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 무비 The Lego Movie (2014)


레고사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자사 상품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수많은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들어왔습니다. 그 중 제가 좋아하는 건 거의 없어요. 일단 전 그 작품들이 척 봐도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처럼 보이는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싫습니다. 자기네들이 진지하기 짝이 없는 진짜 세계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캐릭터들도 맘에 안 들고요. 저에게 레고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이며,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을 생각이라면 그 장난감의 질감과 손맛, 무엇보다도 놀이의 즐거움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팔다리가 이상하게 휘어지는 레고 미니 피겨들이 나오는 요새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들보다 초창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단편들이 훨씬 레고답고 더 매력적이에요.

[레고 무비]가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제가 언급해온 레고 영화나 시리즈들이 부정하고 피하려고 했던 것을 모두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레고 미니 피겨들은 모두 진짜 레고 같아요. 플라스틱의 질감, 자잘한 흠, 심지어 가느다란 주물자국까지 그대로 남아있지요. 움직이는 것도 딱 레고 미니 피겨 같고요. 이들이 너무 진짜 같아서 영화를 보고 난 뒤 전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검색해봤습니다. 컴퓨터 그래픽과 스톱 모션을 결합한 거라던데 뭔 소린지 확신이 안 섭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스톱모션처럼 보여지는 것 대부분 컴퓨터 그래픽일 겁니다.

영화의 비주얼은 압도적입니다. 이 영화는 미니 피겨와 탈것, 집 정도만 간신히 레고인 [닌자고] 시리즈 따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모든 것이 레고예요! 파도, 불꽃, 연기... 하여간 공기와 물, 그리고 몇몇 결정적인 소도구들을 제외하면 모든 게 레고인 세상입니다. 레고 파도가 몰려들고 레고 폭발이 주인공을 향해 날아올 때, 영화는 거의 아방가르드 예술품처럼 보입니다. 할리우드 주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이런 표현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영화의 이야기는 흔해빠진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스타 워즈]의 짬뽕입니다. 레고 미니 피겨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에멧이라는 건축노동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작업장에서 전설의 빨간 플라스틱 물체를 발견합니다. 그의 등에 딱 달라붙은 그 물체는 사악한 독재자인 로드 비즈니스의 압제로부터 레고 세상을 해방시켜 줄 신비의 무언가죠. 엉겁결에 쫓기는 신세가 된 그를 갑자기 도와주겠다고 나선 건 와일드사이드라는 레지스탕스 요원. 이들은 신비의 벽으로 막혀 있는 온갖 레고 세계를 오가면서 로드 비즈니스의 음모에 맞서 싸웁니다.

척 봐도 극장에서 틀어주는 광고영화입니다. 일단 제목부터 [레고 무비]지요. 게다가 영화는 지금까지 레고가 만들어온 라이센스 상품들을 총동원해 등장시킵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 [스타워즈] 시리즈, DC 수퍼 영웅 시리즈, [해리 포터] 시리즈, 도시 시리즈... 눈썰미 좋은 레고 팬이라면 나오는 탈것이나 집의 부품 번호도 읊을 수 있을 정도죠. 레고 제품이야 그렇다고 쳐도 저 많은 라이센스 캐릭터들의 사용권을 따내려면 고생이 엄청났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영화는 레고 캐릭터와 세트들을 뒤섞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정말 제품 광고로 끝났겠죠. 중요한 건 영화가 거기서 멈추는 대신 이 이야기를 통해 레고 놀이의 진짜 매력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명서대로 부품을 조립하는 재미를 넘어서 스스로 창의력을 발휘해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내는 재미요. 그 때문에 영화는 무척 레고다우면서도 설명서와 함께 파는 레고 세트 상품을 은근슬쩍 놀려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건 단순히 주제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 전체에 반영됩니다. 이야기는 뻔한 패러디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순수한 스토리텔링의 재미가 있어요.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중요하지만 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연출하는 사람의 쾌락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영화에서 그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국내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접근성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최소한 최근 몇 년 동안 레고 트렌드를 따라왔고 레고의 손맛을 아는 미국 관객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전 자막으로 보았기 때문에 더빙판 번역의 수준이 어떤지 모릅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던져지는 자잘한 인용과 언급들이 온전하게 전달되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군요. 하지만 앞의 조건에 얼추 맞는 한국 관객들에게 [레고 영화]는 여전히 멋진 오락 영화가 되어 줄 수 있을 겁니다. (14/02/08)

★★★☆

기타등등
당연히 레고에서는 이 영화의 캐릭터와 탈것들, 집이 나오는 세트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컬합니다. 설명서 없이 미니 피겨 캐릭터들만 담긴 랜덤 벌크를 파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감독: Phil Lord, Christopher Miller, 출연: Chris Pratt, Will Ferrell, Morgan Freeman, Liam Neeson, Will Arnett, Elizabeth Banks, Craig Berry, Alison Brie, David Burrows, Anthony Daniels, Charlie Day

IMDb http://www.imdb.com/title/tt1490017/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9094

    • 극 중 에밋의 몸통 위에 그려진 옷위로 계속 비치는 지문자국이 내내 신경쓰였는데, (스톱 모션이라는걸 티 내려고 지문을 안닦았나?)
      마지막 장면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80년대 우주인의 헬멧 부러진 것에 이빨자국까지 너무 깨알 같아서 행복했습니다.
      안그래도 키마니 닌자고니 잔뜩 사다놓고 설명서대로 만들어서 관상용으로 전시만 해놓는 작은 아이에게 좋은 메시지를 주어서 더 좋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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