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헤븐 (2011)


장진이 사후세계에 대한 영화를 하나 들고 왔습니다. 제목은 [로맨틱 헤븐]. 안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소재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다들 사연이 있더군요. 장진의 경우는 결혼 이후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그도 여기에 대해 아주 치밀한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그리는 천국은 진지한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 가벼운 소망성취 판타지에 가까워요. 미래나 영원에 대한 기대가 없고 과거의 짧은 순간에 사로잡혀 있는 자잘하고 평범한 존재들을 위로하는 곳. 


특별한 주인공이 없는 앙상블 영화입니다. 이야기는 몇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고 각기 주인공이 달라요. 엄마에게 골수이식을 해줄 수 있는 살인용의자를 쫓는 여자, 그 여자를 좋아하는 택시운전사, 병으로 아내를 잃은 변호사, 그 변호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전과자... 이들의 행로는 챕터마다 조금씩 엇갈리고, 결국 몇 명은 목숨을 잃거나 가사상태에서 천국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신을 만나죠. 


전 장진의 천국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영원히 살기엔 끔찍한 곳이에요. 그곳은 끝없는 목장 위에 세워진 요양원이나 정신병원에 가깝습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정신병원을 생각해보세요. 사실은 더 나쁩니다. 필립스 미니 컴퍼넌트를 들고 하는 일 없이 여기 저기 널려 있는 벤치나 소파를 오가며 헤드셋으로 천국이 선정해준 음악을 들어야 하는 곳이죠. 주변엔 전투 병기 흉내내는 임수정도 없고요. 영원히 오지 않을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 대기실 같달까. 왜 영화가 그리는 천국은 이렇게 파스텔 조로 밍밍한 곳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조용기 같은 인간들이 천국이라고 상상하는 대형교회 VIP 사교 클럽보다는 억만 배 나은 곳이겠지만. 


그래도 이곳은 장진이 그들의 과거를 버무려 감상적이고 종종 감동적인 멜로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줍니다. 저에게 이런 멜로드라마는 대부분 너무 달아요. 거의 일본적으로 느껴지는 엉뚱함은 재미있기도 하지만 유머의 기반이 약하다는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종종 장진식으로 반짝이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의 개성에서 장단점을 분리해내는 건 조금 어렵습니다. 그의 공헌과 배우의 공헌을 구별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고요.  


언제나처럼 배우들은 좋은 편입니다. 오란씨 광고로 유명해진 김지원이 가장 걱정되는 캐스팅이었는데, 결과는 예상 외로 좋아요. 캐릭터가 조금 이나영스럽게 엉뚱해서 연기지도가 따라주면 초보자가 비교적 쉽게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긴 했지만요. 제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배우는 심은경입니다. 연기할 거리가 많은 역할이기도 하지만, 대사, 드라마, 연기, 상황이 함께 모여 꽝하고 터지는 부분이 좀 있어요. 


[로맨틱 헤븐]은 여러 면에서 장진의 전작 [퀴즈 왕]와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엉뚱하고 산만하고 장황하고 감상적인 앙상블 영화죠. 다행히도 [퀴즈 왕]만큼 심하게 망가진 영화는 아니에요. 소재와 주제는 보다 잘 관리되고 있고 그 안에서 배우들도 더 잘 살아있지요. 단지 모든 게 너무 달콤한 판타지의 영역 안에서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속아주고 싶어도 속아지지 않는 뻔한 거짓말을 보는 느낌이 강합니다. 이건 장진 영화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천국을 다룬 판타지 장르의 공통된 약점이기도 하죠.(11/03/17)


★★☆


기타등등

감독은 반기독교적, 반성경적 소재라 민감했다고 하던데, 아이고, 그런 것까지 신경쓰면서 어떻게 천국 소재 영화를 만든단 말입니까.


감독: 장진, 출연: 김지원, 김동욱, 심은경, 이순재, 김수로, 임원희, 김준배, 유선, 한재석, 김무열, 이한위, 김원해, 다른 제목: Romantic Heaven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Romantic_Heaven.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6558

    • 반성격적은 반성경적을 얘기하시는거죠?
    • 네, 이건 어떻게 된 거죠. 이 부분은 기사에서 컷 앤 페이스트해서 붙였는데!
    • 그도 아주 여기에 대해 아주 치밀한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주'가 하나 빠져야 될 것 같아요.
    • 심은경 양이 또 장진 영화에 나왔군요... 퀴즈쇼는 안 봤는데 요건 봐야겠네요!
    • 한국에서도 마침내 필름 블랑 (Film Blanc) 이 만들어졌군요 장진 감독이 만들었다는 게 납득이 가기는 합니다. 그런데 장감독은 [천국은 기다릴 수 있다] 라던가 [천국에의 계단] 같은 이 장르의 기존 영화들을 어느 정도 참조했을까요?
    • 참고 별로 안 했을 거 같습니다. 오히려 일본 감수성이 물씬 느껴졌어요.
    • 코레에다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같은 무심하게시리 너무나 일상적인 황천인가보군요.
    • 꼭 구분 지을 필요는 없겠지만, 장진 작품은 연극으로 영화 찍는 느낌이랄까요? 아는 여자는 정말 재밌게 봤는데ㅎㅎㅎ(첫댓글의 감동ㅠ)
    • 퀴즈쇼->퀴즈왕...
      익스트림무비쪽에 올라온 리뷰에
      어느 분이 지적하셨어요..^^
    • 저 아가씨 묘하게 이국적이에요.
      7-80년대 책받침에 나올만한 홍콩 여배우의 얼굴.
      그래서 오란씨 모델을 했겠지만요.
    • 언젠가부터 장진 감독의 의도인지 한계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장진 영화'로 정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망하지만 저는 상관없어요. 기대치가 명확해졌다고나 할까. 기대 안 할 부분에 대해서 정말 철저하게 기대를 버리고, 딱 어떤 부분만을 기대해요. 전자가 예상보다 좋으면 놀라며 조금 좋아하고, 후자는 늘 기대한 만큼 이상은 채워주더군요. 그래서 남에게는 절대 추천은 못하겠지만 기대에 딱 맞아떨어지는 '퀴즈왕'을 즐겁게 봤습니다. 그 장단점-저의 포기 부분과 기대치-은 듀나 님이 '로맨틱 헤븐'에 써주신 것과 유사해요ㅎㅎ 이번에도 저 부분 기대 안 하고, 이 부분만 기대하면 되겠구나 싶어서 보러갈 예정입니다. 아마도 저는 즐겁게 볼 테고, 남에게 추천을 하지는 못하겠죠;;

      참, 감독도 조금 홍보에 언급하던데, 김수로의 진지우울 연기에 관심이 많았던 저로서는 그 부분에 큰 흥미가 있기도 합니다. 포기하는 부분이 '퀴즈왕'보다 낫다고도 하시니.. 저는 퀴즈왕보다 즐겁게 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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