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러브 Io sono l'amore (2009)


사진을 배우겠다며 런던으로 유학갔던 딸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돌아와서 엄마에게 여자애인이 생겼다고 몰래 고백합니다. 전형적인 90년대 커밍아웃 스토리의 시작이지요.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커밍아웃한 딸이 아니라 그 딸의 엄마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행복해하는 딸을 보는 엄마는 궁금해집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뭐였지? 나도 딸이 느끼는 감정을 지나쳤던 적이 있었던가?


얼핏 보면 엠마 레키의 삶은 모두가 부러워할만 합니다. 러시아 미술품 복원가의 딸이었던 그녀는 이탈리아 방직업자의 아들 탄크레디의 눈에 들어 이탈리아로 시집왔지요. 그녀는 그 뒤로 호사스러운 저택에서 레키 성을 가진 아이 셋을 낳으며 이탈리아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왔습니다. 이게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면 뭡니까. 


하지만 [아이 엠 러브]는 이탈리아판 [신데렐라]가 아니라 이탈리아판 [채털리 부인의 연인]입니다. 엠마는 딸 베타의 커밍아웃 이후 자신이 살고 있는 이 호사스러운 세계가 감옥에 불과하고, 자기 자신도 탄크레디가 수집한 이국적인 예술품 이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의 절친한 친구인 요리사 안토니오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전형적인 D.H. 로렌스 풍으로 흘러갑니다. 우린 모두 이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 엠 러브]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전통을 잇는 이탈리아 영화이기 때문에, 우리는 엠마의 로맨스만큼이나 그녀를 가두고 있는 환경의 호사스러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레키 가문은 엠마에게 감옥일 수 있어도 호사스럽고 아름다운 감옥입니다.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좋은 교육을 받은 진짜 교양인이며 주변에는 오로지 아름다운 것들만 있습니다. 전 그런 감옥에 기꺼이 갇히겠습니다. 가끔 안토니오의 식당에 가서 그의 요리를 먹을 수 있다면. 영화에서 보면 그의 요리는 섹스보다 더 좋은 것 같아 보이니까요.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누리고 있는 부의 혜택이 레키 가문을 붕괴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레키는 돈밖에 모르는 평민 출신의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오로지 이익을 위해 일했고, 그를 통해 그가 맨손으로 쌓아올린 가문과 사업체가 아들과 손자를 통해 이어지며 영원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탄크레디와 손자 에도아르도를 거치면서 부서져 버립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교육받고 할아버지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탄크레디와 에도아르도는 이익과 명예, 의무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레키 가문이 어느 방향을 택해도, 그가 영원하리라 믿었던 이 세계는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꼭 경제적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레키 가문의 붕괴는 철저하게 미학적이고 감각적인 과정을 통합니다. 탄크레디의 예술 애호 취향은 그의 감정을 박제화합니다. 엠마는 안토니오가 만든 음식을 통해 아들의 친구를 애인으로 받아들입니다. 베타야 '예술학교에 딸애를 보냈더니 레즈비언이 되어서 돌아왔더라' 이야기의 표준 주인공이고요. 세상에서 가장 난처한 입장에 빠진 에도아르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분석은 피하겠지만요. 할아버지 레키는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적어도 그들이 사는 이 비스콘티 풍의 세계에서 이런 변화는 자연스러운 순환과정인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 틸다 스윈턴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영국배우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러시아인 여성으로 나와 악센트 섞인 이탈리아어로 대사를 읊는 걸 보면 분명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영화 내내 이 언어의 서커스가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 존 애덤스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용된 곡 상당수가 (또는 전부가?) 기존곡의 재활용이기 때문에 그의 첫 영화음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나 그래도 적절하게 선정된 그의 음악이 훌륭한 영화음악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감독인 루카 과다니노에 대해서는 아직 무엇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 [아이 엠 러브]라는 영화에서 그의 개성을 완전히 분리해내지 못합니다. 솔직히 영화의 절반 이상이 소재와 전통 안에서 스스로 태어났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캐릭터들의 감각과 감정을 거의 즉물적으로 그려내는 영화의 민첩하고 자유로운 터치는 그의 것이라고 짐작해봅니다. (11/01/13)


★★★☆


기타등등

1. 시사회 때 상영본은 화질이 아주 나빴습니다. 블루레이로 다시 볼 기회를 찾는 중입니다. 극장개봉 때 개선될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 왜 요새 영화하는 사람들은 모두 'Am'을 '엠'이라고 쓰는 겁니까?


3. 우하 스프를 먹고 싶어졌습니다. 검색해보니 흔한 러시아 가정식이라고 하던데.


감독: Luca Guadagnino, 출연: Tilda Swinton, Flavio Parenti, Edoardo Gabbriellini, Alba Rohrwacher, Pippo Delbono, Diane Fleri, Maria Paiato, Marisa Berenson, 다른 제목: I Am Love


IMDb http://www.imdb.com/title/tt122623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1151

    • 우아아 블루 레이 2,3일 있으면 도착해요 이건 꼭 회원리뷰 올리겠어요 2010년 극장공개작 중 제일 보고 싶었는데 결국 놓친 영환데
    • 전 고화질로 봤었는데 정말 멋진 경험이었지요. Q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 비스콘티의 <레오파드>에서 알랭 들롱이 탄크레디 역을 맡았죠. 이 영화에서
      이름이 같은 캐릭터가 있는 것 역시 <레오파드>에 대한 오마주일까요?
    • 현대 한국어에서 'ㅐ'발음은 실종된 것이 아닐까요. 영어로 된 한국어 교재에서 얼핏 봤는데 40세 이하의 젊은 층에서는 'ㅔ'와 'ㅐ'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아예 기정사실화 해두었더군요. 발음이 실종되고 이제 표기도 실종되어 가는가보지요.
    • 그렇다고 개를 게라고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 그 교재에서 말하는건 ㅐ ㅔ처럼 미묘한 장단음 발음같은 부분을 신경안쓴단 말인듯..
      말할때 우리는 뭘말하는지 다 알고있죠.
    • 사실 Am이 우리나라 말로 표기할 수 있는 발음도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에 저보고 계속 am,on,in발음이 다 틀렸다고 제 발음 교정해준 미국인 영어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세 종류 다 우리나라에선 존재하지 않는 발음이랍니다. 그러니 그냥 영어로 쓰는 게 제일 확실한 거겠죠.
    • 아차차 영화얘긴 빼먹고^^ 전 틸다 스윈튼 때문에 이 영화 봤는데 그 상대역으로 나오는 남자도 분위기 좋더군요. 들판(?숲?)에서 누워있던 장면이 제일 맘에 들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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