 다 한 사람입니다.

제임스 켄트가 감독한 BBC 드라마 [앤 리스터 다이어리]는 리스터의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까지를 커버합니다. 여자친구 마리안이 부유한 사업가 찰스 로튼과 결혼할 때부터 리스터가 앤 워커와 결혼할 때까지요.

이야기의 흐름은 리스터의 삶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른 편입니다. 드라마가 그린 이야기 대부분은 실제 리스터에게도 일어났죠. 단지 제인 잉글리시의 각본은 이 이야기를 조금 [티핑 더 벨벳]화 시켰습니다. 앤 리스터는 더 로맨틱한 사람이 되었고, 마리안 로튼과 앤 워커는 키티와 플로처럼 변했어요.

조금 불공평한 묘사죠. 리스터는 머리 좋고 매력적이고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야비하고 치사하고 이기적이기도 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잉글리시는 그 성격을 어느 정도 남겨두면서도 캐릭터의 행동과 동기를 은근슬쩍 옹호하고 있지요. 그 때문에 마리안 로튼이 손해를 좀 보고요. 생각해보면 이들 중 선택할 여지가 없었던 건 마리안 쪽인데 말이죠. 동시대인인 제인 오스틴이 말했던 것처럼, 당시 여성들에게 결혼이란 피하기 어려운 중대한 경제적 결정이었죠.

사실여부가 어떻건, 드라마는 그럴싸하게 말이 됩니다. 그건 로맨스의 관습이 가진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이야기를 끌어가는 리스터의 캐릭터가 강하기 때문이죠. 여러분도 앤 리스터 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리스터는, 보고 있으면 순진무구한 쾌락이 느껴질 정도로 사회의 고정관념을 경쾌하게 깨부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너무나도 충실하고 그걸 (시청자들 앞에서) 감출 생각이 전혀 없어서, 다른 사람이 했으면 느끼했을 고정 작업문구("바이런 시를 좋아하세요?")도 천진난만할 정도로 귀엽게 들리고요. 이렇게 비율을 맞추어놓으니까 이 사람의 이기주의나 야비함도 어린애의 무심함 비슷한 것이 되어 매력처럼 보입니다. 여전히 그 무심함의 희생자들은 딱하지만.

거의 안티 제인 오스틴인 이야기지만 여전히 드라마의 상당부분이 오스틴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도 재미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도 여자주인공들에게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건 경제적 자립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로맨틱한 선택들은 모두 경제적인 결정이기도 해요. 단지 리스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훨씬 넓죠.

영화의 장점은 BBC의 오스틴 각색물들과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잘 훈련된 영국 배우들이 리전시 시절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안에서 예스럽고 풍성한 로맨스를 터트리는 거죠. 주인공의 조건 몇 개만 바꾸었을 뿐인데,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니 신기하죠. 리스터의 이야기야 뒤늦게 발견되기라도 했지만, 당시에도 시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가 잊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들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요. (12/05/27) 

★★★

기타등등
1. 전 위트브레드의 책을, 한참 제가 서간집이나 일기에 열을 올리던 90년대 초에 처음으로 접했죠. 그 때문에 앤 리스터의 전기물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리스터에 관심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어요.

2. 사실 리스터의 작업 방식은 "바이런 시를 좋아하세요?"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복잡했죠. 하지만 "바이런 시를 좋아하세요?"가 이를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정리한 건 맞습니다.

3. 이 드라마에는 리스터의 첫사랑인 일라이자 레인의 이야기가 빠져 있죠. 그 이야기는 독립적인 드라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무척 비극적인 기숙학교 로맨스물이 되겠죠. 조금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분위기를 풍기는.  거기서 앤 리스터는 로체스터 역할. 

4. BBC에서는 이 드라마를 영국의 코미디언 수 퍼킨스가 호스트를 맡은 다큐멘터리  [Revealing Anne Lister]와 함께 방영했습니다. 리스터에 대한 정확한 전기적 사실을 알려면 이걸 같이 보는 게 좋죠. 이 작품도 재미있습니다. 


감독: James Kent, 출연: Maxine Peake, Anna Madeley, Susan Lynch, Christine Bottomley, Gemma Jones, Alan David, Richenda  Carey, Michael Culkin, Dean Lennox Kelly, Tina O'Brien,  다른 제목: 앤 리스터의 비밀일기

IMDb http://www.imdb.com/title/tt155512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8544

    •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신녀성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후손들은 쉬쉬하는 거 나중에 닮은꼴 후손이 찾는 얘기하면 재밌지 않을까요.
    • 빅토리아여왕 시대에 하고 싶은걸 다한 여성이라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네요. 듀나님이 쓰신 내용에 따르면 풀어낼 이야기가 많은 인물처럼 보이는데 어떤 창작물로도 만나본적이 없는 거 같아요. 머 저의 세계가 좁을수도 있구요. 근데 4백만 단어의 일기는 도대체 몇권 분량인가요? 가늠이 안되네요.

      기타에서 훨씬 고차원적인 작업방식이 궁금합니다.ㅎㅎ
    • [전쟁과 평화]가 56만 단어라죠.

      주로 책 이야기로 시작한 건 맞는데, 레파토리가 넓고 과정도 복잡했다고 하더군요.

      빅토리아 여왕 시대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죠. 여왕의 재위 기간을 몇 년 겪긴 했지만.
    • 덕분에 간만에 수 퍼킨스를 봤네요. 이 언니도 아웃한 레즈비언이죠.
      다큐가 재밌네요. 라틴과 그리이스어로 암호라니까 '잘난 척하네 (show off)'라고 투덜거리거나, 잊혀려서 비극으로 끝난 일라이자 레인을 보며 더 감정이입을 하는 걸 보니 이 언니도 무지막지하게 잘 나가고 저만 아는 주인공보다는 좀 힘 없고 맘 약한 쪽에 더 동질감을 느끼는 듯해요.
    • 얼마전 뮤지컬로도 나온 엘리자베트 황녀가 떠오르네요. 그때 그시절에 자기가 하고 싶었던걸 다 하면서 지냈다니..(그것도 왕실 집안이 아닌 여성이!!!)

      일기나 편지를 많이 남긴 사람들 혹은 상위계층이야 이렇게 발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을거 같아요.
      아무쪼록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발견되면 좋겠어요.ㅎㅎ
    • - 듀나님의 첫문장을 제맘대로 읽었네요. 제인오스틴시대 사람이라고 후루룩 읽고선 이 여왕의 시대엔 흥미로운 여성들이 많이 출현했네 하면서요.
      - 대략 56만 단어의 8배네요. 세상에...기록에 게으른 저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나 일상을 꼼꼼하게 기록할수 있는 에너지가 부럽네요.
    • 제인 오스틴 시대 사람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조금 뒤. 오스틴도 빅토리아조 사람이 아니죠.1817년에 죽었거든요.
    • 엘리자베트 황후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죠. 물론 불행의 상당 부분은 자기 기질이 자초한 것이기는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람이어서 오히려 불행했달까요. 똑똑하고 재능도 많았지만 주변의 환경에 맞서 뭔가 변혁을 이루어낼 에너지는 부족했던 사람이었는데 유럽 왕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합스부르크 가에 시집가지 않고 보통 귀족 집안에 시집갔다면 개인적으로는 더 행복하게 살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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