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의 FM (2010)


언젠가 영화음악 프로그램의 DJ가 주인공인 영화가 나올 줄 알았습니다. 90년대에 영화광임을 자처한 사람들에게 FM 영화음악 프로그램은 웬만한 영화잡지를 넘어서는 중요한 매체였죠. 특히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은요. 이 프로그램들을 들으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당시의 기억과 감수성을 재료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한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단지 문제는 어떻게 만드느냐입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이야기 재료는 많지 않습니다. 


[심야의 FM]은 스릴러라는 장르를 택했습니다. 라디오 DJ를 주인공으로 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같은 선례가 있으니까 이를 택하는 건 상식적인 일입니다. 여기다가 2시간의 생방송이라는 설정을 깔고 공략하면 서스펜스를 만들 수 있는 조건도 형성될 것입니다. 머리를 잔뜩 쓴 결정은 아니고 90년대 영화음악 감수성과도 별 관계가 없지만 그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죠.


그 결과 만들어진 설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진행되는 생방송 FM 영화음악의 진행자인 선영은 DJ 일을 그만두고 유학을 갈 생각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생방송날 밤, 어떤 미치광이 악당이 그녀의 집에 침입해서 동생과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자기가 요구하는 대로 방송을 하라고 협박합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생방송이 끝나는 새벽 4시에 완결되어야 합니다. 악당이 요구해서가 아니라 그게 영화가 노리는 구성인 거죠. 


각본에서 믿을 수 없는 설정들과 구멍들을 찾는 건 쉬운 일입니다.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하는 생방송 영화음악 프로그램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경찰의 초기 대응과 같은 기초적인 절차도 이야기의 편의성을 위해 슬쩍 건너 뛴 부분이 있는 것 같으며, 몇몇 복선들은 너무 편리합니다.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걸 보면 종종 이게 2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 맞긴 한 건지 의심하게 됩니다. 시간대도 미심쩍고 지리적 조건도 확신이 안 섭니다. 이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에게 부여된 융통성은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살짝 넘어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에게 가장 나빠 보이는 것은 악당 한동수의 존재입니다. 우선 그는 시작부터 '나는 영화에 나오는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이요'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어서 재미가 없습니다.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무섭거나 위험해보이지가 않아요. 유지태의 캐스팅도 여기엔 별다른 도움이 안 됩니다. 배우의 익숙한 매너리즘이 반복되는 것도 문제지만... 아니, 생각해보시죠. 라디오 DJ와 대결하는 악당이 그 DJ보다 더 아나운서처럼 말을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야의 FM]은 예상 외로 재미있습니다. 스토리엔 구멍이 많고 악당 수준도 많이 낮지만, 그를 커버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선 무대가 되는 방송국의 묘사가 좋습니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DJ, 작가, 엔지니어, PD, 기타 방송국 관계자들의 관계에는 현실의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영화는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이를 일반 청취자, 스토커, 경찰, 언론으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로 확장시킵니다. 구성이 그렇게 야무지다고는 할 수 없고 버려진 가능성들 역시 보이지만, 이 네트워크의 흐름은 자연스럽고 흥미진진합니다. 


그러는 동안 "어떻게 스튜디오에 갇혀 있는 DJ가 살인마와 영퀴하는 이야기로 스릴러를 만들 수 있지?"라는 의문도 해결됩니다. [심야의 FM]에는 이야기의 재료가 많습니다. 음, 솔직히 초반 영퀴 장면은 별 재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내에서 인질로 잡힌 아이들의 대응, 범인을 따돌리기 위한 주인공의 반격, 무대가 방송국을 떠난 뒤부터 우연히 일어나는 소동들, 은폐되었던 진상의 폭로와 같은 것들이 쌓이면, 이야기할 재료는 점점 늘어갑니다. 이런 영화에서 관객들이 기대하는 물리적 충돌 역시 많고요.


무엇보다 서스펜스의 구성이 잘 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심야의 FM]은 일반적인 한국 스릴러 장르의 착각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단조로운 매저키즘의 반복이 서스펜스라는 것 말입니다. [심야의 FM]의 서스펜스에는 리듬감과 음악적 흐름이 있습니다. 여전히 주인공이 악당에게 끌려다니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양쪽의 대응이 늘 일방적이지는 않습니다. 자잘한 성공과 실패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지루한 압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죠.


주인공 선영 역시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수애의 캐스팅이 좋습니다. 이 사람은 일단 심야 프로그램의 DJ라는 캐릭터에 어울리게 목소리가 좋잖습니까. 중저음의 목소리가 기반이 되니까 종종 나오는 히스테리컬한 장면에서도 무리한다는 느낌이 없고요. 게다가 연예인처럼 마른 몸이라도 육체적으로 강건한 느낌이라 강한 물리적 존재감이 느껴집니다. 이 모든 건 장르 연기에 도움이 되지요. 


캐릭터 역시 잘 잡혀 있는 편입니다. 엄청 신선한 인물은 아니에요. 하지만 가족을 구하려는 여자주인공이라는 위치는 단순하지만 몰입하기 쉽고, 그 과정 중 캐릭터의 변화/발전도 이치에 맞습니다. 무엇보다 선영의 능력치는 우리가 시작부터 주인공에게 기대했던 딱 그 정도입니다. 전 주인공의 능력을 과대포장해놓고 영화 내내 그걸 하나도 안 보여주는 영화가 정말 싫더군요. [심야의 FM]에는 그런 과대포장이 없습니다. 


여전히 결점투성이 영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심야의 FM]은 서스펜스 장르의 작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게 중요한 거죠. 적절하게 조이고 풀면서 관객들을 끝까지 집중하게 하는 법. 이건 기본인데, 왜 이 당연한 기본을 따르는 영화를 이리 찾기 힘든 건지 모르겠습니다. 장르를 넘어서는 보다 고차원적인 이야기는 이 기본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뒤에야 하는 거죠. (10/10/09)



기타등등

90년대 감수성과는 별 상관없는 영화라고는 했는데, 그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은 대부분 [정영음]에서 나왔을 법한 곡들이거든요.  


주인공 이름 선영은 또다른 영화음악 프로그램의 DJ였던 이선영에서 빌려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독: 김상만, 출연: 수애, 유지태, 최송현, 마동석, 김규선, 신다은, 김민규, 정만식, 다른 제목: Midnight FM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Midnight_FM.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3317

    • 포스터 보고 영화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복고적인 냄새 때문에 차라리 8-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예고편에서는 별로 흥미가 안갔는데 리뷰를 보고 나니 보고싶어지네요.
    • 이 영화의 교훈은 '말 조심하자' 일까요?
      결말이 아쉬웠어요. 내심 흠뻑 두둘겨 패줬으면 싶었는데... 한동수의 결말이 필요 이상으로 감상적이었던 것도 같고. 한동수는 중증 자뻑 환자에 불과하잖아요.
      수애 역이 은근히 스크림의 커트니 콕스와 니브 캠벨 역을 반반 섞어놓은 듯해서 [스크림]처럼 속편이 나오면 재미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 더 팼다면 좋긴 하겠는데, 그런 인간을 몇 번 더 패서 뭐하겠습니까...
    • ^^댓글 주고 받음이 재미있네요. 수애는 점점 더 저의 레이다망 한 가운데로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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