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2025)


박찬욱은 17년 전부터 도널드 웨스클레이크의 [엑스]를 영화화하겠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게 계속 엎어졌다가 결국 [어쩔수가없다]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는 동안 오랜 각본 팀이었던 정서경은 대신 이경미와 돈 맥컬러, 이자혜가 들어왔는데, 돈 맥컬러가 작업을 했을 무렵엔 이 영화가 미국 배경의 영어 영화로 만들어질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이 작업을 하다가 나간 이경미가 따로 각본을 써 만든 영화가 [비밀은 없다]이니, 영화에 얼마나 긴 시간이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웨스틀레이크는 영화팬들에게 존 부어만의 [포인트 블랭크]의 원작자로 알려져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파커라는 직업 범죄자가 나오는 [헌터(인간사냥)]인데, 작가는 원래 주인공 파커를 끝에 죽이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이걸 긴 시리즈로 만들었지요. 그러다가 쓰고 있던 파커 소설 하나가 지나치게 코믹해지자 도트문터라는 덜 폭력적인 범죄자가 나오는 또다른 시리즈를 만들었고요.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인 [핫 록]은 고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으로 영화화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글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잘 아는 프로페셔널 작가로, 엄청 다작가입니다. 소설들은 다 재미있는데 좀 단조롭고 무난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 소설이 대부분 완전범죄로 끝나는 것도 보다 모험적인 다른 길로 갈 생각이 없어서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하지만 이건 각색자들에게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 단조로움 안에 자기 것을 채워넣을 수 있으니까요.

코스타-가브라스가 한 번 영화화한 적 있는 [엑스]는 해고 당한 중년의 중간관리자 이야기입니다. 어떻게든 재취업을 해야 하는데, 자기 같은 경력의 남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얼마 없습니다. 남자는 경쟁자인 다른 해고자들을 한 명씩 제거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고 연쇄살인이 시작됩니다. 이 책은 90년대에 쓰였습니다. 미국 제조업이 붕괴하고 컴퓨터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던 시절 이야기지요. 주제는 명쾌하고 일인칭 화자인 주인공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이 해야 할 올바른 일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연합해 이 상황에 책임이 있는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 거긴 미래가 없습니다. 연쇄살인이 더 그럴싸한 답입니다.

영화는 이 이야기를 2020년대 한국으로 옮겼습니다. 영화와 요새 뉴스를 번갈아 보면 영화가 뒤로 밀린 게 오히려 딱 맞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AI의 공습, 제조업의 자동화 진행 과정이 인간의 무용함을 걱정하게 될 수준이 된 시대니까요. 그래도 제지업은 남았고 많은 한국적 특성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몇몇 관객들이 이국적이라고 느끼는 것 상당수가 한국 기반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가족이 사는 불란서 주택 같은 것 말이죠. 여기에 낯설어하고 상황을 오해하는 관객들을 보면 우리의 기억력이 무척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대해서는 박찬욱이 여기저기에서 꽤 많이 이야기했으니 알아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미국적 특성은 주인공이 흉기로 권총을 쓴다는 것인데, 영화는 여기에도 한국적 설정을 최대한 넣고 있습니다. 묘사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박찬욱은 [어쩔수가없다]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접근성이 높은 작품이라고 보았습니다. 글쎄요. 전 이 영화가 박찬욱의 최근 영화 중에서는 재미없는 편에 속한다고 보았는데요. 객관적으로 보아도 [아가씨]나 [헤어질 결심]이 더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쩔수가없다]는 페이스가 느리고 본격적인 액션이 시작될 때까지 꽤 시간이 걸립니다. 그 때문에 러닝타임이 더 긴 전작들보다 길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많이 재미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꼭 매력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니까요. 하지만 단조롭고 속이 보입니다. 맘에 안 들더라도 보는 재미는 있어야 하는데. 별다른 변주없이 사용되는 이병헌의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배우들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헤어질 결심]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영화에서 재미있는 건 주변 사람들입니다. 일단 손예진이 연기하는 아내 캐릭터는 원작보다 훨씬 비중이 높고 나오는 모든 장면보다 이병헌보다 재미있습니다. 영화는 살해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줄이고 대신 이 인물들과 주변 사람들을 재창조하고 밀도를 높였습니다. 많이들 지적하듯 염혜란, 이성민이 가장 눈에 뜨입니다. 특히 염혜란의 경우 나오는 장면마다 그냥 주인공처럼 보입니다. 일단 당황스럽게 예쁘게 나오고 후반의 마지막 ‘주인공 연기‘도 이 배우의 것입니다. 살해당하는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 연쇄살인자가 하나로 뭉쳐 온전한 하나의 초상을 그리고, 살인마는 그를 위한 중립적인 기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뇨. 그래도 전 주인공은 조금 더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박찬욱의 전작에 비해 좀 박한 편인데, 여기엔 일부 동의하기도 하지만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반박하고 싶어집니다. 특히 영화과 공허한 장식과 기교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죠. 저로서는 한국의 봉급쟁이 직장인 중년 남성의 삶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로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다채로움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역사 속에서 쌓아간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리고 영화는 정말 여기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잖아요. 박찬욱 영화 속 캐릭터 중 이 영화 주인공만큼 전사가 긴 사람이 있었나요. (25/10/27)

★★★

기타등등
코스타-가브라스가 아직 살아있었네요.


감독: 박찬욱, 출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최소율, 다른 제목: No Other Choice

IMDb https://www.imdb.com/title/tt1527793/

    • 감독 이름이 Ben Leonberg로 되어 있네요.
    • 특히 영화과 공허한 장식과 기교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죠.
      영화과->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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