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 동 (2010)


백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아가들아, 제발 콘돔을 써요. 왜 이 문명의 이기를 외면하는 건가요. 자기 미래를 가지고 도박을 하면 섹스가 더 재미있나요. 재미있다고 칩시다. 그러다 덜컥 임신하면 책임을 누가 질 건데.


그러나 대부분 한국영화 주인공들이 그렇듯, 혜화와 한수는 콘돔 없이 놀았고,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나 버렸습니다. 혜화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고 애를 낳았는데, 아이는 다음 날 죽어버렸다죠. 5년 뒤, 동물병원의 미용사로 일하며 구출한 유기견들과 함께 살아가던 혜화 앞에, 다리를 다쳐 의병 제대를 한 한수가 충격적인 뉴스와 함께 찾아옵니다. 둘의 아기가 안 죽었대요. 어떤 교수 부부가 입양해서 키우고 있대요. 


아, 얄미워. 관객들은 정말 한수를 좋게 볼 수가 없습니다. 혜화가 임신했을 때는 시치미 뚝 떼고 있다가 결국 캐나다로 도망가버리더니, 지금 와서 잘 살고 있는 애에게 무슨 깽판이랍니까. 정말 그래선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이 당연한 반응은 조금씩 뒤로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한수는 결코 무신경한 악당이 아닙니다. 정반대죠. 그는 오히려 지나치게 예민해서 민폐인 친구입니다. 어느 쪽이건 주변 사람들에겐 좋지 않아요. 그래도 후자는 이해해줄만 합니다. 


[혜화, 동]은 그들이 18살이었던 5년 전과 23살인 현재를 번갈아 오가며,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금씩 이야기합니다. 드라마의 주체는 혜화이고, 미스터리의 주체는 한수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한수 때문에 혜화가 고생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쉴드를 쳐주려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한수가 잘못했어요. 


이 진부해보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혜화와 한수는 계속 관객들의 시선을 끕니다. 영화의 서술방식과 드라마의 전개 과정이 만들어내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때문이지요. 분명 관객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이야기 뒤에 숨어 있고, 그 미지의 요소 때문에 혜화와 한수의 이야기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러다 이 둘이 본격적으로 사고를 치기 시작하면, 여기서부터는 그냥 서스펜스물입니다. 물론 이들의 작은 세계가 버텨낼 수 있는 스케일을 벗어나지는 않아요. 그 한계 안에서 해결하기 위해 이야기가 지나치게 복잡해졌다는 생각도 잠시 들긴 했습니다만.


상황도 상황이지만, 캐릭터 묘사 자체도 좋습니다. 한수는 민폐지만 그래도 동정이 되고 관심이 가는 민폐입니다. 그리고 혜화는 거의 고전 문학의 여자주인공과 같습니다. 풍부한 감정을 품은 아름다운 존재로, 아무리 세상 구석에 내쳐져도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유다인과 유연석의 캐스팅과 연기도 캐릭터에 완벽하게 맞습니다. 특히 전 유다인이 이 정도 연기를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대가 [맨데이트]에 출연하며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할지니...


[혜화, 동]은 반려동물에 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원래 아이디어 자체가, 감독이 유기견 관련 TV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다가 만난 여자분에게서 나왔다고 하더군요. 영화 내내 유기견들은 꾸준히 혜화의 삶 주변을 맴도는데, 이들은 혜화의 이야기에 훌륭한 메타포가 되어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극적 도구이며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건 영화는 대한민국에서 반려동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11/02/03)


★★★☆


기타등등

감독에 따르면 [혜화, 동]이라는 제목은 서울의 혜화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혜화라는 이름을 짓고, 거기에 어떻게도 해석될 수 있는 '동'이라는 글자를 붙여 제목을 만들면서 그 지명을 떠올리지 않았을 가능성은 그냥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감독: 민용근, 출연: 유다인, 유연석, 박혁권, 다른 제목: Re-encounter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Re-encounter.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4453

    • 다리를 다쳐 조기 전역을 하게 되었다면 의가사 제대가 아니라 의병 제대겠네요.
    • 현역 군인이 자기가 직접 집안을 보살펴야 하는 가정 사정 때문에 국방부의 허가를 받아 예정보다 일찍 제대하는 것. 음, 그렇네요. 근데 간담회에서도 의가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 듀나/ 본래 군필한 남성들도 의병 제대랑 의가사 제대 많이들 헷갈리고,
      귀찮아서, 또는 같은 건줄 알고 다들 의가사 제대라고 말하곤 해요.
      군 간부나 행정병이 아니라면 같은 건줄 아는 사람이 더 많을 걸요.
    • 개인적으론 자신의 목숨과 주변사람들의 건강을 놓고 도박하는 골초들이 더짜증;
      제친구는 '콘돔섹스는 옷을 다입은채로 샤워하는 것 같다'고 하던데.
      암튼 피임없는섹스는 이기적인 남자보다 여자쪽이 더 대단하다는 생각;;
      뭐...책임문제를 따진다면....혼전섹스자체를 해서는 안될지도 모르겠지만!!
    • 오 왜인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린 사람들이 콘돔 없이 섹스한 결과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원래 좀 피하지만요.
    • 쉴드친다는 표현... 전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전 저 말이 '끼얹나?' 이런 말처럼 잠시 지나가는 인터넷 유행어-즉 정확한 의미를 몰라도 그냥 대충 알아듣고 지나가면 얼마 후 사라질 말-인줄 알았는데, 이런 리뷰에서까지 쓰일 정도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곳에서 두루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나보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저 표현을 듀나님께서 쓰신 의미 그대로 이해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작년에 잠깐 들은 풍월이나 문맥을 따져보면 변호한다는 의미겠지만, 일단 낯선 표현이라 그런지, 아님 제 독해력의 문제인지... (예전에 들은 바로는 거의 '맹목적인 수준의 편들기'의 의미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서는) 어느 정도의 강도로 변호하는 것을 쉴드친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변호의 주체가 감독인지 듀나님인지도 헷갈려요. 범용의 용어 대신 굳이 저 표현을 선택해서 쓰신 걸 보니 제가 이해하지 못한 의도 또는 의미가 있으신 게 아닐까 곱씹어볼 뿐이죠.

      괜히 우려됩니다. 지금도 이럴진데 몇년 후에도 저 표현의 의미나 뉘앙스가 지금 듀나님이 쓰신 것과 같을지, 아니 그때까지도 정말 저 표현이 살아남아 있을지 말이죠.
    • civet/ 이 리뷰에 쓰인 경우라면 아시는 맥락대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는 것 같아요. 한수에 대해 아무리 맹목적으로 편들기를 해주려고 해도 명백한 잘못이 있어 한계가 있다는 거니까.
      전문지에 기고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온라인 공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인데, 저 정도의 인터넷 용어 사용은 그다지 거슬릴 것 없지요. 텐시아 같은 데에서는 이보다 더 가볍고 빠른 용어도 아무렇지 않게 적당히 녹여내서 쓰고 있지 않던가요?
    • 전 윈터스본 보고 난 직후라.. 한수가 더더욱.. 민폐처럼 보이더군요.
      어른이 되는 건 확실히 감수성보다는 냉철한 이성과 객관적인 시선을 앞서게 하는 과정 같아요.
      아 그리고.. 콘돔을 사용하고도.. 임신이 되는 경우가 있지 않나요?
      프렌즈에서 로스와 레이첼도 그랬고..
      제 친구도 그랬었거든요. 물론 그 친구의 말 뿐이라 검증은 못하지만 분명 콘돔을 사용했다고.. ^^;; 너무 적은 확률이지만 배제할 수 없진 않을까요?
    • 배제할 수 없죠. 그래도 걔들은 안 했을 걸요.
    • 글쎄요. 거기에도 논란이 좀 있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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