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2011)


저에게 이준익의 [황산벌]은 정통사극입니다. 전 이 영화가 특별히 역사를 심각하게 뒤틀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시 고구려, 신라, 백제는 모두 다른 언어를 썼을 테니, 이들에게 구별되는 사투리 대사를 준 건 오히려 역사에 가깝습니다. 전투의 진행과정은 전적으로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어차피 상세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니 그 정도야 충분히 허용할 수 있지요. 어차피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니 당시의 상황을 21세기의 국제 정세와 연결하는 것을 과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넘기고 나면 영화에는 전쟁이라는 피투성이 행위에 대한 심각하고 사실적인 고찰만이 남습니다. 전 아직도 요새 나오는 '퓨전 사극'을 비판하기 위해 [황산벌]을 예로 드는 걸 좋아합니다. 


[황산벌]의 속편인 [평양성]은 어떨까요. 얼핏보면 [평양성]은 전작의 거의 모든 것을 물려받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모두 사투리를 씁니다. 시대착오적인 코미디와 역사적 사실이 섞여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국제정세와 만납니다. 하지만 전 영화를 보면서 이 작품이 전작의 무게까지 이어받지는 못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영화는 668년에 일어났던 평양성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때 나당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가 멸망했지요. [황산벌]처럼 압축된 전쟁 영화가 나오긴 조금 어려운 소재입니다. 한 달 동안 길게 끌다가 내부의 배반으로 끝난 공성전입니다. 스펙터클이 부족하고 뚜렷한 주인공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준익은 여기에 상상력을 조금만 더하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준익은 평양성 전투에서 신라의 역할과 동기를 강조합니다. 김유신은 영화 내내 복잡한 정치적 계산으로 바쁩니다. 그는 단순히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게 아니라 고구려를 온전한 모습으로 신라에 흡수해 앞으로 있을 당과의 전쟁에 대비하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종종 고구려의 정권 유지를 바라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는 현재 한반도의 정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민족주의적인 소망성취 판타지에 더 가까워보입니다. 


그 결과 [평양성]은 [황산벌]과는 달리 꽤 물렁한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으로 끝난 차가운 역사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이야기를 같은 민족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좋게좋게 풀어간다는 동화로 변형시킵니다. 듣기 좋을지는 몰라도 그리 진짜처럼 들리지는 않습니다. 욕망과 희망이 역사의 무게를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코미디와 드라마를 결합시키는 방법도 [황산벌]보다는 못합니다. [평양성]은 [황산벌] 때 의도적으로 지켰던 규칙을 스스로 깨고 있습니다. [황산벌]은 꼭 코미디를 넣을 필요가 없을 때는 진지했습니다. 계백의 부인이 나오는 마지막 회상 장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현대 표준어와 사투리의 충돌이 빚어내는 희극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은 심각한 메시지를 담은 강렬한 드라마였습니다. 하지만 [평양성]에서는 연기와 설정이 과장된 코미디로 기울어 있습니다. 아마 다시 사투리를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코미디 효과가 살지 않을 거라고 걱정했던 모양입다만. 그리고 전 한국 배우들이 중국어 대사를 하려고 노력하는 장면들 대부분이 심하게 거슬렸습니다. 


영화의 장점은 대부분 [황산벌]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나온 민초들의 관점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 이번에도 전쟁터로 끌려온 거시기가 주인공인 스토리 라인 대부분에 공감했습니다. 고구려 여자 병사와의 '남남북녀' 로맨스는 조금 억지로 끼워맞춘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잘 흘러가고 두 배우의 화학반응도 좋은 편입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평양성]은 소망 대신 현실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더 좋은 영화입니다. (11/01/23)


★★☆


기타등등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서기를 쓰던데, 굉장히 신경 쓰였습니다. "660년 황산벌에서는!" 이런 식이죠. 


감독: 이준익, 출연: 정진영, 이문식, 류승룡, 윤제문, 선우선, 이광수, 강하늘, 김민상, 김한보, 최준석, 다른 제목: Pyongyang Castle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Pyongyang_Castle.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5396

    • '코미디와 드라마를 결합시키는 방법'은 '~방법도'가 맞지요?
    • 하지만 이준익'을' 여기에 상상력을
    • 황산벌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김선아가 나오는 장면은 무척 좋아합니다.
      말씀대로 정말 강렬했죠. 김선아의 한이 서린 절규도 좋았고.
    • 황산벌은.. 네 그랬죠. 하고 싶은 비정한 우직한 이야기가 좋게 있었고, 개인적으로 많이 감점을 준 건, 당의정 설탕옷을 바르려고 코믹 요소를 많이 넣었는데, 이야기와 완전히 따로 놀았기 때문이에요. 평양성은 우직한 이야기에 당의정 설탕옷을 잘 발랐길 기대했고, 아니라면 최소한, 황산벌만큼 따로 놀아도 우직한 이야기가 그만큼만 됐다면 만족했을 텐데.. 그것조차 흔들렸나보군요. 듀나 님 평 보니 어떤 느낌일지 정확히 알겠어서, 관심 끕니다;; 감사해요
    • 단순히 고구려 남부영토만 얻은것 갖고 삼한일통의 위업을 달성했다고 떠들어댄 고대 신라의 역사를 가진 우리들로서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든 비틀어 버리고 싶었겠죠. 고구려=북한, 신라=남한, 당=미국 뭐 이런 구도 말입니다.
      도대체 김춘추부터도 당나라와 전후 국경선을 합의할때 대동강을 경계로 한다고 협정을 맺었는데 말이죠. 애초에 신라의 목표는 백제였던 겁니다. 당이 그토록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고구려를 치는데 도와주는 걸 미끼삼아 당군을 이용해서 백제를 무너뜨렸죠. 백제 하나 치지 못해서 당나라 군을 이용해야 했던 신라로서야 뭐...어쨌든 이건 남는 장사긴 합니다만)

      비록 천 수백년전의 역사긴 합니다만, 정말 차가운 현실이죠. 근데 이런 차가운 과거에도 한 점 틈이 있었습니다. 신라가 고구려 공격에 정말 미온적이었다는 것이죠. 특히 평양성 공격때는 거의 당군 혼자서 전쟁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적인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았나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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