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론: 새로운 시작 TRON: Legacy (2010)


[트론]은 오로지 80년대에, 그것도 디즈니만이 만들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막 싹트기 시작했던 컴퓨터와 비디오 게임에 대한 열광과, 컴퓨터라는 기계로 실제 영화에 써먹을 수 있는 그래픽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디즈니 특유의 성급한 도전정신과 어우러져 관객들과 시장이 제대로 준비되기 살짝 전에 나온 작품이란 말이죠. 이 영화가 컬트가 된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지금 보면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와 그래픽은 당시엔 벽을 뚫고 부수는 혁명이었습니다. 선지자 중 선지자인 셈이죠.


그 때문에 스티븐 리스버거가 [트론]의 속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몇 년 전에 들었을 때, 전 '이게 과연 잘 하는 짓일까?'하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미 우리는 [트론]을 넘어 [매트릭스]를 거쳤습니다. [트론]을 80년대 영화로 감상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거의 30년 전 과거의 언어로 구성된 그 영화의 세계를 지금의 세계로 끌어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까요?


결국 나와버린 속편 [트론: 새로운 시작]을 보는 동안에도 저는 계속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케빈 플린의 아들 샘이 실종된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가상현실로 뛰어든다는 내용의 이 영화가 그리는 3D 그리드의 세계는 멋지구리하고 특수효과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원작이 가지고 있던 오리지널의 힘을 상당히 날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건 모두 그 좋은 특수효과 때문인 겁니다. 


어째서 그러냐고요? 이렇게 설명해보죠. [트론]이 가지고 있던 컴퓨터 그래픽의 기술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고, 이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은 그 한계를 스타일의 일부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기술과 스타일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었죠. 하지만 [새로운 시작]은 훨씬 여유로운 환경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라이트제트에서 나오는 연기를 그릴 수도 있고, 라이트바이크를 진짜 바이크처럼 몰게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아니냐고요? 생각해보시죠. 라이트바이크가 진짜 바이크처럼 움직이면 그게 라이트바이크가 맞습니까? 더 좋은 컴퓨터 그래픽을 쓸 수 있다고 더 이상 감속없이 직각으로 꺾어지는 [트론] 세계만의 질주를 하지 않는다면 라이트바이크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이런 식입니다. [새로운 시작]이 보여주는 새로운 그리드의 세계는 쿨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오리지널 [트론]의 세계의, 거의 필사적이기까지 했던 진실성은 찾기 힘듭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과 기술들은 모두 [트론] 테마 파크나 파티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놀이공원에 사는 분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이맥스로 뻥튀기 된 화면 속에서 관객들은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배우들의 진한 마스카라, 깎지 않은 수염, 피부의 트러블. 심지어 그것들 중 일부가 진짜 CG이고, 오리지널 [트론]의 '디지털 세계' 상당 부분이 구식 광학 효과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전 계속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겁니다. 


내용은 어떤가. 오리지널 [트론]도 그리 좋은 각본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트론: 새로운 시작]의 각본은 더 나쁩니다. 영화는 전통을 따라 디지털 기술과 산업의 이야기를 게임 세계로 이식하려 하지만 원작만큼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엔 따라야 할 원작의 잔재가 너무 많죠. 별다른 갈등없이 얼렁뚱땅 요행으로 해결하려는 스토리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가지고 있는 재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ISO(Isomorphic Algorithms)의 개념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뻔한 소수자 박해 이야기의 재료로만 삼은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더 나쁜 건 트론 캐릭터의 활용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아직 [트론: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타이틀 롤에게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는 건 당연한 게 아닙니까? 


영화의 액션 장면들도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가끔 화면비율도 바꾸어가며 거대한 아이맥스 화면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액션은 이상할 정도로 심심합니다. 긴장감을 느끼기엔 너무 느리거나 짧으며 리듬이 나쁩니다. 전 제가 라이트제트의 비행전을 이렇게 나른하게 바라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영화는 화면을 채울만한 재료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액션이 아니라 그냥 비싼 자동차와 비행기들입니다. 


시선을 끄는 장면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비주얼은 썩 멋집니다. 제프 브리지스의 일인이역 연기는 재미있습니다. 디지털 특수효과를 빌어 훌쩍 젊어진 브리지스의 CLU는 거의 초현실적인 구경거리입니다. 스토리텔링은 나쁘지만, 원작의 설정을 슬쩍 배반하는 새로운 설정은 이야기와 주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전 플린 부자를 돕는 조력자 프로그램 쿠오라의 캐릭터도 좋았습니다. 제대로 된 각본이라면 이 캐릭터에게 맞는 진짜 스토리를 줄 수 있었을 겁니다.  


[트론]은 나쁘다기보다는 평범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평범함은 지나치게 많은 제작비와 지나치게 좋은 특수효과에 기인한 바가 크죠. 처음부터 이렇게 여유로운 상황에서 느긋하게 만들어질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전 오히려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만들어졌다면 더 그럴싸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오리지널의 정신에 더 가까우면서도  설정의 가능성을 보다 확실하게 팔 수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 텐데. (10/12/14)



기타등등

1. [트론] 버전 디즈니 로고는 그럴싸합니다. 


2. 영화는 현실 세계를 그릴 때는 2D입니다. 3D가 되는 건 샘이 게임 안으로 들어간 뒤부터죠.


3. [스타 워즈] 팬들이 키들거릴만한 농담이 몇 개 나옵니다. 


감독: Joseph Kosinski, 출연: Jeff Bridges, Garrett Hedlund, Olivia Wilde, Bruce Boxleitner, James Frain, Beau Garrett, Michael Sheen, Anis Cheurfa


IMDb http://www.imdb.com/title/tt110400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357

    • 직각커브가 사라지다니...오리지날 트론의 가장큰매력중 하나를 시작부터 날려먹었군요.
      제작자들은 무조건 리얼하게 만들면 관객들이 좋아할꺼라고 생각한 걸까요?가상현실영화에서???
      게다가 액션에 대한 듀나님의 평가도 예상대로네요.예고편을 볼때부터 느낀거지만 색감은 화려한데 가상현실 치고는 액션이 지나치게 평범해보이는게 걸렸는데 역시나 였군요.
    • 독특한 매력을 가진 소재를 가져올 때
      둥글게 둥글게 깎아먹는 멍청한 짓은
      이젠 헐리우드에서도 잘 안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 영화도 그 "헐리웃도 이젠 잘 안하는 짓"의 희생양이 된 걸까요.
      그래도 그냥저냥 볼만한 액션물이 아닐까 기대해봅니다.
      의상이나 탈것들의 디자인은 정말 괜찮아보였는데. 쩝.
    • 역시 예상대로 다프트펑크 음악'만' 좋은 영화가 될 듯... 그래도 한번 아이맥스로 보고프긴 합니다.
    • 다프트 펑크는 아예 언급도 되지 않는군요. 흐응흐응.
    • 음악은 괜찮았어요. 영화 안에서도 제대로 기능하고 있고. 단지 전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죠.
    • 으으으음...

      이거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 되네요;
      직각커브가 사라진 건 정말 충격이지만..
      에라 그래도 봐야겠네요 ㅠㅠ 그래도 기대치를 낮추고 봐야겠어요

영화 리뷰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84 인비져블 2: 귀신소리찾기(2010) 3 12,893 12-26
383 아메리칸 The American (2010) 6 11,710 12-25
382 심장이 뛴다 (2010) 7 12,234 12-24
381 메가마인드 Megamind (2010) 2 14,151 12-23
380 황해 (2010) 7 24,676 12-22
379 신텔 Sintel (2010) 3 13,256 12-21
378 피존: 임파서블 Pigeon: Impossible (2009) 2 9,246 12-20
377 비튼 Morsure (2007) 5 8,077 12-19
376 열 개의 계단 The Ten Steps (2004) 1 9,371 12-18
375 피투성이 올리브 The Bloody Olive (1996) 1 9,485 12-17
374 카페 느와르 (2009) 8 17,643 12-16
373 크리스마스 스타! Nativity! (2009) 3 8,472 12-15
열람 트론: 새로운 시작 TRON: Legacy (2010) 6 13,045 12-14
371 쓰리 데이즈 The Next Three Days (2010) 2 11,385 12-13
370 학교 전설 (1999) 6 11,010 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