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2010)


빚에 시달리는 택시운전사 구남은 마작판에서 만난 개장수 면가로부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받습니다. 서울에 가서 사람 하나 죽이고 오면 빚을 다 갚아주겠다는 거죠. 돈도 없고, 돈 벌러 서울에 갔다가 소식이 끊긴 아내를 찾고 싶기도 했던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구남의 이야기는 결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감독/각본가가 [추격자]의 나홍진이니 당연한 일이죠. [황해]라는 영화가 느긋하게 풀어내는 156분의 상영시간 동안 구남에게는 이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이 몽땅 벌어집니다. 보고 있으면 숨이 찹니다. 특히 구남역의 하정우는 촬영과정 중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황해]를 보면서 [추격자]의 압축된 서스펜스를 기대하면 곤란합니다. 4부로 나뉘어진 [황해]의 시공간은 훨씬 느슨합니다. 다루는 캐릭터와 입장도 늘어났고요. 구남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1,2부를 거치다 3부 초에 갑자기 제3의 인물인 태원이 소개될 때, 관객들은 호흡이 끊긴 듯한 느낌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의도된 것입니다. [황해]가 그리려는 그림은 [추격자] 때보다 크고, 그와 함께 그림 속 인물들은 작아졌습니다. 훨씬 느긋한 감상이 요구되는 영화인 것입니다. 


고전적인 필름 느와르 상황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간단해보이는 살인청부의뢰가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단순했던 모든 것들이 꼬이고 깨집니다. 등장인물들 중 그 누구도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완전히 알지 못하고, 그 때문에 카오스는 증식합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관객들 역시 조금은 어리둥절해지죠. 


이 상황은 익숙합니다. 문명과 야만, 문명과 자연의 고전적인 공식을 이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대도시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반질반질하고 얄팍한 악당(들)이 자기네 소소한 불편을 처리하기 위해 가난하고 험악한 제3세계에서 킬러들을 데려왔습니다. 하지만 일은 잘못되어 킬러들은 문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모두에게 재앙이 찾아오지요. 연변과 서울이 무대인 이야기지만, 이야기의 관점은 거의 서구적입니다. 


서구적이기도 하지만 19세기적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는 19세기 유럽, 특히 프랑스의 대중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현실의 과장'이 보입니다. 얼핏 보기에 [황해]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황해]에서 익숙한 현실성은 극도로 과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면가가 그렇습니다. 그는 거의 오페라적인 인물로, 상식과 논리를 초월한 영역에서 존재합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책에서 읽은 친숙한 이름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잔인한 영화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고문당하지요. 단지 전 [추격자] 때와는 달리 이들의 고통을 비교적 편안하게 관람했습니다. 심지어 많이 웃기도 했지요. 이들의 위치를 고려해보면 영화 속에서 겪는 일은 일종의 직업 재해라고 할 수 있으니, 오로지 무고한 희생자들만 나왔던 [추격자] 때와 관객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몰입하는 대신 관조하게 되지요. 죽어가는 사람들의 머릿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순간부터는 더욱 그렇고.


그래도 주인공 구남에게는 충분한 감정이입의 시간이 주어지고, 그는 그 시간을 잘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에는 카타르시스나 해결 같은 건 없습니다. 모든 인물들이 엉뚱한 곳에서 뻘짓을 하고 있고, 구남도 예외는 아닙니다. 거의 미국 4부작 미니 시리즈와 맞먹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그에게 분명한 극적 포인트를 잡아주지 않는 건 물론입니다. 


[황해]는 시꺼멓기가 블랙 홀을 능가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관객들을 집중하게 하는 에너지가 상당한 수준이고, 작정하고 쏘아대는 비관주의에는 자포자기의 쾌락이 담겨 있어서, 관객들에게 그렇게 불친절한 영화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오히려 영화가 타협을 거부할수록 공감의 힘은 더 커지지 않을까요. (10/12/22)


★★★☆


기타등등

조선족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모르겠군요. 영화가 그리는 세계의 사실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도 모르겠고. 둘은 다른 이야기죠. 아시겠지만. 


감독: 나홍진, 출연: 하정우, 김윤석, 조성하, 이철민, 이엘, 이영수, 이정현, 기세형, 윤병희, 전인걸, 한성용, 김록경, 다른 제목: The Yellow Sea


IMDb http://www.imdb.com/title/tt1230385/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9986        

    • 신체훼손이나 이런게 심한가요? 같이 볼 예정인 사람이 추격자 보다가 못견디고 나왔다던데(!) 가끔 고어도 별 생각 없이 보는 저로서는 이해를 못하지만, 영화를 바꿔야 할까요.
      • 도박빚이라고 단정한 건 잘못인 것 같습니다. 그건 그냥 추정에 불과하니까요. 마작 때문에 빚이 는 건 맞겠지만.
      • 저도 비자(혹은 여권)발급으로 이해했어요. 면가가 구남에게 하는 말 중에 비용을 너무 많이 받았다면서 빚쟁이들을 씹어주는 내용이 있었던 기억.
    • 보는 내내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 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적쟎게 아쉬운게 이 영화의 느낌이 너무 차다는 겁니다. 여름에 개봉하면 좋았을텐데...하는 좀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요.
    • ! 저도 겨울말고 여름에 개봉했으면 더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어요
      너무 무거웠음요.
    • 보고 '헉'한 영화입니다. 워낙에 피를 보면 몸둘바를 모르는 체질인지라...그래도 영화는 좋았습니다. 이런 영화는 보통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텐데 이상하게 이 영화는 한 번 쯤 더 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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