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2010)


(스포일러가 있거나 말거나.)


[악마를 보았다]로 김지운은 늘 새로운 장르를 찾아 떠돌아다녔던 그의 경력에 또 하나의 장르를 추가했습니다. 70년대식 익스플로이테이션물이죠. 이걸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우선 오리지널 각본부터가 그의 것이 아니잖아요. 그가 이 영화를 연출한 것도 주연배우 최민식의 추천과 요청에 의한 것이고요. 하지만 과정이 어떻건 리스트는 만들어졌습니다. 


묘사의 강도만 따진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그럭저럭 견딜만 합니다. 보기 편한 영화라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살인, 강간, 폭력 장면으로 질펀하니까. 하지만 영화는 스토리가 요구하는 이상의 불편한 장면을 예상 외로 많이 넣지 않고 있어요. 영화가 불편하다면 그건 자극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극이 약속한 것보다 훨씬 모자라기 때문이죠.


복수극은 쾌락주의적인 장르입니다. 이런 영화들은 고통스러운 초반 몇십 분을 견디고 나면 관객들에게 도덕의 굴레에서 벗어난 무차별 폭력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하죠. 소위 강간복수극 장르의 경우는 심지어 그런 초반묘사까지 노골적인 쾌락으로 제공해주겠다고 암시합니다. 


[악마를 보았다] 역시 그런 약속으로 시작합니다. 국정원 직원이 약혼녀를 죽인 연쇄살인마를 사냥한다는 이야기잖아요. 주인공 수현은 살인마 장경철을 단번에 끝장내는 대신 고문했다 풀어주기를 반복합니다. 아마 여기서 관객들과 주인공은 앞의 고통을 상쇄하는 사디스틱한 즐거움 기대했을 것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흐르지 않습니다. 물론 주인공의 실수도 있고 살인마가 만만치 않은 상대여서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계획 자체의 문제점에 있습니다. 이 위치에서 그는 장경철에게 가한 것만큼 당하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희생자들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장경철은 보통 사람이 아니죠. 그는 죄의식도 없고 자기 연민도 없으며 공포심도 느끼지 않습니다. 수현의 게임은 그에게 대단한 고통을 주지 않아요. 한마디로 뻘짓인 겁니다. 


[악마를 보았다]는 복수의 매커니즘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완벽한 복수가 완성될까. 복수자의 쾌락을 만족시키면서도 대상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답은 대상에 대해 지식을 쌓고 거기에 맞춘 복수를 하면서 복수자 자신은 최대한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죠. 수현이 이 사실을 지나치게 늦게 깨달은 건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는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했어요. 사실 장경철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여럿 있습니다. 단순한 짐승에게는 단순한 방법을 써야죠. 물론 복수 과정 중 환멸과 권태로 제풀에 지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장경철은 더 아팠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개별 복수의 실패담에서 조금 더 나아가 하나의 일반론을 개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는 복수가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악몽이죠. 우리가 익숙한 복수가 가능한 세계는 악당들과도 어느 정도 정서적 교류가 가능한 곳입니다([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악당들은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그 통로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그 통로 저편에 있는 건 장경철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종말론이 따로 없습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저에게 이것은 복수의 포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감정을 제거한 단순한 청소로 보기엔 너무 복잡하며 상관 없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해를 끼칩니다. 그 과정 중 장경철이 고통 비슷한 뭔가를 느꼈다는 암시는 믿을 수 없고요. 전 그냥 수현이 끝까지 자기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자기 정신만 추려서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10/08/14)



기타등등

잘려나간 부분들을 다 더했다고 해도 영화가 특별히 더 잔인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잘린 부분들은 대부분 시신 손상과 관련된 것들이죠. 시체는 아프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프죠. 


감독: 김지운, 출연: 이병헌, 최민식, 전국환, 천호진, 오산하, 김윤서, 최무성, 김인서, 다른 제목: I Saw the Devil


IMDb http://www.imdb.com/title/tt158817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408



    • 복수의 대상이 하나뿐이라는게 상업장편영화로서 가장 치명적이었죠
      '암굴왕'만해도 어떤 악당인가를 떠나서 그 수가 여럿이지 않겠습니까?
    • 복수대상이 한 명이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가 나올 수 있죠. 페이지 터너 같은 경우도 있잖습니까. 금자씨의 경우도 잔가지를 다 쳐내면 대상은 한 명뿐이었는 걸요.
    • 듀나님 말씀에 덧붙여서 이 영화의 약점은 제작비겠죠. 이 정도의 상해 묘사와 암울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70억을 들였다는건 좀 넌센스랄까요. 투자자들이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돈을 댄건지 신기합니다. 이런 영화는 관객 동원에 약점을 잡히고 들어가는 것이니 저렴한 제작비로 만드는게 보통인데 말이죠.
    • '친절한 금자씨'가 윗글에서 정의된 복수극에 부합되는 영화는 아니죠
      '페이지 터너'는 못봤지만 시놉을 살펴보니 원수를 때려잡는 성격의 복수극은 아닌 것 같고요
      대개의 복수극은 복수의 대상이 누군지 알아내고, 복수를 준비하고, 그 대상을 추격하고, 단계별로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으로 러닝 타임을 채웁니다
      영화에 따라서 이 과정중 한두가지는 축소되거나 생략될 수 있죠
      그런데 '악마를 보았다'는 이 과정(또는 장치)중 앞의 세가지를 그저 간략하게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아직 채워야할 러닝 타임이 한참 남았다는 의미죠
      결국 복수와 응징 그 자체로 남은 시간을 채워야하는데 악당이 하나이니 치명적일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면 지루한 복수극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죠
    • 몬테 크리스토 백작만 해도 온전한 영화 각색물을 찾기가 힘든데, 그건 장편영화 하나를 채우기엔 이야기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이지요. 장편영화의 길이는 기껏해야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소설로 따지면 긴 단편이나 중편 분량에 불과합니다. 악당 하나로 얼마든지 내용을 충실하게 채울 수 있죠.

      악마를 보았다가 앞의 것들을 간략하게 보여준 건 맨 마지막 과정의 끝없는 연장이 이 이야기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러닝타임의 문제와는 상관없습니다.
    •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여쭤 보겠습니다
      폭력으로 단 하나의 복수 대상(악당)을 응징하는 영화를 알고 계신지요?
      가급적 상업장편영화의 러닝 타임 내내 악당 하나에 집중하는 영화로 말이죠

      아무래도 부연설명을 해야될 것 같은데
      앞의 것을 간략하게 보여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채워야할 남은 시간이 많아졌다는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악마를 보았다가 이 문제를 잘 해결했는지에 대해서는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영화가 제공한 재미나 흥미로움을 떠나서 말이죠
    • 어째서 문제일까요 그 남은 시간에 이야기의 주제가 담겨있는데...
    • 꽃과 바람님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14405500&re=y
      (네이버 국어사전 링크입니다)
      전 3번의 의미로 사용했는데 혹시 4번의 의미로 받아들이신건 아닌지요?
    • 괜히 끼어들었네요 무슨 소린지 알겠습니다.
    • 악당이 하나냐 그 이상이냐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악당이라 하는 존재는 응징해야 할 단일한 존재나 마찬가지니까요. 여러 악당을 차례로 응징해가는 것이나, 하나의 악당을 상대로 응징의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나, 사실 '치명적'일 정도로 큰 차이는 없어 보이고요.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는 하나의 악당을 단계적으로 응징하는 것을 비교적 긴장감 있게 끌고 있으니 그리 실패한 것도 아닌 것 같고요.
    • 많은데요? 벤허만 해도 복수 대상은 한 명밖에 없잖습니까. 물론 스포츠를 통해 복수하는 것이 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그냥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지, 악당이 한 명밖에 없어 시간 때우기 난처해하는 건 아니에요.
    • 햄릿이 원작인 라이언 킹도 기본 악당은 한 명... 아니 한 마리죠.
    • 생각해보니 록키 4도 복수극 영화입니다. 역시 악당은 한 명이고요.
    • 많은 드라큘라 영화들도 사실 복수극 플롯을 따르고 있는데, 역시 악당은 한 명. 프랑켄슈타인도 마찬가지고요. 괴물 나오는 호러 영화에서는 대부분 복수의 대상은 하나죠.
    • 팀 버튼의 배트맨도 복수극인데 역시 악당은 한 명.
    • 로만 폴란스키의 '진실Death and the Maiden' 정도를 언급하실거라 생각했는데
      (사실 이 역시도 딱 부합되는 영화는 아니지만)
      예상과 달리 얌전한 영화들을 꼽아주셨군요
      본문에서 복수극을 쾌락주의적인 장르라고 하셨을 때 떠오른 영화들은 '복수무정'이나
      '킬 빌', '크로우'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도덕의 굴레에서 벗어난 무차별적인 폭력'이 쾌락과 결합한 영화들이기 때문에 말이죠
      본문에서 정의하신 복수극의 영역을 애써 확대하시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기회가 예전처럼 된다면, 왜 장르적 컨벤션을 좀 더 활용하지 않았는지 김지운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는게 듀나님을 덜 피곤하게 만들겠네요
    • 그 장르적 쾌락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본문에서 한 이야기 전체가 그건데요? 그런데 왜 장르적 컨벤션을 더 활용하지 않았냐고 물으실 생각이라면 제가 오히려 당황스러워지죠.
    • 복수무정이나 킬빌 크로우는 잡아줬다가 다시 풀어주는 식으로 반복하지 않으니 여러개의 응징을 보여줘야했겠죠. 그에 반해 이 영화는 주제 자체가 한명의 대상을 속이 풀릴 때까지 응징하려고 하는 거니까 응징 대상이 굳이 여러명이 필요하진 않잖아요. 오히려 그렇게 만들었으면 산만했을 것 같은데;
      블러디베어님의 비판이 성립하려면 대상이 한명에 그쳤기 때문에 남았다고 하시는 그 러닝타임에 의미없는 씬들이 채워졌어야 하는데, 제가 보기엔 그닥 필요없는 장면들이 쓸데없이 들어간 것 같진 않군요.
      그리고 여러명을 응징하는걸 복수극의 장르적 컨벤션으로까지 부를 수 있나 모르겠어요.
    • 음...비꼬려는 건 아니라는걸 먼저 밝혀둡니다. 몇몇 분들이 약간 혼동하시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복수극은 복수극이지만 응징으로 관객에게 통쾌함을 안겨주려는 영화는 아니죠. 오히려 그 반대의 극한을 보여주려는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듀나님도 리뷰에서 이 영화가 쾌락주의적인 복수극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써놓으셨네요. 복수무정이나 킬빌, 크로우 같은 영화들과의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복수라기보다는 복수의 실패에 관한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죠. 이러한 시도나 결과물이 관객에게 얼마나 호소력이 있었는가와는 별개로 말이에요.
    • 복수의 대상이 여러명이 아니라고 해서 상업장편영화에서 치명적이라는 것은 전혀 이해가 안가는군요. 한 사람의 복수대상자에 영화내내 집착하는 영화들도 굉장히 많잖아요.
      서부극은 대부분 그런 이야기고. 건힐의 결투나 퀵앤데드나 웨스턴 모두 그런 이야기죠.
      건힐의 결투만해도 악마를 보았다처럼 집착하는 복수의 대상과 아주 일찌감치 만나서 그를 무장해제시키고 한참 더 영화가 진행되지만 전혀 지루함이나 진부함이 없죠.
      꼭 코넬 울리치 소설들처럼 여러명의 대상자들을 한 명 한 명씩 처단하는 묘미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오직 한 명의 복수대상자를 영화초반에 만났음에도 지루함없이 긴 시간을 끌고간 악마를 보았다의 완성도가 놀라운 뿐입니다.
    • 복수대상이 한명뿐인데다 단계적수순(?)마저 간략히 보여준다면 상업영화로서 치명적일수도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전혀 이해안갈정도로 궤변은 아닌걸로 보여요. 적어도 내시각에선 말이죠. 물론 그게 이번영화에도 해당되느냐고 따진다면 할말이 없지만...~~
      근데..'상업장편영화의 러닝타임내내 악당하나에 집중하는 영화로 듀나님께서 벤허, 라이언킹, 배트맨을 나열하신건 좀 의외네요.
    • 복수 대상을 찾음 -> 복수를 시작 -> 복수 과정 보여줌(이 와중에 살인범의 친구와 1:3 대결이라거나 이런 저런 잔재미) -> 복수가 꼬임 -> 마지막 라스트.

      별로 이상하지 않은 재미있는 구성 같은데요. 복수 과정의 선택 자체가 잘못되었기에 "복수의 쾌감"은 느끼지 못했지만, 대신 살인마가 짜증을 부리는 귀여운(?) 재미가 있었죠. 어찌보면 복수극이라기보다는 수퍼악당 최민식과 그보다도 더 전지전능한 이병헌간의 대결을 보는 재미였던 것 같습니다.
    • 댓글이 많으니까 참 보고싶어지네요. 게다가 김지운에 이병헌 최민식들의 화학작용을 예상해볼 때 꽤 괜찮을 거 같네요.
    • 드디어 봤습니다. 듀나님 글에 댓글에 보지 않았을 때의 그 기대치에 혹 실망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제가 여자라 그런지 피와 폭력의 강도가 좀 참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듀나님 말씀대로 지나치다는 느낌은 안 들었습니다만...그래도...피만 보면 숨을 헐떡이게 되는 제 자신이 좀 문제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사실 중간 중간 잠시 멈춰 가면서 심호흡을 했습니다. ㅎㅎㅎ 그래도 예전의 조용한 가족이나 차라리 놈놈놈 같은 영화들이 더 그립네요. 앞으로 그런 영화가 더 나오길 기대하면서...참 장화 홍련도 아주 좋았었는데...하여튼 늘 기대하게 되는 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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