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피 Chappie (2015)


닐 블롬캠프의 신작 [채피]는 로봇판 [피노키오] 또는 [올리버 트위스트]입니다. 2016년, 요하네스버그 경찰은 스카우트라는 인간형 로봇을 도입해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그런데 이 로봇을 설계한 로봇 개발자 디온은 단순히 경찰 로봇을 만드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을 개발해 결국 완성해내고 말아요. 회사에서는 반대하지만 그는 그 인공지능을 몰래 실험하기 위해 폐기된 로봇을 가져오는데 그만 중간에 강도단에게 납치되고 맙니다. 그들 밑에서 그는 새 인공지능을 로봇 몸에 이식하고, 그 로봇이 이 영화의 주인공 채피입니다.

예고편을 보면서 전 이 영화가 [자니 5 파괴작전]식의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기대의 하한선으로 놨던 거죠. 다행히도 이 영화는 로봇이 번개를 맞고 영혼을 가졌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스토리 전개를 보니 암담했습니다. 전 [자니 5 파괴작전]을 SF로서 높게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영화엔 80년대식 순진한 재미가 있었고 주인공 로봇도 매력적이었지요. 하지만 [채피]에는 두 장점 모두 없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제점은 과학입니다. 한 마디로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이런 종류의 인공지능이 만들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이고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에 대한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해요. 그냥 어린애 같을 거라는 짐작이 전부. 인간성, 자아, 생명 같은 개념에 대한 생각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디온은 채피가 단순한 로봇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게 해요. 채피는 버려진 차를 그리지만 그건 그냥 주어진 정보를 물감으로 프린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각정보를 정확히 기억해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지적 존재에게 시각 예술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 따라야겠지만 그런 건 안 하죠. 이런 식으로 생각없이 이야기를 진행시키다보니 결국 처음엔 아슬아슬하게 피했던 신비주의에 빠지고 말아요. 전 막판에 채피가 자기 정신을 옮기겠다고 인간이 쓰는 신경헬멧을 뒤집어 쓸 때부터는 그냥 포기하게 되더군요.

드라마 설정도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휴 잭맨이 연기하는 빈센트는 도대체 왜 저러는 건가요. 감독에 따르면 그가 만드는 거대한 이족로봇 무스는 '정부가 고가의 거대하고 비효율적인 기계를 만들어 국민에게 엄청난 세금을 내도록 하는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넣었다던데, 정작 회사 내에선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있고, 고객인 경찰도 무시하고 있으니 그냥 어이가 없습니다. 자기네들도 목숨이 날아질지 모르는 판인데 디온을 풀어주고 그에게 온갖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강도단의 태도도 이상하고요. 한마디로 동기가 쉽게 설명되지 않는 행동 투성이입니다. 이런 것들이 한 없이 나오니 집중이 쉽지 않아요.

가장 큰 문제점은 채피입니다. 전 비인간 지성에 쉽게 감정이입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채피의 경우는 그게 거의 불가능했어요. 일단 채피에겐 인공지능 특유의 개성이 없습니다. 그냥 로봇 몸을 뒤집어 쓴 짜증나는 애인데 심지어 목소리가 샬토 코플리인 거죠. 차라리 표정이라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러기도 쉽지 않고요.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몰입하기가 쉬운 것도 아닙니다.

[채피]가 이렇게 실망스러운 이유는, 최근 들어 인공지능과 로봇에 대한 좋은 영화들이 많이 나와서 이와 비교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엑스 마키나]와 [빅 히어로] 같은 영화들요. 다들 불필요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죠. 이들에 비하면 [채피]의 이야기는 그냥 게을러 보입니다. 여전히 액션과 로봇 디자인 같은 건 괜찮지만 좋은 로봇 이야기가 되려면 그 이상이 필요하지요. (15/03/05)

★★

기타등등
강도단 멤버인 닌자와 욜란디는 디 안트워드라는 힙합 그룹의 멤버라는데 전 몰랐죠. 하여간 자기 이름을 그대로 쓰며 나옵니다.


감독: Neill Blomkamp, 배우: Sharlto Copley, Dev Patel, Ninja, Yo-Landi Visser, Jose Pablo Cantillo, Hugh Jackman, Sigourney Weaver

IMDb http://www.imdb.com/title/tt1823672/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6254

    • 블룸캠프감독 밑천 다 드러나나요

      디스트릭트9 보고나서 스필버그감독을 뛰어 넘을 인재가 될 수 있을꺼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그의 새로운 에일리언 프로젝트가 염려됩니다
    • 배경을 남아공에서 다른 데로 옮기면 본 실력(?)이 드러나지 않을까..
    • 엘리시안이 어쩌다 꼬이는 바람에 제 실력 발휘를 못한 영화가 아니라, 결국 디스트릭트 9이 어쩌다 딱 맞는 이야기여서 잘 풀렸던 걸까요. 이러면 극장에서 볼까 말까 고민이 되네요.
    • 아이맥스 예매했는데 취소해얄랑가 보네요.
    • 과학이야 거미한테 물려서 스파이더맨이 됐네 수준이지만, 사실 영화가 과학과 논리에 비중을 안 두고 있는데 그쪽에 너무 치중하고 보신 것 같네요. 채피가 자기 정신을 옮기려고 하는 부분에서 포기할 게 아니라 진작 포기했어야 맞습니다.
      과학이나 논리는 아동 영화 수준입니다. 악당도 내 장난감이 더 크고 멋진데 왜 몰라주는 거야 하는 수준의 땡깡쟁이구요.

      영화의 가치는 스타일과 그 스타일에서 나오는 독특한 정서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채피가 욜란디(여자 악당)과 침대에 이불 덮고 앉아서 동화책 읽는 장면 같은 거요. 로봇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이불을 덮어주는, 로봇을 범죄로 이용해야 마땅한 범죄자의 모습, 그 뒤론 알록달록한 조명과 낙서가 가득하고요.
      그니까 로봇인공지능 영화가, 남아공 빈민가의 현실감 있는 잔인한 범죄자들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데, 그게 알록달록하고 순정 가득한 정서로 덧칠된 그런 모습인거죠.
      범죄자들은 자기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 채피에게 이불 덮어주고 동화책 읽어주고 걷는 법 가르쳐주고 하고 있고 노란색 핑크색 총을 쏘죠. 반면 살벌하고 잔인하고 현실감 넘치는 범죄 현장 모습도 그대로 나오고요.
      그 첨단 로봇의 느낌과 빈민가의 현실적인 범죄자 세계와 알록달록 어린이 영화 같고 논리 없는 순정이 넘치면서도, 잔인하게 피가 튀는 정서가 특유의 개성을 발휘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스타일과 정서 만으로 블록버스터를 지탱할 수 잇느냐는 토론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과학과 논리가 엉망이라고 이리저리 지적하면서 까는 건 영화 흐름을 잘못 탄 게 아닌가 싶네요.
      아마 디 앤트우드라는 힙합 그룹을 알았더라면 훨씬 더 흐름 타기 쉬웠을 겁니다. 그 그룹 특유의 과장되고 바보 같으면서 잔인하지만 알록달록한 그런 스타일을 로봇 영화에 녹여내려고 닐 블룸캠프가 기획한 프로젝트 같으니까요.
      제 눈엔 디스트릭트9과 엘리시움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감독의 평균 수준은 유지하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엘리시움보단 훨 나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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