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카피하다 Copie conforme (2010)


영국인 작가 제임스 밀러는 [Certified Copy]라는 에세이집으로 이탈리아에서 문학상을 받습니다. 이탈리아에 온 그는 잠시 시간이 남은 동안 그곳에 사는 프랑스인 여성과 데이트를 하게 되지요.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밀러의 책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그건 예술작품의 복제와 독창성, 가치에 대한 것입니다. 밀러는 훌륭한 복제품은 원본만큼의, 또는 원본과는 다른 고유의 가치가 있다고 믿고, 상대방의 의견은 당연히 다르죠.


이런 식의 대화로만 구성되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사랑을 카피하다]는 중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잠시 홀로 남겨진 여자주인공은 이탈리아인 카페 주인과 대화를 하다가 밀러를 남편이라고 소개를 하는데, 이게 역할극으로 발전되는 겁니다. 그 순간부터 밀러와 여자주인공은 진짜 부부처럼 행동하고, 그게 영화 끝까지 갑니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혼란에 빠지죠. 이 사람들은 역할극을 하는 남남인가, 아니면 초반에 남남인 척 했던 부부인가.


여기서 정답을 찾는 건 지나치게 순진무구한 일이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내민 건 정답이 있는 퍼즐이 아니니까요. 중요한 건 양쪽의 해석의 모두가 가능하고, 거기엔 썩 그럴싸한 진실성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주인공이 나누는 토론 주제와 연결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그냥 그 상태 자체를 즐기면 되는 겁니다.


영화는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 안에 얽혀있습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제목을 단 이란 감독의 영화이며, 아마 영화 속에 최종적으로 들어간 대사들은 몽땅 번역물일 겁니다. 그리고 그 대사들은 모두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의 3개 언어의 잡탕 속에서 전달되지요. 이야기의 줄거리는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빌려온 것이나 다름 없지만, 보다 젊은 관객들은 [비포 선셋]을 떠올릴 가능성이 크고요. 물론 내용의 어느 정도가 키아스타로미의 의견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장-클로드 카리에르가 직접 출연까지 하면서 자기 의견을 전혀 섞지 않았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려나요.


얼핏 보면 난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영화의 매력은 예상 외로 단순합니다. 이 영화는 잘 먹히는 로맨틱 코미디예요. 두 사람이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지는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성적 긴장감과 전희의 쾌락은 상당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모든 걸 너무나도 능숙하게 다뤄요. 이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라는 게 당황스러울 정도죠. 영감, 지금까지 이런 걸 하고 싶어서 얼마나 갑갑했으려나요. (11/05/12)


★★★☆


기타등등

1. 쥘리엣 비노슈는 이 영화로 칸 여우주연상을 받았죠. 3개언어로 연기한 것도 분명 수상에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상대역인 윌리엄 쉬멜은 사실 영화 배우가 아니라 오페라 가수죠. 


2.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증명서]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지만, 밀러의 책 제목이 가진 의미를 생각하면 이 제목은 사실 오역이죠. [사랑을 카피하다]라는 번역 제목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단지 여전히 좋은 제목은 아니에요.

 

감독: Abbas Kiarostami, 출연: Juliette Binoche, William Shimell, Jean-Claude Carrière, Agathe Natanson, Gianna Giachetti, Adrian Moore, Angelo Barbagallo, Andrea Laurenzi, Filippo Trojano, 다른 제목: 증명서, Certified Copy


IMDb http://www.imdb.com/title/tt1020773/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4388

    • 윌리엄 쉬멜은 EMI 에서 나온 무티 지휘의 [돈 지오반니]의 주역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디스코그라피가 없는 가수죠. 실제 극장에서는 좀 더 활발히 활동한 것 같지만...최근에 핸델의 [헤라클레스] 영상물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꽤 좋은 공연을 보여줬었던 기억이 납니다.
    • 흐음 아이디어 자체는 재미있네요 짜가에 진품만큼의 가치가 있느냐 하는 주제에서 짜가 결혼도 진짜 결혼만큼 의미가 있느냐 하는 얘기로 넘어가는가 보군요.

      그런데 이런 "연기" 와 남의 문학 작품을 베끼는 것과는 "진짜" 라는 개념의 정의가 아주 다르지 않나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얼핏 들으면 그럴 듯 하지만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스리슬쩍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아뇨. 밀러가 주로 다루는 건 문학적 표절이 아니라 미술 복제품이에요. 거기서 조금씩 주제를 넓혀가는 거죠.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 '영감, 지금까지 이런 걸 하고 싶어서 얼마나 갑갑했으려나요.'
      하하 이 문장 즐겁네요. 키아로스타미는 늘 아련한 감흥을 주는 이름인데 기대가 높아집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Certified copy가 간단히 '등본'이라 되어있는데 것도 느낌은 살지 않는 것 같아요. 보증된 복제품? 으..
      문득 'Lost in translation'이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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