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2011)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 도입부에서 내세우는 설정은 정조 시대에 탐정이라는 정오품 벼슬이 있어서, 요새 우리가 아는 탐정과 비슷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전 이게 전혀 좋은 농담 같지 않고 많이 무례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한자 단어들은 그냥 생긴 게 아니죠. 특히 유럽어권에서 건너온 단어들의 번역어들은 일본 번역가들의 필사적인 노력 없이는 태어날 수 없었습니다. 과거의 수사관을 다룬 영화를 찍으며 제목에서 그를 명탐정이라고 부르는 건 상관없지만, 있은 적도 없었던 벼슬을 만들어 미래의 단어를 갈취하는 건 그리 옳아보이지 않습니다. 


이 설정이 과연 각본단계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영화 속 사람들이 탐정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장면은 없으니까요. 촬영 중간에, 또는 이후에 설정이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이 영화의 제목은 [조선명탐정 정약용]이었지요. 그러다 정약용이라는 이름이 빠지고 지금의 제목으로 개봉되는 겁니다. 영화 속에서도 정약용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요. 거중기나 가톨릭 개종, 정조와의 관계 같은 단서들이 조금씩 던져질 뿐이죠. 처음에는 영화 각본을 파는 아이디어였던 게 언젠가부터 은근슬쩍 사라져 버린 겁니다. 


하긴 이 설정도 불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원작은 김탁환의 역사추리소설 [열녀문의 비밀]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정약용이 아니니까요. 원작의 꽃덕후 명탐정 김진과 그의 왓슨인 이명방 캐릭터를 지워버리고 이제는 이름 없는 그냥 명탐정이 된 주인공과 왓슨 노릇하는 개장수를 하나 끼워넣어 그 이야기에 집어넣은 겁니다. 주인공이 남편을 따라 자진했다는 과부 사건을 수사한다는 내용은 대부분 남았지만 새로 넣은 이야기들도 많으며 결말의 반전도 성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되나? 네, 됩니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죠.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었나?라고 물으신다면 전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 [열녀문의 비밀]의 이야기를 굳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이유는 없어요. 특히 꼼꼼한 고증이 장점의 반인 소설을 퓨전 사극으로 만든 건 이해가 안 갑니다. 소설에서 고증 다음으로 중요한 건 페미니즘 주제인데, 이것 역시 퓨전 사극과 함께 들어온 코미디가 많이 갉아먹습니다.  이 이야기는 심각하게 이야기할수록 좋죠. 영화의 농담 따먹기 태도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영화는 이질적인 여러 요소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작과 추가된 이야기가 따로 놀고, 추리와 코미디가 따로 놀며, 정통 사극과 퓨전 사극이 따로 놉니다. 특히 코미디의 문제가 심각해요. 이 영화의 코미디 장면들은 오로지 코미디 기능만을 하기 위해 삽입되었어요. 다들 '나는 코미디야!'라고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고 있지요. 


추리물로서도 영화는 장점이 없습니다. 원작의 이야기도 그렇게 치밀한 추리물은 아니었는데, 여기에 멋대로 이야기를 빼고 넣으니 이야기 구조가 아슬아슬 붕괴직전 건물 같은 꼴이죠. 캐스팅 때문에 반전을 중간에 포기한 건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무얼 추리하고 무얼 밝히라는 건지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최소한 관객들에게 머리를 쓸 무언가를 주어야죠. 


김명민은 그가 이전에 출연했던 장르 영화들에서보다 낫습니다. 캐릭터 덕을 어느 정도 보고 있죠. 자주 실수를 저지르고 늘 어리버리해 보이긴 해도, 주인공 명탐정은 영화 내내 부지런하게 생각하고 바쁘게 움직입니다. 적어도 이전처럼 '목소리만 좋은 바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하지만 김명민이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쓰고 있는 건지, 이 영화가 주연 배우를 제대로 캐스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안 섭니다. 그의 코미디 연기에는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서 늘 조금씩 흉내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진짜 코미디 배우에게서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유연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B밖에 못 받는 그런 성격의 연기랄까. 오달수는 이런 영화가 체질이지만 그래도 캐릭터가 도와주는 [방자전] 같은 영화에서 더 좋습니다. 한지민은 예쁘고 이미지 게임의 이점도 갖고 있지만 그 뿐입니다. (11/01/13)


★★


기타등등

주인공이 가지고 다니는 야한 소설 [김상궁의 은밀한 매력]의 제목이 가로로 쓰여 있는 게 정말 신경 쓰입니다. 세로로 쓰면 관객들이 못 읽을까봐 걱정했던 걸까요. 아니면 퓨전이니 그냥 막 나가자?


감독: 김석윤, 출연: 김명민, 오달수, 한지민, 다른 제목: Detective K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Detective_K-picture_143970.html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6080

    • 김탁환 시리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그닥 마음에 안드는 각색이군요. 김진을 코믹한 캐릭터로 바꾸는건 그렇다쳐도, 관직명이 탐정이라니..-.- 그나저나 전 소설 읽을때 후반부에 나오는 청나라 유리창거리에서의 장면을 영상화하면 어떨까 했는데 영화에 나오나요?
    • 그나저나 김진이라는 이름이 영화속에서 안나온다면 Detective K 라는 영어 타이틀은 좀 뭔가 싶네요,
    • 탐정이란 말이 번역된 건 에도시대의 일이 아닌가요?
    •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전 짐작만 했을 뿐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단어이니까 그 시기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 Detective K라는 영어 제목이 앞으로 계속 쓰이게 될 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한시네마에서 주워왔지요.
    • 저도 월요일시사회에서 이 영화 봤어요. 이 영화는 처음부터 원작에서 몇 가지 모티브를 가져왔을 뿐 전혀 다르게 쓰여진 시나리오로 만들어졌다 하더군요. 그런 점에서 원작을 배제한 채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다 싶었어요.
      이야기가 좀 산만하긴 했지만 배우들 조합 보는 재미가 괜찮더라구요.
      김명민 연기도 전 좋았구요, 오달수와의 조합도 신선했어요.
      사극임에도 대사들이 재기 발랄하고 상황들도 꽤 흥미롭구요.
      다만 이야기 간의 유기성이 좀 치밀하지 못한 듯한데, 본 상영까지 편집을 좀 손 본다 하니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네요.
    • 그리고 제가 분명히 이해를 못해서 그러는데요, 정조시대에 탐정이라는 벼슬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시는 건가요?
      제가 한 기사를 읽었는데, 정조비사에 따르면 그런 관직이 있었다는군요. 그 정조비사의 짧은 글귀가 영화의 모태가 되었다는군요.

      "나라 경제의 근간인 세금이 증발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엄청난 규모의 공납비리 사건이었다. 부패 관료들의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 정조는 최측근에게 비밀리에 수사를 지시하는데 그에게 내린 정5품의 벼슬이 바로 찾을‘探(탐)’ 바를’正(정)’ 즉, 올바름을 밝혀내라는 의미의 ‘탐정’이었다. 이리하여 왕의 밀명을 수행하는 조선 최초의 명탐정이 탄생하게 된다. -정조비사 中"
      출처는 여기고, 물론 여기서 탐정과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탐정과 한자는 다릅니다.
      http://www.unionpress.co.kr/news/detail.php?number=92544&thread=03r01r04
    • 위 트라우마님이 링크하신 기사에서 나오는 정조비사라는 책이 정말 있는 건가요? 일단 인터넷에서는 검색해도 저 기사를 제외하곤 별다른 내용이 없고요. 혹시 설명해 주실 분이 계실려나요.
    • 저도 정조비사라는 책의 존재가 좀 의심스러운데..
      위에 유니온프레스 기사는 '조선명탐정' 홍보사측 보도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더군요.
      좀더 자세한 링크는 아래...
      http://extmovie.com/zbxe/2397185
      정조비사의 정체를 속시원히 밝혀주실 분 안계신지..^^;;
    • 이상하군요. 열녀문의 비밀을 2-3년전에 읽었지만 서문에서도, 후기에서도 언급된 기억이 없는데요. 지금 옆에 책이 없는데 다른 분이 확인해주실 수 있나 모르겠군요. 정조비사라는 책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정조관련 연구서/논문에서 언급되지 않았을리가 없는데요. 조선시대 전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쪽 분야 논문/책은 꽤 찾아서 읽은 편인데도요.
    • 게다가 원작 속에서 김진은 관직을 가지고 활동하지도 않아요. 직책을 맡은건 이명방이었고, 김진은 아니죠. 이명방의 직책도 '의금부도사'였죠.
    • 검색하다 한 카페에서 정조비사에 대한 글이 있는 걸 발견했는데요,
      제목은 정조비사 중에 2, 시전 상권입니다.
      지난해 가을 방영되었든 성균관 스캔들이란 드라마의 배경이 정조시대였구요, 그래서 그 드라마에 대한 내용을 고증하려 한 듯합니다.

      정조 15년에  체제공 상소 중에서 [정조15년]        

      특정세력이 이익을 독점하여서 백성을 곤궁케 하니 이를 시정해야한다는 상소여        
      그래서 정조는         
      정조 [15년]        
      그는 신해통공(辛亥慟共) 이라는 경제 개혁을 단행하는데        
      육의전 이외에 시전 (市塡) 에 대한 전매 특허 를 폐지하고 자유로운 매매를 인정하여서 각 상품에 대한 사상인(私商人) 제도를 도입해서 실제로 노론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었음         
      이것이 결정적인 노론의 미움을 받는데 일조한 개혁단행임,        
      어제 시전상에 에 관한 드라마 스토리에 도움이 될거라 생각해서 올려납치~~~~~~해옴
      출처http://cafe.daum.net/dramajoa/F0lK/1182?docid=1LIc6|F0lK|1182|20100928164412&q=%C1%A4%C1%B6%BA%F1%BB%E7&srchid=CCB1LIc6|F0lK|1182|20100928164412 입니다.

      카페글 옮긴 겁니다.
    • '探正'이라는 표현은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세종, 세조실록에서 1번씩, 단어가 아니라 서술어표현(탐지했다)으로만 나옵니다. 정식 관직명이 생겼다면 기록되었겠지요. 트라우마님이 소개하신 카페글만 봐서는 '정조비사'라는 실제 책이 존재했다고 하기 어렵네요.

      '탐정'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공공치안조직이 사적 영역을 커버하지 못하게 된 시기에 생겨났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탐정'의 업무라는 것 자체는 그 이전 시대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랬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탐정'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는 것은 무리한 것 같습니다.
    • 정조비사 관련 글은 전 영화사에서 보도자료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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