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 The Ten Commandments (1956)


[십계]는 제가 주말의 영화 또는 명화극장에서 더빙판으로 본 영화죠. 많은 한국인들에게 소위 추억의 영화로 분류되는 작품입니다. 저에겐 이 영화가 일종의 배경으로 존재했던 거 같습니다. 꾸준히 처음부터 끝까지 본 영화라기보다는 그냥 텔레비전을 틀어놓으면 자주 나와서 결국 다 보게 되는 영화였달까. [대탈주], [빠삐용], [내일을 향해 쏴라] 같은 영화들이 이 부류에 속하는데요.

세실 B. 드밀의 마지막 감독작이고 이 사람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드밀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탄 영화는 [지상 최고의 쇼]지요. 많이들 최악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으로 언급하는 작품입니다. 정치적인 분위기 때문에 이 영화가 상을 받았다는 게 정설이죠. 은퇴를 앞둔 입김이 센 노인네의 작품이니 상을 좀 줘야겠다. 하지만 이 노인네가 몇 년 뒤에 마지막 영화로 대표작을 찍었으니 스텝이 꼬였죠. 한 번 더 줘도 되었을 거 같은데. 그 해 아카데미 작품상은 역시 최악의 작품상 수상작으로 거론되는 [80일간의 세계일주]였으니 말이죠. 하지만 전 [십계]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이게 대단하게 아쉽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해엔 [자이언트]가 작품상을 받았다면 모두 수긍하지 않았을까요.

리메이크입니다. 드밀은 이전에도 [십계]라는 영화를 만든 적 있지요. 당시로서는 엄청 큰 세트를 지어서 영화를 찍었는데 촬영 끝에 다른 사람들이 공짜로 쓸까봐 다 묻어버렸고 나중에 이게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적 있었지요. 이 영화는 형식적으로 좀 재미있는데 전반부는 우리가 아는 모세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십계의 주제를 담은 현대 배경 이야기였어요. 이걸 리메이크하면서 후반부를 지웠던 건데, 원래도 전반부가 더 인기 있었지만, 무엇보다 50년대엔 후반부의 멜로드라마가 전혀 먹히지 않았을 겁니다. 무성영화 시절에만 먹혔던 그런 이야기들이 있어요. 그런 거 할 바엔 모세 이야기를 길게 찍는 게 낫지요.

감독 자신이 나와서 ”내가 이렇게 중요하고 훌륭한 영화를 찍었다“라고 으스대며 시작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오프닝 크레딧에서도 엄청난 자신감을 드러내요. 내가 이렇게 중요한 고대 역사가들의 저서를 참고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원작이 홀리 스크립트, 그러니까 성서라고! 물론 전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고증을 지킨 위대한 성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1950년대 관객들이 이 영화에 매료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겠죠.

물론 이 영화는 대부분 또는 몽땅 허구입니다. 아무리 고증을 지킨 영화를 만들려고 해도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고고학적 기반이 없습니다. 옛날이긴 하지만 이집트 기준에 따르면 그렇게까지 엄청난 옛날 이야기도 아니니 그냥 수상쩍죠. 영화는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하나도 없는 이야기를 할 때 쓰는 회피전략을 동원합니다. 파라오의 명령으로 모세와 관련된 기록이 모두 파괴되었다는 거죠. 보다보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냥 융통성있게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전 이번 감상 때 트로이의 프리암 왕이 보낸 사절이 등장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들도 출애굽기의 뼈대에 입힌 살들입니다. 모세와 람세스와의 관계, 모세에 대한 네페르티리의 집착 같은 것. 보다 보면 성서 팬픽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성서 기반 서사물 대부분이 기본적으로는 다 그렇죠. 하지만 이 영화는 유달리 아이돌 팬픽스러운 것이, 이 영화의 모세에는 좀 ‘오빠’의 느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부글거리는 욕망의 대상이에요. 그러면서 자기 혼자만 고고한 척 구는 게 찰턴 헤스턴이 나중에 찍은 더 재미있는 영화인 [벤허]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그래도 중반까지는 재미있는 드라마가 있어서 이 사람을 잘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특권을 포기하고 그런 거요. 그러다가 수염을 기르고 컬트 리더가 되면서 정나미가 뚝 떨어지긴 하는데.

이 팬픽은 당연히 1950년대를 사는 늙은 개신교도 백인 남자의 관점을 거쳤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할리우드가 테크닉컬러 비스타비전으로 구현해낸 주일학교 유니버스인 것입니다. 당시 관객들은 이걸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가치일 것입니다. 성서를 바라보는 1950대의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요. 그리고 그것은 할리우드가 끌어올 수 있었던 모든 자산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타들, 세트, 의상, 특수효과. 이 영화의 홍해 장면은 지금 봐도 압도적입니다. 그렇게까지 사실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무엇보다 이 영화 이후 사람들은 모세를 찰턴 헤스턴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상상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져버렸습니다.

지금 보면 이게 많이 낡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배우들이 다들 백인이잖아요. 그리고 이 사람들의 대사나 사고 방식과 같은 걸 보면 수상쩍을 정도로 서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미국 느낌도 듭니다. 영화는 이 영화 속 자유를 위한 투쟁을 미국 건국신화와 연결시키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나라가 19세기 중반까지 노예 경제를 굴렸다는 걸 대충 잊어도 되는 걸까요? 생각해 보니 [십계] 이후의 이야기가 대량학살로 남의 땅 빼앗기이니 오히려 더 잘 맞는 거 같기도 한데. 영화에서 가장 이상해 보이는 건 앤 박스터가 연기한 네페르티리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냥 20세기 중반의 팜므파탈이예요. 후반으로 가면 의상이나 분장도 그냥 20세기 초반 미국 사람 같습니다. 다들 포기해버린 거 같아요.

종종 십계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제대로 정리가 안 된 문장들. 아브라함 종교의 기반이 되는 전반부를 빼고 후반부를 보면 그냥 뻔한 말들입니다. 사람 죽이지 말고 남의 물건 훔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이런 건 그냥 다들 직관적으로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그 석판 받은 유대인들이 그걸 지켰나요. 이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해 한 짓부터가… (25/12/31)

★★★☆

기타등등
율 브린너 이야기를 안 했는데, 1956년은 이 사람 경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과 나], [십계], [아나스타샤] 모두 이 해에 나왔지요. 세 영화 모두 아카데미 상을 골고루 나눠 가졌고 브린너도 하나 챙겼지요.


감독: Cecil B. DeMille, 출연: Charlton Heston, Yul Brynner, Anne Baxter, Edward G. Robinson, Yvonne De Carlo, Debra Paget, John Derek, Cedric Hardwicke, Nina Foch, Martha Scott, Judith Anderson, Vincent Price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49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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