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2012)


일단 제목부터 죽이지 않습니까? [건축학개론]. 최근 몇 년 동안 나온 한국 연애영화들 중 이처럼 자기 개성 확실하게 보여주고, 정확하고, 기억하기 쉽고, 인상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었던가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사랑' 어쩌구로 시작되는 긴 제목들을 제대로 기억하거나 구별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제목 구실 못하는 글자 다발들일 뿐.

비유적인 제목이 아닙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인 음대생 서연과 건축과 학생 승민은 모두 건축학개론을 들어요. 이들의 이야기는 정확히 건축학개론 첫 강의에서 시작되어 종강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15년 뒤, 시니컬한 30대가 되어 건축주와 건축가로 다시 만난 이들은 제주도에 집을 짓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15년을 오가면서 느긋하게 병행진행됩니다.

이야기 재료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학생들의 첫사랑 이야기이고, 첫사랑을 다시 만난 30대 어른들의 이야기예요. 이런 이야기들에 나올 법한 거의 모든 단계들이 총동원됩니다. 이건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죠.

영화의 차별점은 이 익숙한 재료들이 모두 건축이라는 필터를 통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집짓는 일만이 아니라, 그 과정 중 숙고해야 하는 지리적 편의성도 중요하고 공간의 개인적, 문화적 의미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대학생 서연과 승민의 모든 이야기는 건축학개론 강의의 친절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 과정은 15년 뒤, 승민을 통해 서연의 집이라는 구체적인 결과물로 완성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거의 고루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얻죠. 이야기를 묶어주는 통일감은 당연하고.

건축의 비유를 계속 연장하는 것은 감독이 던진 미끼를 순진하게 무는 것일 수도 있는데, 영화의 구성 역시 건축물을 닮았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만들어지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물처럼 흐르는 대신 차곡차곡 쌓여 있죠. 이건 영화의 매력이고 개성이지만 늘 장점은 아닙니다. 감독의 계산 하에 구분되고 잘려나간 시공간 연속체들 안에 갇혀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종종 막히거나 끊기는 때가 있죠. 특히 90년대 이야기의 결말은 그렇습니다. 90년대 중반은 그렇게까지 옛날이 아니에요. '그 때는 그랬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람들이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순전히 계획 하에 결말을 맺기 위한 인위적인 선택입니다. 계획이 늘 조금씩 사람들을 앞서는 겁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성인 이야기의 떡밥입니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에서는 성인 시절의 이야기가 대학생 시절 이야기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이야기가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이고 15년 뒤의 이야기는 열린 채 끝났던 이야기를 봉합하는 기능적 이유로 존재하는 거죠. 고맙게도 이 봉합과정은 멜로드라마의 불필요한 과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딱 끝나야 할 때 끝나요.

영화의 관심은 엄태웅/한가인 커플보다 이제훈/수지 커플에 쏠립니다. 특히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제훈은 연기할 거리가 많아요. 하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고려해보면 연기 밸런스는 좋은 편입니다. 거의 한국 남자애들이 간직한 첫사랑의 이상처럼 보이는 수지나, 건들건들 냉소적인 엄태웅이나, 딱 부러지고 예민한 한가인이나, 모두 자기 역할이 있죠. 대학생 시절과 30대 시절 배우들의 외모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 반대로 새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죠. 15년이면 충분히 사람 하나가 통째로 바뀔 수 있는 기간이니까.

과거의 이야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영화이니, 90년대의 회고는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꿋꿋하게 "90년대가 무슨 옛날이야! 인터넷도 됐는데!"라고 주장하렵니다. 하지만 과거의 모든 특정 시기는 이런 말을 들었겠죠. 특히 시대를 촘촘하게 구분해줄 수 있는 문화적 지표들이 많은 요새엔 과거의 회상은 더 세밀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가 과거를 그리는 방식 또한 바뀌어가는 거겠죠. (12/03/14) 

★★★☆

기타등등
1. 영화의 구성과 회고적 분위기 때문에 은근슬쩍 넘어갈 수도 있는데, 솔직히 승민은 진짜 나쁜 놈입니다. 멍청하고 나쁜 건지, 그냥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 후자 같습니다. 승민을 타자화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요.

2. 음악이 조금 더 좋았다면 좋았을 텐데. 영화의 구성과 성격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말랑말랑 로맨스의 분위기를 내는 것으론 부족해요. 그리고 [기억의 습작]은 기능적으로 조금 걸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화면이 무엇이 깔리건, 노래가 나오는 순간 그냥 주인공이 되어버리거든요. 
90년대를 지나온 아이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좋은 곡인 건 여전히 사실이지만요.

3. 관객들은 승민의 재수생 친구로 나오는 조정석을 좋아할 겁니다. 

4. [말하는 건축가]와 동시상영하면 근사할 텐데 말입니다.


감독: 이용주, 출연: 이제훈, 수지, 엄태웅, 한가인, 고준희, 조정석, 유연석, 김동주, 이승호, 김의성, 박수영, 조현철,  다른 제목: Architecture 101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Architecture_101.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8426

    • 평가가 좋네요. 꼭 봐야겠군요.
    • 헉 별점 어쩔거임 ^^
      이걸 극장에서 봐야하나.........
    •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듀나님의 평이로군요!
    • 국내멜로가 별3개반이라니, 우와! 봐야겠네요.
    • 헐...여기저기서 호평이....ㅋ
    • 이 영화 진짜 평가가 너무 좋네요.
      보신 분들은 다들 좋다고 하니 봐야 하려나...
    • 음...뭔가 이렇게 흥분하신건 오랜만인 듯 해요...
    • 다들 좋다는 얘기까진 아니었지만, 어쨌든 볼만한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네요. 듀나님 평을 들으니 더욱.
    • I don't like this kind of title. So pretentious. Btw, I visit here in order to read your critique on the Chronicle (2012) http://www.rottentomatoes.com/m/chronicle/
    • 기대됩니다. 이제훈 팬이라서 지난해부터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최근엔 건축에 대한 관심도 부쩍 늘어서 이 영화의 건축 장면들도 너무 기대되요!
    • 개론이 pretentious할 수 있나요.
    • 특히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제훈은 연기할 거리가 많아요. 하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고려해보면 연기 밸런스는 좋은 편입니다.

      이 문장이 좀 말이 안되지 않나요????
      • 바로 뒷부분의 맥락을 보면 말이 되지요 이제훈이 연기할거리가 많지만 나머지 배우들도 자기가 연기할부분이 분명하니 배우들의 연기 밸런스가 적절하다 이말이군요
    • 첫사랑이나 90년대를 회고하는 작품이라기보다, 우리 기억 속의 공간에 대한 영화라 생각하면 더 좋은 영화가 되는 것 같아요. 기억의 습작 가사를 되새기면서요.
    • 이번에 한국 가면 봐야겠네요.
    • 저는 영화속 남자 주인공에 감정이입해서 봤는데요. 남자주인공이 나쁜놈이라는 판단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실 남자주인공은 철저하게 약자입니다. 그냥 평범한 공대 1학년 남자애가 음대의 예쁘고 옷 잘입고, 미래에 대한 꿈이 확실하고 방송반에서 아나운서까지 하는 여자애를 맘껏 좋아할 수 있었을까요? 화분에 흙을 넣으면서 여자애가 선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때랑 선배의 차에 같이 타서 가면서 자기 티셔츠 로고가 틀리다고 우스워하는 두 사람의 말을 들었을때 자신감을 잃을 수 밖에 없었을거예요.
    • 이런 식으로 자신을 변론하기 시작하면 끝도 한도 없죠. 핑계는 놔두고 90년대 이야기 결말에서 한 행동을 보시죠. 게다가 그런 변명을 15년 동안이나 해왔다면?
    • 흑흑.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어보기만 했다면. 어른 승민이 철문을 만지고 비행기타고 날아갈 때 표정을 보니 시간이 오래 흘러 반성을 하긴 한 것 같습니다.
    • 승민이 좋은 사람인 건 아니죠. 잠자는 서연을 성추행한 것만 놓고 보더라도 그건 승민이 그렇게 경멸한 학교 선배 재욱이 서연에게 한 짓과 같은 종류의 나쁜 짓이에요. 배우가 이제훈이었으니까 다들 그냥저냥 넘어가는 모양이었죠.
    • Le Rhig/ 아, 그럼 전세계 성추행범수는 남자인구수 근사치로 잡으면 되겠네요.
    • 전 남자 입장에서 충분히 찌질하고 그만큼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매슈//그게 바로 남자들이 해 온 짓이고, 성폭력을 성폭력이 아닌 것으로 꾸며 온 기만의 역사 같은데요.
    • -- 스포 --



      몇가지 암시가 있었잖아요.
      맥주병을 받던 서연의 표정은?
      승민이 반지하방 문에 귀를 대고 들은 소리는?
      빈집에 씨디 두러온 서연의 아이섀도우 화장은?

      서연은 공대 앞에서 꺼져준 뒤에 그 난봉꾼 선배와 1~2년은 사귀었을테고,
      가끔 우연히 그녀를 캠퍼스에서 볼 때마다 승민은 쓰라려서
      납뜩이와 술 퍼마시며 그로부터 ㅆㄴ이라 부르는 소리를 계속 들었을테고.....
      뭐 이런 (스스로의 경험담으로 채우라는) 여백들이 있잖아요.
      성폭력 이라는 걸 정당화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쿨럭
      이 영화에서의 그것이 성폭력이었는지는 의문,,,,,
    • 워매... 리플들이 기가 차네요.
      주인공이 나쁘다는 주인장의 말이,야 그새끼 성추행범이야!! 란 의미는 아닌데,
      뭔 XY 염색체의 야만성과 무지함까지 나온데요.
    • 영화본후 남자들은 수지가 선배랑 잤나,안잤나만 생사여부가 걸린 문제처럼 따지고 있던데...
      여자들은 왜 승민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주지 않고 비겁하게 그냥두고갔냐를 따지더군요..

      저도 숫컷이라 승민쪽에 감정이입이 되었지만, 제 과거의 행동이 너무나 바보같았던!!
      듀나님 말씀처럼 제가 멍청하고 나빴는지, 그냥 나쁜놈이었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엔 너무 어렸었다고 변명해봅니다. 10여년이 흐른뒤 상황까지 너무 비슷해서(누구나 그렇겠지만^_^;;) 이 영화의 잔상은 꽤 오랫동안 남을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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